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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 - 야시/별/보리/백묵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6. 4.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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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조 4편) 

 

 

야시


이병기

 


날마다, 날마다, 해만 어슬어슬 지면,
종로판에서 "싸구려, 싸구려" 소리 나누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 골목, 저 골목으로
갓 쓴 이 벙거지 쓴 이, 깎은 이, 어중이떠중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흉성스럽게 오락가락한다.
높드란 간판 달은 납작한 기와집, 퀘퀘히 쌓이 먼지 속에,
묵은 갓망건, 족도리, 청홍실붙이, 어릿가게, d여중가리, 양화, 왜화붙이,
썩은 비옷, 쩔은 굴비, 무른 과일, 푸른 푸성귀부터 시든 푸성귀까지.
"십 전, 이십 전, 싸구려 싸구려" 부르나니, 밤이 깊도록, 목이 메이도록.


저 남산 골목에 우뚝우뚝 솟은 새 집들을 보라.
몇 해 전 조고마한 가게들 아니더냐?
어찌 하여 밤마다 싸구려 소리만 외치느냐?
그나마 찬 바람만 나면 군밤 장사로 옮기려 하느냐?

 

 

 

―『가람시조집』(문장사,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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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듯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게 나오드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 게오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보노라

 

 


―『가람시조집』(문장사,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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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


  이병기

 

 

  눈 눈 싸락눈 함박눈 펑펑 쏟아지는 눈
 

  연일 그 추위에 몹시 볶이던 보리 그 참한 포근한 속의 문득 숨을 눅여 강보
에 쌓인 어린애마냥 고이고이 자라노니


  눈 눈 눈 눈이 아니라 보리가 쏟아진다고 나는 홀로 춤을 추오

 

 

 

―『가람시조집』 (정음사,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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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묵


이병기

 

                                                        
몸을 담아두니 마음은 돌과 같다             

봄이 오고 감도 아랑곳 없을러니

바람에 날려든 꽃이 뜰 위 가득하고나


뜰에 심은 나무 길이 남아 자랐도다

새로 돋는 잎을 이윽히 바라보다

한 손에 백묵을 들고 가슴 아파 하여라

 

 

 

―『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