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7편)
화사(花蛇)
서정주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크다른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몽뚱어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낼롱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안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보다. 꽃대님보다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섹시, 고양이 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화사집』. 남만서고. 1941:『미당 시전집』. 민음사. 1994)
--------------------------------
귀촉도(歸蜀途)
서정주
눈물 아롱 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신이나 삼아줄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걸.
호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 굽이 은하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육날 메투리 신 중에서 으뜸인 메투리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신발이었느리라.
*귀촉도 행용 우리들이 두견이라고도 하고 소쩍새라고도 하고 접동새라고도 하고 자규(子規)라고도 하는 새가, 귀촉도…… 그런 발음으로써 우는 것이라고 지하(地下)에 돌아간 우리들의 조상의 때부터 들어온 데서 생긴 말씀이니라.
(『귀촉도』. 선문사. 1946:『미당 시전집』. 민음사. 1994)
-------------------
국화 옆에서
서정주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시선』. 정음사, 1955:『미당 시전집 (민음사. 1994)
--------------------------
고조古調
서정주
국화꽃이 피었다 사라진 자린
국화꽃 귀신이 생겨나 살고
싸리꽃이 피었다가 사라진 자린
싸리꽃 귀신이 생겨나 살고
사슴이 뛰놀다가 사라진 자리
사삼의 귀신이 생rusk 살고
영 너머 할머니의 마을에 가면
할머니가 보시던 꽃 사라진 자리
할머니가 보시던 꽃 귀신들의 떼
꽃귀신이 생겨나서 살다 간 자린
꽃귀신의 귀신들이 또 나와 살고
사슴의 귀신들이 살다 간 자린
그 귀신의 귀신들이 또 나와 살고
(『신라초』. 정믐사. 1960;『미당 시전집』. 1994)
----------------------------
동천(冬天)
서정주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동천』. 민중서관. 1968;『미당 시전집』. 1994)
------------------------------
상가수(上歌手)의 소리
서정주
질마재 상가수의 노랫소리는 답답하면 열두 발 상무를 짓고, 따분하면 어깨에 고깔 쓴 중을 세우고, 또 상여면 상여머리에 뙤약볕 같은 놋쇠 요령 흔들며, 이승과 저승에 뻗쳤습니다.
그렇지만, 그 소리를 안 하는 어느 아침에 보니까 상가수는 뒤깐 똥오줌 항아리에서 똥오줌 거름을 옮겨내고 있었는데요, 왜, 거, 있지 않아, 하늘의 별과 달도 언제나 잘 비치는 우리네 똥오줌 항아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지붕도 앗세 작파해버린 우리네 그 참 재미있는 똥오줌 항아리, 거길 명경(明鏡)으로 해 망건 밑에 염발질을 열심히 하고 서 있었습니다. 망건 밑으로 흘러내린 머리털들을 망건 속으로 보기 좋게 밀어넣어 올리고 쇠뿔 염발질을 점잖게 하고 있어요.
명경도 이만큼은 특별나고 기름져서 이승 저승에 두루 무성하던 그 노랫소리는 나온 것 아닐까요?
(『질마재 신화』. 일지사. 1975;『미당 시전집』. 1994)
---------------
낮잠
서정주
묘법연화경 속에
내 까마득 그 뜻을 잊어먹은 글자가 하나.
무교동 왕대폿집으로 가서
팀을 오백원이나 주어도
도무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나는 글자가 하나.
내리는 이슬비에
자라는 보리밭에
기왕이면 비 열 끗짜리 속의 장끼나 한 마리
여기 그냥 그려 두고
낮잠이나 들까나
(『떠돌이의 시』. 민음사. 1976;『미당 시전집』. 199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 > 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태준- 빈집 1 / 맨발 / 한 호흡 / 누가 울고 간다 (0) | 2013.06.29 |
---|---|
김영랑 -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 모란이 피기까지는 /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 내 마음을 아실 이 (0) | 2013.06.27 |
[이상범] - 별 1 / 가을 손 ―서시 / 우포환상곡 ―달팽이 선생에게 / 개다리소반 (0) | 2013.06.25 |
송찬호 - 역병이 돌고 있다 /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 동백열차 / 구두 (0) | 2013.06.24 |
신석정 -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촐촐한 밤 /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 대바람 소리 (0) | 2013.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