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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 노동의 새벽 / 다시 / 시다의 꿈 / 그해 겨울나무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7. 13.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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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노동의 새벽


박노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이러다간 끝내 오래 못가지


설을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가도
끝내 못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신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스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줏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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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박노해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해냄.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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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다의 꿈

 

박노해

 


긴 공장의 밤
시린 어깨 위로
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

 
드르륵 득득
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시다의 언손으로
장미빛 꿈을 잘라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뚝 잘라
피흘리는 가죽본을 미싱대에 올린다
끝도 없이 올린다


아직은 시다
미싱대에 오르고 싶다
미싱을 타고
장군처럼 당당한 얼굴로 미싱을 타고
언 몸뚱아리 감싸줄
따스한 옷을 만들고 싶다
찢겨진 살림을 깁고 싶다


떨려오는 온몸을 소름치며
가위질 망치질로 다짐질하는
아직은 시다,
미싱을 타고 미싱을 타고
갈라진 세상 모오든 것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싶은
시다의 꿈으로
찬바람 치는 공단거리를
허청이며 내달리는
왜소한 시다의 몸짓
파리한 이마 위으로
새벽별 빛나다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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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나무


박노해

 


1


그해 겨울은 창백했다
사람들은 위기의 어깨를 졸이고 혹은 죽음을 앓기도 하고
온 몸 흔들며 아니라고도 하고 다시는 이제 다시는
그 푸른 꿈은 돌아오지 않는다고도 했다
세계를 뒤흔들며 모스크바에서 몰아친 삭풍은
팔락이던 이파리도 새들도 노랫소리도 순식간에 떠나 보냈다
잿빛 하늘에선 까마귀 떼가 체포조처럼 낙하하고
지친 육신에 가차없는 포승줄이 감기었다
그해 겨울,
나의 시작은 나의 패배였다

 

2

 

후회는 없었다 가면 갈수록 부끄러움뿐
다 떨궈 주고 모두 발가벗은 채 빛남도 수치도 아닌 몰골 그대로
칼바람 앞에 세워져 있었다
언 땅에 눈이 내렸다
숨막히게 쌓이는 눈송이마저 남는 가지를 따닥따닥 분지르고
악다문 비명이 하얗게 골짜기를 울렸다
아무 말도 아무 말도 필요 없었다
절대적이던 남의 것은 무너져 내렸고
그 것은 정해진 추락이었다
몸뚱이만 깃대로 서서 처절한 눈동자로 자신을 직시하며
낡은 건 떨치고 산 것을 보듬어 살리고 있었다
땅은 그대로 모순투성이 땅
뿌리는 강인한 목숨으로 변함없는 뿌리일 뿐
여전한 것은 춥고 서러운 사람들, 아
산다는 것은 살아 움직이며 빛살 틔우는 투쟁이었다

 

3


이 겨울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말 할 수 없었다
죽음 같은 자기비판을 앓고 난 수척한 얼굴들은
아무 데도 아무 데도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디를 긁히며 나이테를 늘리며 뿌리는 빨갛게 언 손을 세워 들고
촉촉한 빛을 스스로 맹글며 키우고 있었다
오직 핏속으로 뼛속으로 차오르는 푸르름만이
그 겨울의 신념이었다
한 점 욕망의 벌레가 내려와 허리 묶은 동아줄에 기어들고
마침내 겨울나무는 애착의 띠를 뜯어 쿨럭이며 불태웠다
살점 에이는 밤바람이 몰아쳤고 그 겨울 내내
뼈아픈 침묵이 내면의 종 울림으로 맥놀이 쳐갔다
모두들 말이 없었지만 이 긴 침묵이
새로운 탄생의 첫발임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해 겨울,
나의 패배는 참된 시작이었다

 

 

 

(『참된 시작』. 창비. 1993)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