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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대 - 마두금(馬頭琴)* 켜는 밤 / 단편들 /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 음악들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8. 8.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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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마두금(馬頭琴)* 켜는 밤


  박정대

 


  밤이 깊었다

  대초원의 촛불인 모닥불이 켜졌다


  몽골의 악사는 악기를 껴안고 말을 타듯 연주를 시작한다

  장대한 기골의 악사가 연주하는 섬세한 음률, 장대함과 섬세함 사이에서 울려나오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 모닥불 저 너머로 전생의 기억들이 바람처럼 달려가고, 연애는 말발굽처럼 아프게 온다


  내 生의 첫 휴가를 나는 몽골로 왔다 폭죽처럼 화안하게 별빛을 매달고 있는 하늘

  전생에서부터 나를 따라오던 시간이 지금 여기에 와서 멈추어 있다


  풀잎의 바다 바람이 불 때마다 풀결이 인다 풀잎들의 숨결이 음악처럼 번진다

  고요가 고요를 불러 또 다른 음악을 연주하는 이곳에서 나는 비로소 내 그토록 오래 꿈꾸었던 사랑에 복무할 수 있다


  대청산 자락 너머 시라무런 초원에 밤이 찾아왔다 한 무리의 대상(隊商)들처럼

  어둠은 검푸른 초원의 말뚝 위에 고요의 별빛을 매어두고는 끝없이 이어지던 대낮의 백양  나무 가로수와 구절초와 민들레의 시간을 밤의 마구간에 감춘다 은밀히 감추어지는 생(生)들


  나도 한 때는 무천(武川)을 꿈꾸지 않았던가 오랜 해방구인 우추안

  고단한 꿈의 게릴라들을 이끌고 이 地上을 넘어가서는 은밀히 쉬어가던 내 영혼의 비트 우추안


  몽골 초원에 밤이 찾아와 내 걸어가는 길들이란 길들 모조리 몽골리안 루트가 되는 시간

  꿈은 바람에 젖어 펄럭이고 펄럭이는 꿈의 갈피마다에 지상의 음유시인들은 그들의 고독한 노래를 악보로 적어 넣는다


  밤이 깊었다

  대초원의 촛불인 모닥불이 켜졌다
 

  밤은 깊을 대로 깊어, 몽골의 밤하늘엔 별이 한없이 빛나는데 그리운 것들은 모두 어둠에 묻혀버렸는데 모닥불 너머 음악 소리가 가져다주던 그 아득한 옛날

  아, 그 아득한 옛날에도 난 누군가를 사랑했던 걸까 그 어떤 음악을 연주했던 걸까


  그러나 지금은 두꺼운 밤의 가죽부대에 흠집 같은 별들이 돋는 시간

  지상(地上)의 서러운 풀밭 위를 오래도록 헤매던 상처들도 이제는 돌아와 눕는 밤


  파오의 천정 너머론 맑고 푸른 밤이 시냇물처럼 흘러와 걸리는데 아 갈증처럼 여전히 멀리서 빛나는 사랑이여, 이곳에 와서도 너를 향해 목마른 내 숨결은 밤새 고요히 마두금을 켠다


  몇 개의 전구 같은 추억을 별빛처럼 밝혀놓고 홀로 마두금을 켜는 밤

  밤새 내 마음이 말발굽처럼 달려가 아침이면 연애처럼 사라질 아득한 몽골리안 루트

 


  *마두금-악기의 끝을 말머리 모양으로 만든, 두 개의 현을 가진 몽골의 전통 현악기

 

 


(『아무르 기타』. 문학과지성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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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들

 
  박정대

 

 

  1 워터멜론 슈가에서


  물이 끊고 있다. 가습기 같은 내 영혼, 「아스펜 익스트림」이란 영화를 보고, 눈이 쌓인 설원을 생각했어야 되는데 진로 소주 한 병의 위력에도 휘청거리는 아스펜 아스피린 같은 혼몽한 겨울밤. 비명처럼 담배 한 대를 피워물고 옛날처럼 나는 늙었다. 워터멜론 슈가에서 오늘은 누가 또 미국의 송어낚시를, 피워무는지 몰라도 무섭도록 그리운 건 담배 한 개피 속에 떠오르는 춥디추웠던 그 골방의 기억뿐,


  겨울밤엔 담배가 필요해 洋 누군가 와줬으면 해. 워터멜론 슈가에서 나 기다려.


  난초 한 뿌리에 잎사귀는 열아홉 개. 거미는 다리가 여덟 개. 하늘에는 쌍둥이 구름이 흘러가고 디셈버는 십이월, 옥토버는 시월, 사월은 에이프릴. 앞치마 같은 여자들.


  난초를 마신다. 가습기 같은 내 영혼, 고장난 지붕 위로 비가 내려 난초를 한 컵 마시고 그는 취해서 운다. 난초잎 속의 여자들, 여자들 속의 난초잎. 쌍둥이 구름에 관한 기억들이 거리를 걸어간다. 푸르게 돋아나는 거리에서 그는 취해간다. 포켓볼 같은, 핀볼 같은 生, 베나레스에는 아직 벵갈 호랑이가 살아 있고 호랑이는 다리가 3개.

 

 

  2 페루여관에서


  그 거리를 지나 그들이 당도한 골목 끝에 섬처럼 여관이 하나 떠 있었다. 여관은 검객의 차양모 같은 지붕을 뒤집어쓰고 낡은 간판을 펄럭이고 있었는데 여관의 이름이 취생몽사였는지 동사서독이었는지 난초 잎사귀 속의 호랑이였는지 호텔 바그다드였는지 페루여관이었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암튼 그들은 지친 육체를 이끌고 그곳에 당도한 가엾은 한 쌍의 새였다. 동사가 티브이를 틀었고 서독은 침대 위에 무너져 오래도록 누워 있었다. 아주 오래도록 누워 있었는데 동사와 서독 사이로 바람이 불고 바람은 화병에 그려진 벵갈호랑이를 피워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티브이 화면에서도 심하게 바람이 불고 지익 직 소리를 내며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폭설 속에서 밤은 또 워테멜론처럼 푸르게 푸르게 익어 가고 있었을 것인데, 동사의 담배연기만이 벽에 걸린 액자 속 여인의 두툼한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었다. 벽에 걸린 여인은 동사의 담배연기가 간지러웠던지 맥주잔을 든채 몸을 비비꼬고 이었는데 그녀의 가랑이 사이로 태평양의 산호섬이 보이고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서독은 액자 속 야자수 너머의 어떤 한 점을 응시한 채 계속 말없이 누워 있었고 그런 그녀에게 담배를 물려주며 동사는 그가 지나온 거리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생각하고 있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 다리가 있었다. 담배를 피워문 채 동사는 다리를 지나 서독의 몸 속으로 들어갔다. 담배를 피워문 채, 담배가 다 타는 동안만 그들은 사랑을 나누었다. 가벼워졌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동사가 물었다. 네 몸이 나를 가볍게 해, 그렇게 대답하며 서독은 동사의 몸 한가운데를 물고 다시 어디론가로 날아올랐다.

 


  3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에서


  깊은 밤에 빅토를 최라는 천막을 하나 치고 알전구에 몸을 데우다 보면 태양이라는 게 뭐 별건가요. 그는 캄차트카의 화부(火夫)였다는데 화부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알게 되죠. 태양이라는 게 뭐 별건가요. 화부, 화부라는 직업 참 좋죠. 자고로 남자로 태어난 사람이라면 한번쯤 해볼 만한 일이요. 왜 거 있잖아요.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것도 알고 보면 모두 화부를 위한 작품이죠. 불 때는 남자, 그럴듯하지 않아요? 아궁이에 불 넣는 남자. 태양이라는 게 뭐 별건가요. 바닷속 물고기의 눈동자에도 태양은 있어요. 하지만 깊은 밤에 잠들지 못하고 빅토르 최의 노래를 듣는 사람은 태양을 등진 사람이에요. 스스로 태양을 피워 올리려는 사람이죠. 거리에서 태양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지만 그런 말은 믿을 게 못되죠. 태양을 보려고 사막에 간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곳에도 태양은 없었어요. 착각에 지나지 않아요. 그들이 태양이라고 믿는 것은 사실 태양이 아니에요. 태양은 그렇게 쉽사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요. 하지만 뭐 따지고 보면 태양이 뭐 별건가요. 태양다방도 있고 태양당구장도 있고 태양뷔페도 있는데 알고 보면 그런 게 다 태양이지요. 눈만 감으면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게 태양이에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도 다 태양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 태양다방의 아가씨도 태양이에요. 그녀의 명함 속에 분명히 씌어 있어요.                                                     

                            

                                

 

      태양 다방

 

      태현실(23세)

       415 - 7474

 

   

   * 언제라도 태양을

       불러주세요

 

   (24시간 배달 가능)

 

 

 

  4 거리에서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었어, 명동엘 갔었는데 사람들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어.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었어요, 명동엘 갔었는데 사람들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어요.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었지, 명동엘 갔었는데 사람들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지.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었네. 명동엘 갔었는데 사람들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네 (발성 연습을 좀 해봤어요).


  나는 티브이를 끄고 당신에게 편지를 써요
  더 이상 쓰레기를 볼 수 없다고
  더 이상 힘이 없다고
  나는 거의 알코올중독자가 되었다고
  그러나 당신은 잊지 않았다고
  전화가 와서 내가 일어나려 했다고
  옷을 입고 나갔다, 아니 뛰어나갔다고
  그리고 나는 아프다고 피곤하다고,
  그리고 이 밤을 자지 못했다고 말이에요


  나는 대답을 기다려요 더 이상 희망은 없어요
  곧 여름이 끝날 거예요 그래요


  날씨가 좋아요 사흘째나 비가 와요
  비록 라디오에서 그늘도 더운 날씨가
  되겠다고 예보하지만 하긴 내가 앉아 있는
  집 안 그늘은 마르고 따스해요
  아직이라는 것이 두려워요
  시간도 빨리 흘러요 하루는 밥 먹고
  삼 일은 술 마셔요
  창 밖에 비가 오지만 재미있게 살아요
  오디오가 고장나서 조용한 방에 앉아 있어도
  기분이 좋기만 해요


  나는 대답을 기다려요 더 이상 희망은 없어요
  곧 여름은 끝날 거예요 그래요


  창 밖에는 공사중이에요
  크레인이 일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 옆의 레스토랑이 5년째 휴업해요
  책상 위에서 병이 있고 병 안에는 튤립이 있어요
  창턱에는 컵이 있어요
  이렇게 해가 지고 인생이 흘러가요
  참으로 운이 좋지 않아요
  하지만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운좋은 날은 오겠지요


  나는 대답을 기다려요 더 이상 희망은 없어요
  곧 여름이 끝날 거예요 그래요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었네. 명동엘 갔었는데 사람들이 갓발처럼 나부끼고 있었네. 어는 죽은 가수의 노래가, 여름이라는 노래가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네. 너무 가까운 거리가 우리를 안심시켰지만 그것은 알 수 없는 불안이었네. 참으로 많은 비밀들이 휘청거리며 나부끼고 있었네. 가수의 노래가 천 개의 귀를 흔들고 있었네.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영혼이 천 개의 추억을 마구 흔들고 있었네. 마침표가 없는 걸음들이 끊임없이 쉼표처럼 뒤뚱거리며 걷고 있었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 거리에서 , 그 거리에서 염소처럼 나는 담배만 피워대고

 


  5 장미빛 모퉁이에서


  그날 너는 상점 앞 평상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구장을 지나 네거리의 좌측 편에 있는 상점을 내가 지나쳐갈 때, 네가 나를 불렀지. 우리는 좁은 언덕의 골목길들을 따라 어디론가 함께 올라가고 있었다. 저녁 시간이었는데, 아직 어둡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밝다고 말 할 수도 없는 그런 저녁 무렵이었다. 나의 방에는 모과주가 익어가고 있었고 우리는 그것을 향해 걸어 올라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너와 함께 걷고 있는 불안감이 무척이나 매혹적으로, 미지의 매혹을 간직한 하나의 달콤한 유혹의 느낌으로 나를 휘감아왔다. 나는 그 달콤한 미지의 불안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밤하늘을 향하여 하나의 달이 떠오를 무렵, 네 가슴에서는 두 개의 달이 떠오르고 있었을 것이다.

 


  6 취생몽사


  바람이 없으니 불꽃이 고요하네
  살아서는 못 가는 곳을 불꽃들이 가려 하고
  있네, 나도 자꾸만 따라가려 하고 있네
  꽃향기에 취한 밤, 꽃들의 음악이 비통하네
  그대와 나 함께 부르려 했던 노래들이 모두
  비통하네, 처음부터 음악은 없었던 것이었는데
  꿈속에서 노래로 나 그대를 만나려 했네
  어디에도 없는 그대, 어디에도 없는 生
  취해서 살아야 한다면 꿈속에서 죽으리

 

 


(『단편들』. 세계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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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박정대

 


   그냥 불멸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낡은 태양의 오후를 지나, 또 무수한 상점들을 지나 거기에 갔으므로 너무나 지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등 뒤로는 음악 같은 나뭇잎들이 뚝뚝 떨어지고, 서러운 풍경의 저녁이 짐승처럼 다가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성냥을 꺼내어 한 점의 불꽃을 피워 올렸다. 영원은 그렇게 본질적인 불꽃 속에 숨어 있다가 어느 한 순간 타오르기도 한다


  그날 불멸이 나를 찾아왔다. 아니 그날 내가 불멸을 찾아 나섰는지도 모른다, 뿌연 공기들을 헤치며 이 지상에는 없는 시간을 찾아 나는 나섰다


  내가 한 마리의 식물처럼 고요했던 시간, 내가 한 그루의 짐승처럼 그렇게 타올랐던 시간, 바람과 불의 시간을 지나 공기의 정원에서 내가 얼음꽃을 피워 올렸던 그 단단한 침묵의 시
간을 찾아 나는 나섰다


  그런데 그날 불멸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늘 불멸을 꿈꾸었지만, 그렇게 불멸을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으므로, 나는 오히려 불멸이 너무나 낯설었는데, 어쨌든 불멸은 내가 갔던 거기에, 그렇게 당도해 있었다


  네가 불멸이니, 그때 너무나 당황했으므로 나는 속으로 그렇게 물어보았는지도 모른다


  불멸이 이제 나에게 당도했으므로 나는 어찌할 줄을 모른다. 오랫동안 불멸을 꿈꾸어 왔지만 불멸이 나에게 당도했을 때, 어떻게 해야하는지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불멸 앞에서 이 세계의 본질적인 사랑을 생각한다


  불멸도, 사랑도, 내 생각으로는 그저 저 스스로 존재하는 그 무엇일 뿐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나에게 또 불멸의 아름다운 시를 쓰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쓰지 않는다. 불멸의 아름다움이란 느끼는 자의 내면 속에서 수시로 숨쉬고 존재하며, 자라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가 아니다
  시가 아니므로 불멸이 아니고 불멸이 아니므로, 이것은 불멸의 시가 된다


  그렇다, 당신이 이 글에서 시를 읽어내려고 했다면 당신은 이미 시인이다. 그러나 시 아닌 그 무엇을 읽어냈다면 이미 당신은 또 하나의 불멸인 것이다


  그대를 찾아 나섰다가 나는 불멸을 만났다. 그러나 나는 아직 불멸이 몹시도 불편하고 어색하다.


  불멸이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불멸이 아니었지만, 나도 언젠가는 내가 꿈꾸던 불멸에 닿을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저 별들에게로 돌아갈 것이므로, 나도 언젠가는 불멸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먼 훗날, 태양이 식어 가는 낡고 오래된 천막 같은 밤하늘의 모퉁이에서 서러운 별똥별로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나는 아직 살아있으므로, 나는 불멸이 아니라 오래도록 너의 음악이다.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사랑이 아니더라도 나를 꿈꾸어다오.

 

 


(『아무르 기타』. 문학과지성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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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들


   박정대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 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민음사. 2001)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