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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 님의 침묵 / 이별은 미의 창조 / 알 수 없어요 / 나룻배와 행인 / 당신을 보았습니다 / 찬송 / 사랑의 끝판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6. 9.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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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7편)

 

 

  님의 침묵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 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님의 향기로운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골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는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거와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얏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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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별은 미의 창조


  한용운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質) 없는 황금과 밤의 올(絲) 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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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 수 없어요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골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돍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적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갓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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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룻배와 행인


  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느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은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늙어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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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

 


  당신이 가신 후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 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 고 말하얏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야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民籍)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하랴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우리 나라의 현 시국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온갖 윤리, 도덕, 법률이 무력과 재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다는 의미) 이제 H.D. 소로의 경고, "법은 매일 부정의를 집행한다."는 그의 경고는 우리 발등 앞에 떨어진 불이 되었습니다.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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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한용운

 

 

님이여, 당신은 백 번이나 단련한 금결입니다.

뽕나무 뿌리가 산호가 되도록 천국의 사랑을 받읍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아츰 볕의 첫걸음이여.

 
님이여, 당신은 의가 무거웁고, 황금이 가벼운 것을 잘 아십니다.

거지의 거친 밭에 복(福)의 씨를 뿌리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옛 오동(梧桐)의 숨은 소리여.

 
님이여, 당신은 봄과 광명과 평화를 좋아하십니다.

약자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의 보살이 되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얼음바다에 봄바람이여.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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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끝판


   한용운

 


  네 네 가요, 지금 곧 가요.
  에그, 등불을 켜랴다가 초를 거꾸로 꽂었습니다그려. 저를 어쩌나, 저 사람들이 숭보겠네.
  님이여, 나는 이렇게 바쁩니다. 님은 나를 게으르다고 꾸짖습니다. 에그 저것 좀 보아.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하시네.
  내가 님의 꾸지람을 듣기로 무엇이 싫겄습니까, 다만 님의 거문고 줄이 완급을 잃을까 저퍼합니다.


  님이여, 하늘도 없는 바다를 거쳐서, 느릅나무 그늘을 지워 버리는 것은 달빛이 아니라 새는 빛입니다.
  홰를 탄 닭은 날개를 움직입니다.
  마구에 매인 말은 굽을 칩니다.  
  네 네 가요, 이제 곧 가요.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