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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범] - 별 1 / 가을 손 ―서시 / 우포환상곡 ―달팽이 선생에게 / 개다리소반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6. 25.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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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조 4편)

 

 

별 1


이상범

 


태백의 씻긴 별을 품에 담쑥 안고 왔다


구절리 전별의 손 희끗희끗 구절초 꽃


증산역* 밤 깊은 해후 별이 총총 빛났다.

 

*증산역 태백선에서 구절리행으로 나뉘는 역

 

 

 

(『별』. 동학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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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손

―서시


이상범

 

 
두 손을 펴든 채 가을볕을 받습니다


하늘빛이 내려와 우물처럼 고입니다


빈손에 어리는 어룽이 눈물보다 밝습니다.

 

비워 둔 항아리에 소리들이 모입니다


눈발 같은 이야기가 정갈하게 씻깁니다


거둘 것 없는 마음이 억새꽃을 흩습니다.

 

풀 향기 같은 성좌가 머리 위에 얹힙니다


죄다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습니다


가을 손 조용히 여미면 떠날 날도 보입니다.

 

 


(『별』. 동학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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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포 환상곡
―달팽이 선생에게

 

이상범

 

 

어쩌면 마지막 지휘일지 모르겠다
노구에 연미복 끌며 천천히 등장하는
먼 달빛 조명 받으며 무대중앙 서 있다.
달팽이의 여린 뿔에 휘감기는 우주의 소리
숨막히는 고요 속에 비밀의 문 열어놓고
음색도 꺼풀 벗고서 별빛 불러 앉힌다.
숲의 바람이 일고 물면이 들먹인다
이파리와 이파리 사이 밤의 향기 돌며 가고
저 멀리 강물을 뉘인 곳 풀숲들이 웅성댄다.
모든 것이 가능하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가 잡은 지휘봉에 춤추는 우포 환상곡
갈채 속 연미복 끌며 점 하나로 사라진다.

 

 


(『신전의 가을』. 동화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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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다리소반


이상범

 


늘 봐도 비실비실 지레 지쳐 굳은 상판

대접도 변변히 받지 못한 툇마루 끝

지금은 땟물 나는 거실 마른 꽃의 꽃받이로.

이름을 다시 달자면 그야 꽃사슴 다리

고봉밥, 술 한 대접, 풋나물, 자반 한 토막

그런 것 고작인 날에 개다린들 황송했지.

때 끼고 윤기 돌고 흠이 간 작은 소반

가다간 혈이 닿아 눈물 찔끔 한도 찔끔

발그레 일그러진 면상 먼 얼굴이 겹친다.

 

 

 

(『별』. 동학사. 1997)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