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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 금홍아 금홍아* / 등나무 아래의 한때 / 인파이터 ―코끼리군의 엽서 / 우리는 세계에서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7. 15.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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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금홍아 금홍아*


  이장욱

 

 

   1


   금홍아 금홍아 뒤척이는 건 마음일까 그림자일까 네 품에선 세상 어둠이 환해져 어둠의 흰 뼈들이 바스락거리지 금홍아 금홍아 눈감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어 누구나 긴 골목 끝에 집 한 채씩 지어두는데 아, 저 언덕배기 내 헐한 창문은 캄캄히 젖어 있네 책보만한 달빛도 안 드는 꽃무늬 방에서 하루 종일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아무리 되뇌어도 나는 한 구의 '에피그램'도 못 얻는데, 금홍아 금홍아 왜 넌 돌아오지 않는 거야?

 

 

  2


  금홍아 금홍아 아침에 눈뜨면 내 몸은 젖은 양말 금홍아 금홍아 머리맡 뒤적이면 딱딱한 방바닥과 재떨이, 담배 연기 올라가는 천장에 피고 지는 누런 꽃잎들과 생각으로 놀고 있으면 어쩐지 금홍아 금홍아 내 오랜 무릉도원 삼십삼번지에 흐르는 화사한 화장품 냄새와 평생을 보내고 싶어 그럴 때나 내 정신은 은화처럼 맑네 위트도 패러독스도 지금 내겐 없으니 금홍아 금홍아아 꿈은 정말 가위 같아 왜 내 목젖이 서늘할까?

 

 

  3

 
  감정은 어떤 포우즈 금홍아 금홍아 마당귀 화단에 잘린 벽돌들 녹슬어 고요한 철대문, 어쩌다 딱딱한 것들과 친해졌는지 '중병에 걸려 누웠으니 얼른 오라'고 금홍아 금홍아 나는 네게 옆서를 띄우고 싶어 이십세기와 '짱껭뽕'을 해서라도 금홍아 금홍아 나는 네 품에 안기고 싶네 하루 종일 내 딱딱한 그림자는 어디 가서 나를 어떻게 하려는 음모에 골몰중인지 다만 나 자신을 위조하는 것이 할 만한 일일 뿐 금홍아 금홍아아 하지만 디테일 때문에 속는다거나 해서야 되겠니?

 

 

  4
  이 맑은 날 금홍아 금홍아 네가 없는 데서 긴 그림자 하나와 저녁을 맞네 빈 곳은 채우려 할수록 자라니까 빈 채로 두고 대문 밖 빈 하늘 바라보면 저것들, 어딘가 떨어지려고 날아가는 솜털 꽃씨들, 굿바이 굿바이 손 흔들며 나도 네게로 가고 싶어 그래도 금홍아 금홍아 너는 노래 부르지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질러 버려라 운운…… 그런데 금홍아 금홍아아 꿈은 정말 가위 같아 왜 네 목젖이 서늘할까?

 

 


*금홍이는 시인 이상의 애인이다. 상(1910∼1937)과 나(1968∼)의 불편한 관계를 표시하기 위해 그의 소설 「날개」「봉별기(逢別記)」「종생기(終生記)」등에서 몇 구절을 차용했다.

 

 

 

(『내 잠 속의 모래산』. 민음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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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나무 아래의 한때


  이장욱

 

 

  내가 만난 女子는 한 女子.  그 女子는 바람 불듯 흘러가는 종이봉지. 내가 만난 女子는 단 한 女子. 그 女子는 바람 부는 수유리에 스며 흔적 없는 그날, 오후의 쓸쓸한 빗물.


  생은 다른 곳에 가령 수유리 수유 시장 입구 수유 분식집 앞을 지나는 오후 세 시의 바람. 바람 속을 지나는 저녁 일곱 시의 또 다른 바람. 내리는 어둠과, 더불어 펄럭이는 단 한 순간의 골목을 지나가는 아주 오랜 여행 속에서.


  내가 만난 女子는 한 女子. 수유리 수유 시장 입구 수유 분식집 앞을 무심한 얼굴로 지나던 단 한 女子. 그 女子는 오후 세 시의 바람과 저녁 일곱 시의 또 다른 바람을 지나는 그날, 오후의 우연한 빗물.


  그 女子 바라보며 등나무 아래 앉아 있는 새벽인데, 새벽을 지우며 점점이 내리는 비. 나는 바람이 태어나는 바람의 고향을 생각하여 어이없는 한때에 고여 있네. 어이없이 등나무 아래의 한때를 흘러가는 어느 다른 생의 여자, 저기 저 다른 생의, 단 한 女子

 

 


(『내 잠 속의 모래산』.민음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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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파이터
―코끼리군의 엽서


이장욱

 


저기 저, 안전해진 자들의 표정을 봐.
하지만 머나먼 구름들이 선전포고를 해온다면
나는 병어리처럼 끝내 싸우지.
김득구의 14회전, 그의 마지막 스텝을 기억하는지.
사랑이 없으면 리얼리즘도 없어요
내 눈앞에 나 아닌 네가 없듯. 그런데,
사과를 놓친 가지 끝처럼 문득 텅 비어버리는
여긴 또 어디?
한 잔의 소주를 마시고 내리는 눈 속을 걸어
가장 어이없는 겨울에 당도하고 싶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
방금 눈앞에서 사라진 고양이가 도착한 곳.
하지만 커다란 기운을 걸치고
나는 사각의 링으로 전진하는 거야.
날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넌 내가 바라보던 바다를 상상한 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어느 날 아침에는 날 잊어줘.
사람들을 떠올리면 에네르기만 떨어질 뿐.
떨어진 사과처럼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거기 서해 쪽으로 천천히, 새 한 마리 날아가데.
모호한 빛 속에서 느낌 없이 흔들릴 때
구름 따위는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들.
하지만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면 돌처럼 굳어
다시는 카운터 펀치를 날릴 수 없지.
안녕, 날 위해 울지 말아요.
고양이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잖아? 그러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구름의 것은 구름에게.
나는 지치지 않는
구름의 스파링 파트너.

 

 

 

(『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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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이장욱

 


서로 다른 사랑을 하고
서로 다른 가을을 보내고
서로 다른 아프리카를 생각했다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드디어 외로운 노후를 맞고
드디어 이유 없이 가난해지고
드디어 사소한 운명을 수긍했다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모여들었다
그가 결연히 뒤돌아서자
그녀는 우연히 같은 리듬으로 춤을
그리고 당신은 생각나지 않는 음악을 찾아 바다로


우리는 마침내 서로 다른 황혼이 되어
서로 다른 계절에 돌아왔다
무엇이든 생각하지 않으면 물이 돼버려
그는 영하(零下)의 자세로 정지하고
그녀는 간절히 기도를 시작하고
당신은 그저 뒤를 돌아보겠지만


성탄절에는 뜨거운 여름이 끝날 거야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모여들어
여전히 사랑을 했다
외롭고 달콤하고 또 긴 사랑을

 

 


(『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 2006)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