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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 - 서영처/류시화/황진성/박용학/박원식/김상미/안도현....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8. 22.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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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비꽃

 

  서영처

                
 

  양지바른 곳에 모여 앉아 지지배들처럼 지지배배 조잘대는 한무리 꽃, 아직 바람이 차다 봄이 멀었다고 생각할 무렵 제비꽃은 핀다

 

  논두렁이나 밭두렁 무덤 위에도 소풍나온 지지배들처럼 제비꽃은 소복이 피어난다
 

 
  언덕과 여러 산 능선들 봄을 향해 구렁을 붙여가며 낮은 포복으로 기어가고

 

  수학여행 온 여고생들을 쏟아놓은 유적지, 단체사진 속 박혀있는 새침한 얼굴들처럼

 

  이따금 내가 올라가는 무덤가, 눈시울 빛만이 그들의 유일한 세상인 듯 제비꽃은 그렇게 피었다 진다

 

  교문을 횡대로 쏟아져나와 분식점으로, 문구점으로, 학원으로 뿔뿔히 흩어지던 지지배배 지지배들

 

 


―웹진『시인광장』(2010년 봄호)
[출처] 서영처의 시와 음악 [4]봄이 멀었다고 할 무렵 제비꽃은 핀다

 -스카를라티, <제비꽃> Le Violette 노래: Ensemble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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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

 

류시화

 


수레를 타고 가는 신부

옷자락을 잡아당겼지

풀어지는 사랑

온 곳으로 돌아가는 길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에게로 가서

신부가 되리

 

 

 

-시집『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푸른숲.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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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

 

황진성

 


아얏, 제비꽃을 밟았다

유리를 밟았다


무덤가 앉은뱅이

바람에 절하고 구름보고 눕는다

아침 이슬에 파리한 입술 적시고

햇살에 밀려 정처없이 떠돈다

 

재개발 주택 부서진 벽돌에 끼여

그늘진 틈을 비집고

마른 꽃 피운다


어질머리 바람 뿌리채 뽑혀 허공에 날리다

공중유리창 '취급주의'붉은 글씨로 갇힌다

불량품으로 잊혀진다


구름이 건네줄 한 방울 물에 목 말라

유리창 기대어 공허한 웃음만 날리다

시들어가는 파리한 꽃잎 한장

다시 한 번 마른 다리 꼿꼿이 서 본다

 
아얏,제비꽃을 밟았다

유리를 밟았다

 

 

 

―계간『문예연구』(201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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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


박용학

 

 

낮은 곳에

피었다

 

발목 근처에

피었다

 

눈여겨보는 곳에

피었다

 

 

 

(2009년 『한국일보』신춘문예 최종심에 오른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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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 제비꽃
 

반칠환

 

 

노랑제비꽃 하나가 피기 위해

숲이 통째로 필요하다

우주가 통째로 필요하다

지구는 통째로 제비꽃 화분이다

 

 

 

―시집『웃음의 힘』(시와시학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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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 꽃잎 속


김명리 
 


퇴락한 절집의 돌계단에 오래 웅크리고
돌의 틈서리를 비집고 올라온
보랏빛 제비꽃 꽃잎 속을 헤아려본다


어떤 슬픔도 삶의 산막 같은 몸뚱어리를
쉽사리 부서뜨리지는 못 했으니


제비꽃 꽃잎 속처럼 나 벌거벗은 채
천둥치는 빗속을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내 몸을 휩싸는 폭죽 같은 봄의 무게여


내가 부둥켜안고 뒹구는 이것들이
혹여라도 구름 그림자라고는 말하지 말아라

 

네가 울 때, 너는 네 안의 수분을 다하여 울었으니


숨 타는 꽃잎 속 흐드러진 암향이여
우리 이대로 반공중半空中에 더 납작 엎드리자


휘몰아치는 봄의 무게에
대적광전 기우뚱한 추녀 또한 뱃고동 소리로 운다

 

 

 

―월간『문학사상』(2005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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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이 보고 싶다


나호열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들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보았다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떠들었다

듣지 않는 귀

보지 않는 눈

말하지 않는 혀

그래도 봄바람은 분다

그래도 제비꽃은 돋아 오른다

뜯어내도 송두리째

뿌리까지 들어내도

가슴에는 제비꽃이 한창이다

  

 
 

―시집『당신에게 말 걸기』(예총출판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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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 머리핀

 

공광규

  

 

머리가 헌 산소에 제비꽃 한 송이 피었는데

누군가 꽂아준 머리꽃핀이어요

 

죽어서도 머리에 꽃핀을 꽂고 있다니

살았을 적에 어지간이나 머리핀을 좋아했나 봐요

 

제비꽃 머리핀이 어울릴만한

이생의 사람 하나를 생각하고 있는데

 

진달래가 신갈나무 잎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산벚나무도 환하게 꽃등을 켜고 있어요

 

  

 
―계간『시와환상』(201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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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묘지에 제비꽃이


김영섭

 


어머니는 코바늘 같은 모습으로 나와 계셨다
햇살이 이렇게 좋아도 색이 바랠까봐 그늘에 계신다며 밀랍 웃음
지으신다 아휴! 아무리 몸을 뾰족하게 갈아도 바깥나들이가 쉽지
가 않다며 차라리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렸으면 좋겠다 하신다
돌아서는 내 등에 실밥을 따주시며
얘야! 꽃은 절대 깊이 매장하는 법이 아니다 하셨다.

 

 


―계간『시인 사상』(2003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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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 편지


안도현

 


제비꽃이 하도 예쁘게 피었기에

화분에 담아 한번 키워보려고 했지요

뿌리가 아프지 않게 조심조심 삽으로 떠다가

물도 듬뿍 주고 창틀에 놓았지요

그 가는 허리로 버티기 힘들었을까요

세상이 무거워서요

한시간이 못 되어 시드는 것이었지요

나는 금새 실망하고 말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그럴 것도 없었어요

시들 때는 시들줄 알아야 꽃인 거지요

그래서

좋다

시들어라, 하고 그대로 두었지요

 

 


―시집『그리운 여우』(창작과비평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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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에 대하여


안도현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오고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간다

 

제비꽃에 대해 알기 위해서

따로 책을 뒤적여 공부할 필요는 없지

 

연인과 들길을 걸을 때 잊지 않는다면

발견할 수 있을 거야

 

그래,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거야 자줏빛이지

 

자줏빛을 톡 한번 건드려봐

흔들리지? 그건 관심이 있다는 뜻이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봄은,

제비꽃을 모르는 사람을 기억하지 않지만

 

제비꽃을 아는 사람 앞으로는

그냥 가는 법이 없단다

 

그 사람 앞에는

제비꽃 한포기를 피워두고 가거든

 

참 이상하지?

해마다 잊지 않고 피워두고 가거든

 

 

―시집『그리운 여우』(창작과비평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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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을 보내며


정호승

 


언제나 착한 사람들이 먼저 죽는다
혼자 있을 때마다 당신과 함께 있었으나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죽는다
부석사 안양루 돌계단 옆에 핀
접시꽃 곁에도 당신은 보이지 않고
태백선 추전역 앞마당에 핀
코스모스 곁에도 당신은 보이지 않고
어둠의 눈물이 소금처럼 내린다
이제 당신도 웃을 때가 있기를 바란다
고요한 미소로써 우리를 바라보기 바란다
당신에게도 봄은 오는 대로 오고
꽃은 피는 대로 피고
눈은 내리는 대로 내리길 바란다

 

 

 

―계간『열린시학』(200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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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 여인숙


이정록

 


요구르트 빈 병에 작은 풀꽃을 심으려고
밭두둑에 나가 제비꽃 옆에 앉았다
나잇살 먹었는지 꽃대도 제법이고 뿌리도 여러 가닥이다
이런데, 아니 뿌리 사이에 굼벵이 한 마리 모로 누워 있다
아기부처님처럼 주무시고 있다


한 송이는 하늘 쪽으로
한 송이는 포대기 속 잠결 아래로
그리고 또 한 송이는 곁에 있는 감나무 가지를 향하고 있다
저 감나무에 올라 울음보를 터트릴 거라고 입술을 떠는 꽃잎들
어떻게 본래의 이부자리대로 제비꽃을 심어놓을 것인가
요구르트 병 허리를 매만지다가, 안에 고여 있는 젖 몇 방울을 본다.
몸통만 남아 있는 불상처럼, 지가 뭐라고 젖이 돌았는가


울음보만 바라보며 몇 년을 기다려온 굼벵이
그 아름다운 허리를 오래 내려다본다
할 말 아끼다가 멍이 든 제비꽃에게도 합장을 한다
문득 내 손가락의 실반지 그 해묵은 뿌리에 땀이 찬다
제비꽃 아래의 고운 숨결에 동침하고 싶어
내 마음 감나무 새순처럼 윤이 난다


흙 속에 살되 흙 한 톨 묻히지 않고, 잘 주무시고 계신다
이미 흙을 지나버린 차돌 하나,
살짝 비껴간 뿌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먼 훗날의 제 울음주머니만 굽어보고 있다
사랑은 언제나 여러해살이라고, 그리하여
차돌 같은 사리로 마음 빛나는 것이라고

 

 


―시집『제비꽃 여인숙』(민음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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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앉은뱅이꽃


  이재훈

 

 

  일부러 가부좌를 틀 필요는 없다 당신은 감각의 수행자, 당신의 세상은 불구의 시간이 시작되는 때, 눈을 감아도 또렷이 기억나는게 있다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반했던 제비꽃 향기처럼 당신, 들릴 듯 말 듯한 냄새 당신의 냄새를 들었다 노란색 코트가 아니라 감미로운 목소리가 아니라 당신의 발자국처럼 저 멀리서부터 두근거리는 냄새 눈을 감아도 또렷이 기억나는 게 있다 그러나 당신의 향기는 잠시 머물렀다 사라졌다 부재(不在)는 그리움의 양식 바이올렛 향기로 내 몸이 건반처럼 울렸지 잠시 뿐이었지만, 덤불 속에서 상채기를 핥다가 취한 당신의 냄새 적어도 당신의 몸에서 육식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다른 꽃으로 환생한다해도 이미 알았던 것 우주에서는 아무도 당신의 비명을 들을 수 없음을*

 

  

*우주에서는 아무도 당신의 비명을 들을 수 없다 :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에이리언(Alien)>
 

 

 

―계간『서정시학』(2006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