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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빈집 1 / 맨발 / 한 호흡 / 누가 울고 간다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6. 29.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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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빈집 1

 

  문태준

 

 
  흙더버기 빗길 떠나간 당신의 자리 같았습니다 둘 데 없는 내 마음이 헌 신발들처럼 남아 바람도 들이고 비도 맞았습니다 다시 지필 수 없을까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으면 방고래 무너져내려 피지 못하는 불씨들


  종이로 바른 창 위로 바람이 손가락을 세워 구멍을 냅니다 우리가 한때 부리로 지푸라기를 물어다 지은 그 기억의 집 장대바람에 허물어집니다 하지만 오랜 후에 당신이 돌아와서 나란히 앉아 있는 장독들을 보신다면, 그 안에 고여 곰팡이 슨 내 기다림을 보신다면 그래, 그래 닳고 닳은 싸리비를 들고 험한 마당에 후련하게 쓸어줄 일입니다

 

 

(『수런거리는 뒤란』.창작과비평사. 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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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발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을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맨발』.창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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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호흡


문태준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고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워내고
피어난 꽃은 한번 더 울려
꽃잎을 떨어뜨려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고 부르자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맨발』.창비. 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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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울고 간다

 

문태준

 

 

밤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 새
가슴이 붉은 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불러 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빛처럼
여리고 여려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내 펴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 낼 수 없는

 

 

 

(『가재미』.문학과지성사. 2006)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