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정현종 - 사물의 꿈1 ―나무의 꿈 / 천둥을 기리는 노래 / 이슬 / 세상의 나무들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8. 26. 18:20
728x90

(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사물의 꿈1
―나무의 꿈


정현종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 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 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생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사물의 꿈』. 민음사. 1972;『정현종 시전집 1』. 문학과지성사. 1999)

-----------------------------

천둥을 기리는 노래
             

정현종

 

 

여름날의 저
천지 밑 빠지게 우르릉대는 천둥이 없었다면
어떻게 사람이 그 마음과 몸을
씻었겠느냐,
씻어
참 서늘하게는 씻어
문득 가볍기는 허공과 같고
움직임은 바람과 같아
왼통 새벽빛으로 물들었겠느냐


천둥이여
네 소리의 탯줄은
우리를 모두 신생아로 싱글거리게 한다
땅 위에 어떤 것도 일찍이
네 소리의 맑은 피와
네 소리의 드높은 음식을
우리한테 준 적이 없다
무슨 이념, 무슨 책도
무슨 승리, 무슨 도취
무슨 미주알고주알도
우주의 내장을 훑어내리는 네
소리의 근육이 점지하는
세상의 탄생을 막을 수 없고
네가 다니는 길의 눈부신
길 없음을 시비하지 못한다.


    천둥이여, 가령
    내 머리와 갈비뼈 속에서 우르릉거리다
    말다 하는 내 천둥은
    시작과 끝에 두려움이 없는 너와 같이
    천하를 두루 흐르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 무덤 파는 되풀이를 끊고
    이 냄새 나는 조직을 벗고
    엉거주춤과 뜨뜻미지근
    마음 없는 움직임에 일격을 가해
    가령 어저께 나한테 "선생님
    요새 어떻게 지내세요" 라고
    떠도는 꽃씨 비탈에 터잡을까
    망설이는 목소리로 딴죽을 건
    그 여학생 아이의
    파르스름 과분(果紛) 서린 포도알 같은 눈동자의
    참 그런 열심이 마름하는 치수로 출렁거리고도 싶거니


하여간 항상 위험한 진실이여
죽음과 겨루는 그 나체여, 그러니만큼
몸살 속에서 그러나 시와 더불어
내 연금술은 화끈거리리니
불순한 비빔밥 내 노래와 인생의
주조(主調)로 흘러다오 천둥이여
가난한 번뇌 입이 찢어지게
우르릉거리는 열반이여


네 소리는 이미 그 속에
메아리도 돌아다니고 있느니
이 신생아를 보아라 천둥 벌거숭이
네 소리의 맑은 피와
네 소리의 드높은 음식을 먹으며
네가 다니는 길의 눈부신
길 없음에 놀아난다, 우르릉……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정현종 시전집 1』. 문학과지성사. 1999)

------------------------

이슬


정현종

 


강물을 보세요 우리들의 피를

바람을 보세요 우리의 숨결을

흙을 보세요 우리들의 살을.

 
구름을 보세요 우리의 철학을

나무를 보세요 우리들의 시를

새들을 보세요 우리들의 꿈을.

 

아, 곤충들을 보세요 우리의 외로움을

지평선을 보세요 우리의 그리움을

꽃들의 삼미(三昧)를 우리의 기쁨을.

 

어디로 가시나요 누구의 몸 속으로

가슴도 두근두근 누구의 숨 속으로

열리네 저 길, 저 길의 무한―

 

나무는 구름을 낳고 구름은

강물을 낳고 강물은 새들을 낳고

새들은 바람을 낳고 바람은

나무를 낳고……

열리네 서늘하고 푸른 그 길

취하네 어지럽네 그 길의 휘몰이

그 숨길 그 물길 한 줄기 혈관……


그 길 크나큰 거미줄

거기 열매 열은 한 방울 이슬 -

(진공(眞空)이 묘유(妙有)로 가네)

태양을 삼킨 이슬 만유(萬有)의

바람이 굴려 만든 이슬 만유의

번개를 구워먹은 이슬 만유의

한 방울로 모인 만유의 즙―

천둥과 잠을 자 천둥을 밴

이슬, 해왕성 명왕성의 거울

이슬, 벌레들의 내장을 지나 새들의

목소리에 굴러 마침내

풀잎에 맺힌 이슬……

 

 


(『세상의 나무들』. 문학과지성사. 1995;『정현종 시전집 1』. 문학과지성사. 1999)

-------------------------

세상의 나무들


정현종

 

 

세상의 나무들은

무슨 일을 하지?

그걸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

허구한 날 봐도 나날이 좋아

가슴이 고만 푸르게 푸르게 두근거리는


그런 사람 땅에 뿌리내려 마지않게 하고

몸에 온몸에 수액 오르게 하고

하늘로 높은 데로 오르게 하고

둥글고 둥글어 탄력의 샘!


하늘에도 땅에도 우리들 가슴에도

들리지 나무들아 날이면 날마다

첫사랑 두근두근 팽창하는 기운을!    

 

 


(『세상의 나무들』. 문학과지성사. 1995;『정현종 시전집 1』. 문학과지성사. 1999)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