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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익 - 폐가(廢家 ) /그리운 악마 / 추락을 꿈꾸며 / 방울소리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6. 11.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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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폐가(廢家)


이수익

 

 

빈 산막(山幕)엔
능구렁이처럼 무겁게 살찐 고요가
땅바닥에 배를 깔고 숨을 몰아쉬고 있다.
흙담이 무너져내려 썩고 있고, 나무기둥이며 문살이
오랜 세월 비바람에 썩고 썩어
향기로운 부식의 냄새를 피워 올리는,
이 버려진 산막 하나가 고스란히 해묵은 포도주처럼
맑은 달빛과 바람소리와 이슬을 먹고 발효하는
심산(深山)의 특산품인 것을.


―신이 가끔 그 속을 들여다보신다.

 

 

 
(『푸른 추억의 빵』.고려원. 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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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악마


이수익
 

 
숨겨 둔 정부(情婦) 하나
있으면 좋겠다.
몰래 나 홀로 찾아 드는
외진 골목길 끝, 그 집
불 밝은 창문
그리고 우리 둘 사이
숨막히는 암호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


아무도 눈치 못 챌
비밀 사랑,
둘만이 나눠 마시는 죄의 달디단
축배 끝에
싱그러운 젊은 심장의 피가 뛴다면!


찾아가는 발길의 고통스런 기쁨이
만나면 곧 헤어져야 할 아픔으로
끝내 우리
침묵해야 할지라도,


숨겨 둔 정부 하나
있으면 좋겠다.
머언 기다림이 하루종일 전류처럼 흘러
끝없이 나를 충전시키는 여자,
그 악마 같은 여자.


 


(『푸른 추억의 빵』. 고려원.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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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을 꿈꾸며


이수익

 

 

최고봉이 수직에 가까운
급경사를 이룸으로써
하늘의 뜻과 가까워지려는 듯.


만년설 덮인
해발 4,487미터의 마터호른 산은
오늘도
은빛 낭떠러지 빙벽에 매달린
알피니스트들을 조용히 거부하듯 밀어내지만


저 죽음의 향기에 마취된 이들은
벼랑이 뿜는 현란한 추락의 상상력에
몸을 떨며
천형(天刑)처럼 암벽을 기어오른다.


세상의 때를 묻히고 싶지 않은
고고한 산이 날카롭게 세우는 죽음이 벼랑 아래로
아득하게,


죽음에 취한 이들이 걷는 길이 있다.

 

 

 

(『푸른 추억의 빵빛』. 고려원.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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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소리


 이수익

 

 

청계천 7가 골동품 가게에서
나는어느 황소 목에 걸렸던 방울을
하나 샀다.


그 영롱한 소리의 방울을 딸랑거리던
소는 이미 이승의 짐승이 아니지만,
나는 소를 몰고 여름 해질녘 하산(下山)하던
그날의 소년이 되어, 배고픈 저녁 연기 피어오르는
마을로 터덜터덜 걸어 내려왔다.

 

장사치들의 흥정이 떠들썩한 문명의
골목에선 지금, 삼륜차가 울려대는 경적이
저자바닥에 따가운데
내가 몰고가는 소의 딸랑이는 방울소리는
돌담 너머 옥분이네 안방에
들릴까 말까,
사립문 밖에 나와 날 기다리며 섰을
누나의 귀에는 들릴까 말까.

 

 


(『단순한 기쁨』.고려원. 1987)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