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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균 - 외인촌 / 설야(雪夜) / 와사등(瓦斯燈) / 추일서정(秋日抒情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6. 10.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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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외인촌


김광균

 


하이얀 모색(暮色)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역등을 달은 마차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룻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묻히인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花園地)의 벤치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곤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다.

외인 묘지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란 별빛이 내리고.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村落) 시계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古塔)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와사등』. 남만서방. 1939. 『김광균 전집』. 국학자료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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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야(雪夜)


김광균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초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의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찬란한 의상을 하고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와사등』. 남만서방. 1939. 『김광균 전집』. 국학자료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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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사등(瓦斯燈)


김광균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여름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승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체
사념 벙어리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니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와사등』. 남만서방. 1939. 『김광균 전집』. 국학자료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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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일서정(秋日抒情


김광균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즈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한가닥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우에 세로팡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길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간다.

 

 

 

(『기항지』. 정음사. 1947 :『김광균 전집』. 국학자료원. 2002)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