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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 어머니 / 달팽이 / 사랑 / 춤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8. 19.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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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어머니


박형준

 

 

낮에 나온 반달, 나를 업고
피투성이 자갈길을 건너온
뭉툭하고 둥근 발톱이
혼자 사는 변두리 창가에 걸려 있다
하얗게 시간이 째깍째깍 흘러나가버린,


낮에 잘못 나온 반달이여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문학과지성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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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박형준

 

 

달팽이 한 마리가 집을 뒤집어쓰고 잎 뒤에서 나왔다
자기에 대한 연민을 어쩌지 못해
그걸 집으로 만든 사나이
물집 잡힌 구름의 발바닥이 기억하는 숲과 길들
어스름이 남아 있는 동안 물방울로 맺혀가는
잎 하나의 길을 결코 서두르는 법 없이
두 개의 뿔로 물으며 끊임없이 나아간다
물을 먹을 때마다 느릿느릿 흐르는 지상의 시간을
등허리에 휘휘 돌아가는 무늬의 딱딱한 껍질로 새기며,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연기에 섞여
저녁 공기가 빠르게 세상을 사라져갈 때
저무는 해에 낮아지는 지붕들이 소용돌이치며
완전히 하늘로 깊이 들어갈 때까지,


나는 거기에 내 모습을 떨어뜨리고 묵묵히 푸르스름한,
비애의 꼬리가 얼굴을 탁탁 치며 어두워지는 걸 바라본다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문학과지성사. 1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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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박형준

 

 

오리떼가 헤엄치고 있다
그녀의 맨발을 어루만져주고 싶다.
홍조가 되는 그녀의 맨발,
실뱀이 호수를 건너듯 간질여주고 싶다.
날개를 접고 호수 위에 떠 있는 오리떼.
맷돌보다 무겁게 가라앉은 저녁해.


우리는 풀밭에 앉아 있다.
산너머로 뒤늦게 날아온 한떼의 오리들이
붉게 물든 날개를 호수에 처박았다.
들풀보다 낮게 흔들리는 그녀의 맨발.
두 다리를 맞부딪치며
새처럼 날아갈 것 같기만 한.


해가 지는 속도보다 빨리
어둠이 깔리는 풀밭.
벗은 맨발을 하늘에 띄우고 흔들리는 흰 풀꽃들.
나는 가만히 어둠속에서 날개를 퍼득여
오리처럼 한번 힘차게 날아보고 싶다


뒤뚱거리며 쫓아가는 못난 오리.
오래 전에
나는 그녀의 눈 속에
힘겹게 떠 있었으나.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있다』.창작과비평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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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첫 비행이 죽음이 될 수 있으나,어린 송골매는 절벽의 꽃을
                         따는 것으로 비행 연습을 한다.

 

 


근육은 날자마자
고독으로 오므라든다

 

날개 밑에 부풀어오르는 하늘과
전율 사이
꽃이 거기 있어서

 

절해고도(絶海孤島),
내려꽂혔다
솟구친다
근육이 오므라졌다
펴지는 이 쾌감

 

살을 상상하는 동안
발톱이 점점 바람 무늬로 뒤덮인다
발 아래 움켜쥔 고독이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서


상공에 날개를 활짝 펴고
외침이 절해를 찢어놓으며
서녘 하늘에 날라다 퍼낸 꽃물이 몇 동이일까

 

천길 절벽 아래
꽃파도가 인다

 

 


(『춤』.창비. 2005)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