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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 - 역병이 돌고 있다 /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 동백열차 / 구두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6. 24.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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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역병이 돌고 있다


송찬호

 


역병이 돌고 있다 멀리서 목탁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린다 모두들 서둘러 귀가하고
문을 닫아 걸고 귀를 막는다


병을 물리칠 수 있다면,
벽을 일으키고 그 절벽마다
칼에 힘을 주어 경을 새긴다


이윽고 얼굴을 깊이 가린 병자가 거리 저편에서 나타났다
얼마나 대가리를 쳤는지 눈 코 입이 문드러진
벌써 천 년 전에 유실되었던 목판본 얼굴
자기의 목을 쳐내고 부처의 머리를 얹었다가 부처마저 쳐 내고......


그가 머리에 썼던 것을 벗었다
모가지가 떨어져 나간 혼 없는 육신의 목에 훤하니 달덩어리를 받쳐 얹고!


그가 옆을 지나갔다 달 가듯이!
칼을 뒤로 감췄다


멀리서 낭랑하게 경 읽던 소리
뚝, 그치고


그가 오늘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오늘 밤 그곳에도 달이 뜨리라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믿음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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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송찬호

 


장지의 사람들이 땅을 열고 그를 봉해 버린다 간단한
외과수술처럼 여기 그가 잠들다
가끔씩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그곳에 심겨진 비명을 읽고 간다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단단한 장미의 외곽을 두드려 깨는 은은한 포성의 향기와
냉장고 속 냉동된 각진 고기덩어리의 식은 욕망과
망각을 빨아들이는 사각의 검은 잉크병과
책을 지우는 사각의 고무지우개들


오래 구르던 둥근 바퀴가 사각의 바퀴로 멈추어서듯
죽음은 삶의 형식을 완성하는 것이다
미래를 예언하듯 그의 땅에 꽃을 던진다
미래는 죽었다 산자들은 결코 미래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산다는 것은 얼마나 찬란한 한계인가
그 완성을 위하여
세계를 죽일 수 없음을 알면서도 날마다 살인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은


폐허 속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망각 속에서 우리가 살인자라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다
풍성한 과일을 볼 때마다
그의 썩은 얼굴을 기억하듯


여기 그가 잠들다
여전히 겨울비는 내리고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믿음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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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열차


송찬호

 

 

지금 여수 오동도는
동백이 만발하는 계절
동백 열차를 타고 꽃구경 가요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거짓말인 삼월의 신부와 함께


오동도, 그 푸른
동백섬을 사람들은
여수항의 눈동자라 일컫지요
우리 손을 잡고 그 푸른 눈동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요


그리고 그 눈부신 꽃그늘 아래서 우리 사랑을 맹세해요
만약 그 사랑이 허튼 맹세라면 사자처럼 용맹한
동백들이 우리의 달콤한 언약을 모두 잡아먹을 거예요
말의 주춧돌을 반듯하게 놓아요 풀무질과 길쌈을 다시 배워요


저 길길이 날뛰던 무쇠 덩어리도 오늘만큼은
화사하게 동백열차로 새로 단장됐답니다
삶이 비록 부스러지기 쉬운 꿈일지라도
우리 그 환한 백일몽 너머 달려가 봐요 잠시 눈 붙였다
깨어나면 어느덧 먼 남쪽 바다 초승달 항구에 닿을 거예요


 

 
(『붉은 눈, 동백』. 문학과지성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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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송찬호

 


나는 새장을 하나 샀다
그것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날뛰는 내 발을 집어넣기 위해 만든 작은 감옥이었던 것


처음 그것은 발에 너무 컸다
한동안 덜그럭거리는 감옥을 끌고 다녀야 했으니
감옥은 작아져야 한다
새가 날 때 구두를 감추듯


새장에 모자나 구름을 집어넣어 본다
그러나 그들은 언덕을 잊고 보리 이랑을 세지 않으며 날지 않는다
새장에는 조그만 먹이통과 구멍이 있다
그것이 새장을 아름답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새 구두를 샀다
그것은 구름 위에 올려져 있다
내 구두는 아직 물에 젖지 않은 한 척의 배,


한 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 때는 제멋대로였던 삶의 한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센 내 발을 위로하는 것이다
오래 쓰다 버린 낡은 목욕통 같은 구두를 벗고
새의 육체 속에 발을 집어넣어 보는 것이다. 

 

 


(『10년 동안의 빈 의자』. 문학과지성사. 199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