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능소화 시 모음 - 이창수/송기원/조정/나태주/이원규/이화영/양은숙/박제영...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8. 13. 23:55
728x90


능소화
 

이창수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담을 넘었다

그녀는 담 넘어 온 나를 보고

큰소리로 웃으며 쪽문을 가리켰다

담을 넘은 용기는 간 데 없고

그녀가 가리키는 쪽문으로 도망 나왔다

그럴 거면 왜 담을 넘었느냐며

친구들이 놀려댔다

그 이후 아무리 낮은 담이라도 쳐다보지 않았다

담을 넘어 골목으로 흘러나오는

맑은 웃음소리가

젖은 이마를 씻겨주는 저녁

아주 오래 전 내가 넘었던 담벼락에

핀 예쁜 꽃이 보였다

나를 만나고 싶다면 저 문으로 들어오라고

쪽문을 가리켰던 긴 손가락이

오랜 미련을 흔드는 저녁이었다

 

 


―계간『시와 산문』(2012년 가을호)

 

----------------------
능소화


송기원

 


마지막 한 방울 정액까지
붉게 게워내야겠다
폭염이 목까지 차올라
눈 먼 기다림도 녹아나는데,
하루해 기우는 서녘 어디쯤
뒷소문처럼 너 또한 붉어오는데.

 

 


―시집『단 한번 보지 못한 내 꽃들』(랜덤하우스중앙, 2006)

 

-----------------------
능소화


조정

 

 

귀가 녹아내린 양초를 떼어 흰 갑에 넣었다
뻣뻣하게
목을 뚫고 올라오는 한 마디를 삼켰다


해는 정오 전에
달아오는 쇠통을 내밀어 길 가는 이들을 내리누르고
중앙공업사 수돗가에 걸레가 느리게 썩어갔다


에어컨 실외기가 놓인 이층 베란다에 허리를 걸치고
여자는
주홍 셔츠에 내민 실밥만 툭 뜯어던졌다


어젯밤은 정전이었다
과묵한 줄기를 타고 잎사귀들이 숨을 죽였다
청동 파리가 눈 휑한 창을 두드리다가 죽었다
유리창마다 금이 간 채 여름을 지났다


 

 

―시집『이발소 그림처럼』(실천문학사, 2007)

 

--------------------
능소화


나태주

 


누가 봐주거나 말거나

커다란 입술 벌리고 피었다가, 뚝

 

떨어지는 어여쁜

슬픔의 입술을 본다

 

그것도

비 오는 이른 아침

 

마디마디 또 일어서는

어리디 어린 슬픔의 누이들을 본다

 

 

 

―게간『시와시학』(2004년 여름호)

 

--------------------
능소화


이원규

 


꽃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화무 십일홍
비웃으며
두루 안녕하신 세상이여
내내 핏발이 선
나의 눈총을 받으시라


오래 바라보다
손으로 만지다가
꽃가루를 묻히는 순간
두 눈이 멀어버리는
사랑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기다리지 않아도
기어코 올 것은 오는구나


주황색 비상등을 켜고
송이송이 사이렌을 울리며
하늘마저 능멸하는
슬픔이라면
저 능소화만큼은 돼야지

 

 


―시집『옛 애인의 집』(솔, 2003)

 

--------------------
능소화


이화영
 


둑방길 지나는데 시멘트 담벼락 움켜쥐고 능소화가 피었다

우주 한 귀퉁이를 휘어 감고 오르는 본능적인 꽃

여름 내 폭염마저 흔들어 놓고 갈 저 주황빛 웃음이 치명적이다

더 이상 기다림은 거부하듯 입술 언저리 말아 올리며 목젖까지 보이는 헤픈 년 
 

그때도 7월이었지

그 애랑 들렀던 강촌 민박 덜렁거리는 간판아래

손바닥만 한 화단 오만하게 뒤틀려 등나무를 타고 오르던


꽃이 너무 환해 손으로 가리키자

그 애 입에서 꽃 이름이 입술과 같이 튀어나왔다

능.소.화

생장이 빠른 것에 비해 줄기가 약해 해마다

할아버지가 뒤뜰에서 대나무를 베어와 버팀목을 만들어 주었다는

설명도 같이 피어올랐지

 
등을 켠 꽃잎마다 이별을 베어 물고 고른 숨 내 쉬지만

움켜쥔 손톱 멍 자국이 가실 때쯤이면 

다시 피 멍이 든다

 
그리움만큼이나 길어진 모가지

한차례 웃비* 지나자 선혈 쏟듯 뚝뚝 낭자하게 진 모습에

한동안 그 애를 움켜쥐고 있던 내 손아귀가 맥없이 풀린다

내 손이 허공에 들린 듯하다

꽃물 든 이 병病,

남은 여름이 위험하다

 


* 웃비 : 한창 쏟아지다 잠시 그친

 

 

 

―시집『침향』(혜화당. 2009)

 

---------------------
능소화


양은숙

 

 

어쩌다 죽은 나무를 사랑하게 되었나

얼굴을 비튼 능소화

 

석탄빛 검은 고목을

친친 감싸고도 못 견딘 빨간 한낮

능소화가 피었네

 

말없이 또 다른 하늘을 버텨내는

잔가지 없는 고목의

선연한 그림자

 

못내 서러운 능소화

붉은 그리움은 떠날 줄 모르고

 

여름 깊숙이

흐르지 않는 바람의 언저리

그 둘이, 서로를 온전히 바라볼 수 없기에

하나의 혼에서 태어난 흔들리는 마음

두 몸에 갇히고

고개를 비틀 때마다 함께

가슴이 저려와

 

차마 견디지 못할 아름다움 남기고

뚝, 뚝, 떨어지는 선홍빛 모가지

비로소 서로를 마주보네

 

떨어져 누운 다음에야 시드는 꽃,

뿌옇게 짓무르네


 

 

―시집『달은 매일 다른 길을 걷는다』(시평. 2010)

 

-----------------------

능소화

 

박제영

 


요선동 속초식당 가는 골목길 고택 담장 위로 핀 꽃들, 능소화란다 절세의 미인 소화가 돌아오지 않는 왕을 기다리다가 그예 꽃이 되었단다 천년을 기다리는 것이니 그 속에 독을 품었으니 함부로 건드리지 말란다 혹여 몰라볼까 꽃핀 그대로 떨어지는 것이니 참으로 독한 꽃이란다 담장 아래 꽃 미라들, 천년 전 장안에 은밀히 돌았던 어떤 염문이려니, 꽃핀 채로 투신하는 저 붉은 몸들, 사랑이란 무릇 저리도 치명적인 것이다

 

내 사랑은 아직 이르지 못했다 順伊도 錦紅이도 순하고 명랑한 남자 만나서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다 아내는 내 먼저 가도 따라 죽진 않을 거란다 끝까지 잘 살 거란다 다행이다 이르지 못한 사랑이라서 참 다행이다

 

 


―계간 『시와경계』(2009, 봄 창간호)

 

---------------------

능소화


김주대



골목에 귀를 걸어놓았다.

귓바퀴에 당신 발소리 얹힐 때

그 무게로만 떨어지려고

 


시집 시인의 붓(한겨레출판사, 2018)


--------------

능소화 지다

김창제



칠월 염천,
앞 다투어 피어오르던
쇠불알 같은 꽃이
모가지 뚝뚝 꺾으며 뛰어 내린다

눈 비비지 않으려 용쓰는 나뭇가지나
뛰어내리는 꽃이나

딱히 피어도 핀 게 아니고
지고도 다 진 게 아닌

꼭 잡았던 손과 손
슬며시 풀리는 저 경계가 환하다

흘레 끝난 개다

그늘이 양지보다 뜨거운
사랑 몇
숭어리 채 진다



시집『경계가 환하다』(학이사, 2016)


---------------------

능소화가 담장을 넘을 때

 

김명옥  

 

 

엿보던 이웃들

목을 길게 빼고

큭큭거리는데

 

어디로 달아나려는 걸까

표정 없는 담장 더듬다가

후끈 달아오른 얼굴로

 

앞 못 보는 벌들

발 동동 구르고

 

담장 밑에는

수군수군

낮술에 불콰한 얼굴들

  



―계간『불교문예』(2018년 여름호)


-------------------
 

능소화

 

이명숙

 

 

골목 안 벙글어진

자황색 현弦의 울림

돌담 위 이글이글 타는 불꽃 한 자락

관능에 후드득 지는 꽃잎들 꿈꾸는 것은

 

한 번의 붉은 일탈

월담의 이유겠다

아프게 알몸 가득 새겨진 주홍글씨

뜨거운 몸 안의 눈물 아파도 탐하는 것은

 

하루만 살겠다는

욕화를 못 말린 죄

스스로 살해되는 생애가 흐느낀다

속불꽃 흐드러지고 무르녹는 살 냄새

 

 


-시집『썩을,』(고요아침, 2017)


----------------------------

능소화

박기섭


그리움 아니라면 그럴 리 없잖은가

한여름 뙤약볕에 혓바늘이 돋은 채로 수직의 전봇대 허리를 휘감을 리 없잖은가

이미 낙하마저 불가능한 높이에서 순간의 고압전류에 온몸을 대지르며 단 한 번 우레 속으로 뛰어내릴 리 없잖은가




ㅡ웹진『공정한 시인의 사회』(2018, 1월호)



------------------------------------------

  능소화


  양해열



  몇 십 년 뱀사골 당집을 비운 건 당골네가 아니라 사람들의 눈이었다


  쌍칼 부러지자 오지굴뚝 주저앉고 눈까지 멀어버린 너와집, 까치발로 칼날을 타던 여인이 이 밤 흙 속의 불씨를 빼낸 천개의 손바닥에 불을 켜든다

 

   여섯 자 두 자 흙더미를 파내고 여름을 평장한 눈 무덤을 만든다 죽어서도 감지 못한 둥근 눈망울에 핏기를 돌게 할 긴 한숨을 마당에 심는다

 

  죽은 당골네가 영등影燈을 밝혔다는 소문에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리 담장 안을 기웃거려도 한 종지 붉은 울음소리 뿐,

 

  슬쩍 비껴가거나 중심을 꿰뚫고 지나간 수많은 사연 중에 가슴에 묻은 산 사내 하나만이 온전한 빛이었음을,

 

  절벽을 감고 오르며 세상을 향해 퉁퉁 불어터진 마음을 던지던 여인이 입술을 떨고 있다

 

  제가 벤 줄도 모르고 쌓여가는 꽃송이를 닭 모가지 떼로 읽던 능선 눈썹달, 둥글고 훤한 얼굴에도 핏물 배었다

  



계간『POSITION』(2016년 봄호)


-----------------------------------

등에 핀 능소화


정용화



종이에서 뜯어낸 꽃 속에서

여름이 흘러 나온다

20개의 태양을 등에 지고

지붕 위에 앉아있는 여자들

 

나무들은 초록커텐을 드리우고

제대로 피지 못한 꽃의 시간을 미리 꺼내

이파리마다 비밀 하나씩 묻히고

돌아서는 바람의 처세술

 

한사코 거부하는데도

기어코 찾아오는 것들이 있다

 

불시착한 꽃마다

이미 고백을 머금은 입술이어서

영문도 모른 채 살짝 손을 얹었는데

와락 안겨오는 외로운 몸들이여

 

필사적으로 달아오르고 무르익기도 전에

이미 소진된 사랑이여


고여있던 설움이 몸안에서 전구를 켠 듯

환해질 때 여름은 완성된다

찢겨진 일력처럼 주홍빛 낱장으로

뭉턱뭉턱 떨어져내린 여름

 

한차례 지나가는 소나기에

고 작고 붉은 종들이

힘닿는 데까지 맑은 소리를 내어준다

 



계간『시담』(2016년 여름호)


-----------------------------

마이사 능소화


김도연



고 먼 별에서 편지가 왔다

꽃에게 다가가려 노력하면 할수록 첫 발자국부터 발걸음 무거워진다

바람은 햇살의 연인 햇살은 능소화 꽃술에 보이지 않는 과녁, 꽃의 심장에

화살을 겨눈다

오래오래 오랜 생각 끝에 간절히 다가서며

무장을 푼 짙은 향기, 능소화는 어느새 입맞춤하려고

눈을 감는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늘 언저리 멀리 두고 온 애절한 사연 속으로 별이 지고

별이 진 허공에 몸을 매달아놓은 능소화 입술 붉은 꽃

상처 입은 꽃은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고

붉은 뺨에 키스를 퍼붓는 햇살 속으로

손을 흔든다

그러다가 예고도 없이 툭 떨어지는

붉은 꽃 모가지 기다림의 온도가 꽃 속에 식어가고

 

낯선 별에서 편지가 날아온다



웹진『시인광장』(2016년 5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