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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 - 화사(花蛇) / 귀촉도(歸蜀途) / 국화 옆에서 / 고조古調 / 동천(冬天) / 상가수(上歌手)의 소리 / 낮잠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6. 26.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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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7편)

 


화사(花蛇)

 

서정주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크다른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몽뚱어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낼롱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안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보다. 꽃대님보다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섹시, 고양이 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화사집』. 남만서고. 1941:『미당 시전집』. 민음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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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촉도(歸蜀途)


서정주

 
 

눈물 아롱 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신이나 삼아줄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걸.


호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 굽이 은하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육날 메투리 신 중에서 으뜸인 메투리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신발이었느리라.
*귀촉도 행용 우리들이 두견이라고도 하고 소쩍새라고도 하고 접동새라고도 하고 자규(子規)라고도 하는 새가, 귀촉도…… 그런 발음으로써 우는 것이라고 지하(地下)에 돌아간 우리들의 조상의 때부터 들어온 데서 생긴 말씀이니라.

 

 


(『귀촉도』. 선문사. 1946:『미당 시전집』. 민음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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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 옆에서


서정주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시선』. 정음사, 1955:『미당 시전집 (민음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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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古調


서정주

 


국화꽃이 피었다 사라진 자린
국화꽃 귀신이 생겨나 살고


싸리꽃이 피었다가 사라진 자린
싸리꽃 귀신이 생겨나 살고


사슴이 뛰놀다가 사라진 자리
사삼의 귀신이 생rusk 살고


영 너머 할머니의 마을에 가면
할머니가 보시던 꽃 사라진 자리
할머니가 보시던 꽃 귀신들의 떼


꽃귀신이 생겨나서 살다 간 자린
꽃귀신의 귀신들이 또 나와 살고


사슴의 귀신들이 살다 간 자린
그 귀신의 귀신들이 또 나와 살고

 

 


 (『신라초』. 정믐사. 1960;『미당 시전집』.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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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서정주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동천』. 민중서관. 1968;『미당 시전집』.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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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가수(上歌手)의 소리


  서정주

 

 

  질마재 상가수의 노랫소리는 답답하면 열두 발 상무를 짓고, 따분하면 어깨에 고깔 쓴 중을 세우고, 또 상여면 상여머리에 뙤약볕 같은 놋쇠 요령 흔들며, 이승과 저승에 뻗쳤습니다.
  그렇지만, 그 소리를 안 하는 어느 아침에 보니까 상가수는 뒤깐 똥오줌 항아리에서 똥오줌 거름을 옮겨내고 있었는데요, 왜, 거, 있지 않아, 하늘의 별과 달도 언제나 잘 비치는 우리네 똥오줌 항아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지붕도 앗세 작파해버린 우리네 그 참 재미있는 똥오줌 항아리, 거길 명경(明鏡)으로 해 망건 밑에 염발질을 열심히 하고 서 있었습니다. 망건 밑으로 흘러내린 머리털들을 망건 속으로 보기 좋게 밀어넣어 올리고 쇠뿔 염발질을 점잖게 하고 있어요.
  명경도 이만큼은 특별나고 기름져서 이승 저승에 두루 무성하던 그 노랫소리는 나온 것 아닐까요?

 


 (『질마재 신화』. 일지사. 1975;『미당 시전집』.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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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


서정주

 


묘법연화경 속에
내 까마득 그 뜻을 잊어먹은 글자가 하나.
무교동 왕대폿집으로 가서
팀을 오백원이나 주어도
도무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나는 글자가 하나.
내리는 이슬비에
자라는 보리밭에
기왕이면 비 열 끗짜리 속의 장끼나 한 마리
여기 그냥 그려 두고
낮잠이나 들까나

 

 


 (『떠돌이의 시』. 민음사. 1976;『미당 시전집』. 199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