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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진
김명인
주문진, 중얼거리다보면 주문처럼
동해가 끌려나오는 곳,
새 양복 맞춰 입고 첫 주례하러 갔던 곳,
결혼이란 둘이 한곳을
일생 함께 바라보는 거라고 그때 말했던가
청상 된 고모, 할머니에게 등 떠밀려
야반도주하듯 개가해 살던 곳,
고모 댁 판잣집에서 보면 비탈 아래 굴러온 파도
발밑에서 허옇게 몸 뒤집던 곳,
고모부 당뇨로 다리 한 짝 잘리고서도 배 탓던 곳,
독한 고모, 할머니 장례에도 친정 나들이 길 끊어버린 곳,
쉰이 다 된 고종사촌이 베트남 처녀 데려와
신방 차렸던 곳, 그 여자 몇 달 못 가
동네 젊은 홀아비와 눈 맞아 가출해버린 곳,
원양에서 번 돈으로
성게 알 공장을 차렸던 작은형이 이태 만에
살던 집까지 몽땅 털어먹힌 곳,
널린 오징어 만국기처럼
펄럭거리던 곳,
올해나 작년도 누더기 되어 겨운데
더덕더덕 기운 주문들 혼자서 중얼거리다보면
푸른 파도 지척까지 떠밀고 오던 곳!
밀물 차올라도 어느새 썰물일 텐데
그 주문진들, 취한 성성(猩猩)이처럼 아직도 꽥꽥거릴까?
―시집『꽃차례』(문학과지성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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