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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 별들은 따뜻하다 / 밤의 십자가 / 서울의 예수 / 그리운 부석사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7. 13.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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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별들은 따뜻하다


정호승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 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나에게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니
내가 용서라고 부르던 것들은
모두 거짓이었으나
북풍이 지나간 새벽거리를 걸으며
새벽이 지나지 않고 또 밤이 올 때
내 죽음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별들은 따뜻하다』. 창작과비평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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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십자가


정호승

 

 

밤의 서울 하늘에 빛나는
붉은 십자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십자가마다 노숙자 한 사람씩 못 박혀
고개를 떨구고 있다
어떤 이는 아직 죽지 않고 온몸을 새처럼
푸르르 떨고 있고
어떤 이는 지금 막 손과 발에 못질을 끝내고
축 늘어져 있고
또 어떤 이는 옆구리에서 흐른 피가
한강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비바람도 천둥도 치지 않는다
밤하늘엔 별들만 총총하다
시민들은 가족의 그림자들까지 한집에 모여
도란도란 밥을 먹거나
비디오를 보거나 발기가 되거나
술에 취해 잠이 들 뿐
아무도 서울의 밤하늘에 노숙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줄을 모른다
먼동이 트고
하나둘 십자가의 불이 꺼지고
샛별도 빛을 잃자
누구인가 검은 구름을 뚫고
고요히 새벽 하늘 너머로
십자가에 매달린 노숙자들을
한명씩 차례차례로 포근히
엄마처럼 안아 내릴 뿐

 

 

 

(『이 짧은 동안』.창작과비평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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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 예수


   정호승

 


   1


   예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2


   술 취한 저녁. 지평선 너머로 예수의 긴 그림자가 넘어간다. 인생의 찬밥 한 그릇 얻어먹은 예수의 등뒤로 재빨리 초승달 하나 떠오른다.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 속에 그리운 자유는 있었을까. 서울의 빵과 사랑과,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 사람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며, 사람들이 모래를 씹으며 잠드는 밤. 낙엽들은 떠나기 위하여 서울에 잠시 머물고, 예수는 절망의 끝으로 걸어간다.

 

 

   3


   목이 마르다. 서울이 잠들기 전에 인간의 꿈이 먼저 잠들어 목이 마르다. 등불을 들고 걷는 자는 어디 있느냐. 서울의 들길은 보이지 않고, 밤마다 잿더미에 주저앉아서 겉옷만 찢으며 우는 자여. 총소리가 들리고 눈이 내리더니, 사람과 믿음의 깊이 사이로 첫눈이 내리더니, 서울에서 잡힌 돌 하나, 그 어디 던질 데가 없도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운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 눈 내리는 서울의 밤하늘 어디에도 내 잠시 머리 둘 곳이 없나니,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 술잔을 들고 어둠 속으로 이 세상 칼끝을 피해 가다가, 가슴으로 칼끝에 쓰러진 그대들은 눈 그친 서울밤의 눈길을 걸어가라. 아직 악인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서울의 새벽에 귀를 기울이는 고요한 인간의 귀는 풀잎에 젖어, 목이 마르다. 인간이 잠들기 전에 서울의 꿈이 먼저 잠이 들어 아, 목이 마르다.

 

 

   4


   사람의 잔을 마시고 싶다. 추억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소주잔을 나누며 눈물의 빈대떡을 나눠 먹고 싶다. 꽃잎 하나 칼처럼 떨어지는 봄날에 풀잎을 스치는 사람의 옷자락 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나라보다 사람의 나라에 살고 싶다. 새벽마다 사람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서울의 등등잔에 홀로 불을 켜고 가난한 사람의 창에 기대어 서울의 그리움을 그리워하고 싶다.

 

 

   5


    나를 섬기는 자는 슬프고, 나를 슬퍼하는 자는 슬프다. 나를 위하여 기뻐하는 자는 슬프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는 더욱 슬프다. 나는 내 이웃을 위하여 괴로워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별들을 바라보지 않았나니,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자들은 불행하고, 내 이름을 간절히 사랑하는 자들은 더욱 불행하다.

 

 


(『서울의 예수』. 민음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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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부석사


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창작과비평사. 1997)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