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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청산행(靑山行) / 멱라의 길 1 /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1 / 유리에 묻는다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8. 2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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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청산행(靑山行)


이기철
 

 

손 흔들고 떠나갈 미련은 없다
며칠째 청산에 와 발을 푸니
흐리던 산길이 잘 보인다.
상수리 열매를 주우며 인가를 내려다보고
쓰다 둔 편지 구절과 버린 칫솔을 생각한다.
남방으로 가다 길을 놓치고
두어번 허우적거리는 여울물
산 아래는 때까치들이 몰려와
모든 야성을 버리고 들 가운데 순결해진다.
길을 가다가 자주 뒤를 돌아보게 하는
서른 번 다져두고 서른 번 포기했던 관습들
서쪽 마을을 바라보면 나무들의 잔 숨결처럼
가늘게 흩어지는 저녁 연기가
한 가정의 고민으로 피어오르고
생목 울타리엔 들거미줄
맨살 비비는 돌들과 함께 누워
실로 이 세상을 앓아보지 않은 것들과 함께
잠들고 싶다.

 

 


(『청산행』. 민음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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멱라의 길 1


이기철

 

 

걸어가면 지상의 어디에 멱라가 흐르고 있을 것인데

나는 갈 수 없네. 산 첩첩 물 중중

사람이 수자리 보고 짐승의 눈빛 번개쳐

갈 수 없네

구강 장강 물 구비치나 아직 언덕 무너뜨리지 않고

낙타를 탄 상인들은 욕망만큼 수심도 깊어

이 물가에 사금파리 같은 꿈을 묻었다

어디서 이소(離騷) 한 가닥 바람에 불려오면

내 지상에서 얻은 病 모두 쓸어 저 강물에 띄우겠네

 

발목이 시도록 걸어가는 나날은

차라리 삶의 보석을 갈무리한다고

상강으로 드는 물들이 뒤를 돌아보며 주절대지만

문득 신발에 묻은 흙을 보며 멱라의 길이 꿈 밖에 있음을 깨닫고

혼자 피었다 지는 꽃 한 송이에 눈 닿는 것도

이승의 인연이라 생각한다

 

일생이 아름다워서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일생이 노역과 상처 아문 자리로 얼룩져 있어도

상처를 길들이는 마음 고와서 아름다운 사람은 있다

때로 삶은 우리의 걸음을 비뚤어지게 하고

독 묻은 역설을 아름답게 하지만

멱라 흐르는 물빛이 죽음마저도 되돌려주지는 못한다

아무도 걸어온 제 발자국 헤아린 자 없어도

발자국 뒤에 남은 혈흔 쌓여

한 해가 되고 일생이 된다

 

 

  *멱라 중국 호남성에 있는 강 이름. 중국 서정시의 효시인「초사(楚辭)」를 시작한 전국시대 초나라의 굴원이 주위의 참소로 분함을 못 이겨 빠져 죽은 강으로 유명함. 여기서는 내 정신의 강으로 비유됨.

  **이소(離騷) 시름을 만난다는 뜻으로 굴원이 멱라에 빠져 죽을 결심을 하기까지의 시름을 적은 장시.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문학과지성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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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1


이기철

 


어떤 노래를 부르면 내 한 번도 바라보지 못한 짐승들이 즐거워질까
어떤 노래를 부르면 내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까치도 즐거워질까
급히 달려와 내 등뒤에 연좌(連坐)한 시간들과
노동으로 부은 소의 발등을 위해
이 세상 가장 청정한 언어를 빌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날(日)을 노래하고 싶다
나이 들기 전에 늙어버린 단풍잎들은 내 가슴팍을 한 번 때리고
곧 땅 속으로 묻힌다
죽기 전에 나무둥치를 감고 타오르는 저녁놀은
지상의 죽음이 저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가르치는 걸까
살이 연한 능금과 배들은 태어나 첫 번째 베어무는
어린 아이의 갓 돋은 치아의 기쁨을 위해 제 살을 바치고
군집으로 몰려오는 어둠은 제 깊은 속에다 아직 밤길에 서툰 새끼 짐승들을 위해
군데군데 별들을 박아놓았다
우리가 아무리 높이 올라도
검은 새가 나는 하늘을 밟을 수는 없고
우리가 아무리 정밀을 향해 손짓해도
정적으로 날아간 흰 나비의 길을 걸을 수는 없다
햇빛을 몰아내는 밤은 늘 기슭에서부터 몰려와
대지의 중심을 덮고
고갈되기 전에 바다에 닿아야 하는 물들은
쉬지 않고 하류로 내려간다
병들도 친숙해지면 우리의 외로움 덮어주는 이불이 된다
산과 들판에 집 없이도 잠드는 목숨을 위해
거칠고 무딘 것들을 달래는 것이 지혜의 첫 걸음이다
달콤하지 않아도 된다 내 부르는 노래가
발 시린 짐승의 무릎을 덮는 짚이기만 하다면,
향기롭지 않아도 된다 내 부르는 노래가
이슬 한 방울에도 온몸이 젖는 풀벌레의 날개를 가릴 수 있는
둥글고 넓은 나뭇잎이기만 하다면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문학과지성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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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에 묻는다


이기철

 


나는 언제 피는 꽃처럼 육체를 향기로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언제 계절처럼 찬란하게 옷 갈아입을 수 있을 것인가


높은 곳으로는 못 올라가는 시냇물처럼
나는 언제 바닥이 더 즐거운 물의 마음이 될 것인가


나는 언제 살 속에 집을 짓고 수정의 영혼을 그 안에 앉힐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언제 해골의 물을 마시고 하룻밤 사이에 득도할 수 있을 것인가


내 문득 유리에 닿는 날
나는 모든 병자들에게 입맞추고 거지에 무릎 꿇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언제 한 개의 삽으로 남산을 옮길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다만 하나의 시인으로
풀잎처럼 세상 가운데 흔들리며 흔들리며 저물 것인가

 

 


(『유리의 나날』. 문학과지성사. 1998)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