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조 4편)
별 1
이상범
태백의 씻긴 별을 품에 담쑥 안고 왔다
구절리 전별의 손 희끗희끗 구절초 꽃
증산역* 밤 깊은 해후 별이 총총 빛났다.
*증산역 태백선에서 구절리행으로 나뉘는 역
(『별』. 동학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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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손
―서시
이상범
두 손을 펴든 채 가을볕을 받습니다
하늘빛이 내려와 우물처럼 고입니다
빈손에 어리는 어룽이 눈물보다 밝습니다.
비워 둔 항아리에 소리들이 모입니다
눈발 같은 이야기가 정갈하게 씻깁니다
거둘 것 없는 마음이 억새꽃을 흩습니다.
풀 향기 같은 성좌가 머리 위에 얹힙니다
죄다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습니다
가을 손 조용히 여미면 떠날 날도 보입니다.
(『별』. 동학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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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포 환상곡
―달팽이 선생에게
이상범
어쩌면 마지막 지휘일지 모르겠다
노구에 연미복 끌며 천천히 등장하는
먼 달빛 조명 받으며 무대중앙 서 있다.
달팽이의 여린 뿔에 휘감기는 우주의 소리
숨막히는 고요 속에 비밀의 문 열어놓고
음색도 꺼풀 벗고서 별빛 불러 앉힌다.
숲의 바람이 일고 물면이 들먹인다
이파리와 이파리 사이 밤의 향기 돌며 가고
저 멀리 강물을 뉘인 곳 풀숲들이 웅성댄다.
모든 것이 가능하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가 잡은 지휘봉에 춤추는 우포 환상곡
갈채 속 연미복 끌며 점 하나로 사라진다.
(『신전의 가을』. 동화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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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다리소반
이상범
늘 봐도 비실비실 지레 지쳐 굳은 상판
대접도 변변히 받지 못한 툇마루 끝
지금은 땟물 나는 거실 마른 꽃의 꽃받이로.
이름을 다시 달자면 그야 꽃사슴 다리
고봉밥, 술 한 대접, 풋나물, 자반 한 토막
그런 것 고작인 날에 개다린들 황송했지.
때 끼고 윤기 돌고 흠이 간 작은 소반
가다간 혈이 닿아 눈물 찔끔 한도 찔끔
발그레 일그러진 면상 먼 얼굴이 겹친다.
(『별』. 동학사. 1997)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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