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침묵 피정 1
신달자
영하 20도
오대산 입구에서 월정사까지는
소리가 없다
바람은 아예 성대를 잘랐다
계곡 옆 억새들 꼿꼿이 선 채
단호히 얼어 무겁다
들수록 좁아지는 길도
더 단단히 고체가 되어
입 다물다
천 년 넘은 수도원 같다
나는 오대산 국립공원 팻말 앞에
말과 소리를 벗어놓고 걸었다
한 걸음에 벗고
두 걸음에 다시 벗을 때
드디어 자신보다 큰 결의 하나
시선 주는 쪽으로 스며 섞인다
무슨 저리도 지독한 맹세를 하는지
산도 물도 계곡도 절간도
꽝꽝 열 손가락 깍지를 끼고 있다
나도 이젠 저런 섬뜩한 고립에
손 얹을 때가 되었다
날 저물고 오대산의 고요가
섬광처럼 번뜩이며 깊어지고
깊을수록 스르르 안이 넓다
경배 드리고 싶다.
(『오래 말하는 사이』. 민음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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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집
신달자
내 몸속에 아직 절개되지 않은
숨은 우주 하나
생명이 자라지 못하는
폐가로 문 닫은지 오래
은총의 껍데기로 말문 닫은지도 오래
너무 고요해 내 몸속에 있는지
배꼽 주변을 손으로 더듬어 본다
숨길 들리지 않는
무인도의 둥지로 밀려나
아무도 찾지 않는 인적 없는 집
내 배는 너무 낮고 기억력도 희미하다
그러나
자궁은 이제 궁궐은 아니지만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그 자리에
늠름히 있어
옛 추억이나 더듬는 과거는 아니다
먼지 같은 남자의 시한부 씨앗 하나를
생명으로 키운 나는 창조주
지금 어둠 속에 고요히 어둠으로 접혀 있지만
그 명예는 아름답다
너무 오래 불러주지 않아
대답을 잃어버린
몸 중에 가장 눈부신
오오 눈부신……
(『오래 말하는 사이』. 민음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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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
신달자
인사동 상가에서 싼값에 들었던
백자 등잔 하나
근 십 년 넘게 내 집 귀퉁이에
허옇게 잊혀져 있었다
어느 날 눈 마주쳐 고요히 들여다보니
아직은 살이 뽀얗게 도톰한 몸이
꺼멓게 죽은 심지를 물고 있는 것이
왠지 미안하고 안쓰러워
다시 보고 다시 보다가
기름 한 줌 흘리고 불을 켜보니
처음엔 당혹한 듯 눈을 가리다가
이내
발끝까지 저린 황홀한 불빛
아 불을 당기면
불이 켜지는
아직은 여자인 그 몸.
(『아버지의 빛』. 문학세계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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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춘(早春)
신달자
맑은 하늘에서
푸른 면도칼이 떨어져
나의 어디를 스쳤을까
혀끝을 내어미는 꽃나무처럼
나의 몸에 피가 맺히고 있다
몰매를 맞아 허약해진 귀여
그치지 않는 초인종 소리에
방향도 찾지 못해
문이라는 문은 모두 열고 있는
봄날 오후에
(『봉헌문자』. 현대문학사. 1973)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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