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정원
장석남
나는 오래된 정원을 하나 가지고 있지
삶을 상처라고 가르치는 정원은
밤낮없이 빛으로 낭자했어
더 이상은 아물지도 않았지
시간을 발밑에 묻고 있는 꽃나무와
아마 환하고 그림자 긴 바위돌의 인사를 보며
나는 그곳으로 들어서곤 했지 무성한
빗방울 지나갈 땐 커다란 손바닥이 정원의
어느 곳에서부턴가 자라나와 정원 위에
펼치던 것 나는 내
가슴에 숨어서 보곤 했지 왜 그랬을까
새들이 날아가면 공중엔 길이 났어
새보다 내겐 공중의 길이 선명했어
어디에 닿을지
별은 받침대도 없이 뜨곤 했지
내가 저 별을 보기까지
수없이 지나가는 시간을 나는
떡갈나무의 번역으로도 읽고
강아지풀의 번역으로도 읽었지
물방울이 맺힌 걸 보면
물방울 속에서 많은 얼굴들이 보였어
빛들은 물방울을 안고 흩어지곤 했지 그러면
몸이 아프고 아픔은 침묵이 그립고
내 오래된 정원은 침묵에 싸여
고스란히 다른 세상으로 갔지
그곳이 어디인지는 삶이 상처라고
길을 나서는 모든 아픔과 아픔의 추억과
저 녹슨 풍향계만이 알 뿐이지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문학과지성사. 1995)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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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래된 정원
장석남
꽃밭에 꽃 피어나는 소리가 들리는 걸
귀를 가지런히 모으고 또 두 눈도 한참씩 감아가며
듣고 있노라니
꽃이여,
꽃이여, 하고 부르게도 되는군요
꽃이여, 피어오는 꽃이여,
꽃은 꽃밭에만 있는 것이 몸 섧었던가
그 빛깔과 향기와 웃음을
내 귀에까지 또 더 먼
먼 나라까지도 보내었군요
하여 하늘은 고등어처럼 짓푸르고요
그 곁에서
고스란히 듣고 보고 앉은
저 바윗돌의 굳고 정한 표정도
겸허히 바라보게 되는군요
꽃들이, 또 저 바위가
우리의 이름을 한 번씩, 천천히, 또박또박 부를 듯도 하여
조금 더 단정한 자세를 하지 않을 수 없군요
그것을 해마다 새롭게 새롭게 하였으리니
꽃 피는 꽃나무들 밑뿌리 뻗어가는 소리까지
우리 귀와 눈은 따라가서
꽃이여,
꽃이여, 부르면서 그 위에
처음 솟는 웃음을
몇 바가지씩 맘껏 쏟아부어줄
기도를 갖지 않을 수 없군요
―시집『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문학동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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