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몸 바뀐 사람들
감태준
산자락에 매달린 바라크 몇 채는 트럭에 실려가고, 어디서 불볕에 닳은 매미들 울음소리가 간간이 흘러 왔다
다시 몸 한 채로 집이 된 사람들은 거기, 꿈을 이어 담을 치던 집 폐허에서 못을 줍고 있었다
그들은, 꾸부러진 못 하나에서도 집이 보인다
헐린 마음에 무수히 못을 박으며, 또 거기, 발통이 나간 세발자전거를 모는 아이들 옆에서, 아이들을 쳐다보고 한번 더 마음에 못을 질렀다
갈 사람은 그러나, 못 하나 지르지 않고도 가볍게 손을 털고, 더러는 일찌감치 풍문(風聞)을 따라 간다 했다 하지만, 어디엔가 생(生)이 뒤틀린 산길, 끊이었다 이어지는 말매미 울음 소리에도 문득문득 발이 묶이고,
생각이 다 닳은 사람들은, 거기 다만 재가 풀풀 날리는 얼굴로 빨래처럼 널려 있었다
(『몸 바뀐 사람들』. 일지사.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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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새
감태준
바람에 몇번 뒤집힌 새는
바람 밑에서 놀고
겨울이오고
겨울 뒤에서 더 큰 겨울이 오고 있었다
"한번……"
우리 사는 바닷사 둥지를 돌아보며
아버지가 말했다
"고향을 바꿔보자"
내가 아직 모르는 길 앞에서는
달려갈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때,
아버지는 바람에 묻혀
날로 조그맣게 멀어져가고, 멀어져가는 아버지를 따라
우리는 온몸에 날개를 달고
날개 끝에 무거운 이별을 달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환한 달빛 속
첫눈이 와서 하얗게 누워 있는 들판을 가로질러
내 마음 한가운데
아직 누구도 날아가지 않은 하늘을 가로질러
우리는 어느새
먹물 속을 날고 있었다.
"조심해야, 애야"
앞에 가던 아버지가 먼저 발을 헛딛었다
발 헛딛은 자리,
서울이었다
(『마음이 불어가는 쪽』. 현대문학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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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한테 가는 길
감태준
일곱 살 여덟 살, 나를 닮은 아이들이
역에 나가 우는 것은
내가 철길을 따라 너무 먼 도시로 온 탓이다
내가
도시를 더듬고 다니다가
저희들한테 가는 길을 잃어버린 탓이다
저희들한테 가는 길을 찾는다 해도
이젠 같이 놀아줄 수 없이 닳아빠진 얼굴을
나는 차마 내밀 수 없는 탓이다
안개 속에 묻히는 철길을 바라보며
또 어디 몇 군데
연탄재같이 부서지는 마음아
눈 오는 이 밤 따라
아이들이 더 서럽게 우는 것은
내가 저희들한테 돌아갈 기약마저도 없는 탓이다
(『월간 조선』. 조선일보사. 200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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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릴 때마다 한잔
감태준
포장술집에는 두 꾼이, 멀리 뒷산에는 단풍 쓴 나무들이 가을비에 흔들린다 흔들려, 흔들릴 때마다 한잔씩, 도무지 취하지 않는 막걸리에서 막걸리로, 소주에서 소주로 한 얼굴을 더 쓰고 다시 소주로, 꾼 옆에는 반쯤 죽은 주모가 살아 있는 참새를 굽고 있다 한 놈은 너고 한 놈은 나다, 접시 위에 차례로 놓이는 날개를 씹으며, 꾼 옆에 꾼이 판 없이 떠도는 마음에 또 한잔, 젖은 담배에 몇 번이나 성냥불을 댕긴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포장 사이로 나간 길은 빗속에 흐늘흐늘 이리저리 풀리고, 풀린 꾼들은 빈 술병에도 얽히며 술집 밖으로 사라진다 가뭇한 연기처럼, 사라져야 별수없이, 다만 다 같이 풀리는 기쁨, 멀리 뒷산에는 문득 나무들이 손 쳐들고 일어서서 단풍을 털고 있다
(『몸 바뀐 사람들』. 일지사. 1978)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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