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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 헤르만 헤세 - 9월 / 엄원태 - 9월 / 고영민 - 9월과 구월들 / 김미정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9. 3.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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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헤르만 헤세

 


우수(憂愁) 어린 정원
피어 있는 꽃에 싸느다란 비가 내린다.
그러자 여름은 봄을 부르르 떨면서
말없이 자신의 임종을 맞이한다.


황금빛으로 물든 나뭇잎이 펄럭펄럭
높다란 아카시아나무로부터 떨어진다.
그러자 여름은 깜짝 놀라 힘없는 미소를
꿈이 사라지는 마당에다 보낸다.


이미 그 전부터 장미꽃 옆에서
다소곳이 휴식을 기다리고 있던 여름은
이윽고 천천히 그 커다란
피곤에 지친 눈을 감는다.

 

 


―김희보 편저『세계의 명시』(종로서적,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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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엄원태

 

 

치르르르르르르르, 자전거 체인  소리에

비켜서며 돌아보니, 없다!

 

풀숲 여치 울음은, 꼭 뒤통수에 바짝 달라붙는다.

 

(네 베로나 여행 소식 우연히 알게 되었다

 잘 지내는 거 같아 다행이구나)

 

돌아서고 나서야 듣는다.

한참, 보이지 않던 것들의 소식을......

 

 

 

―계간』(2008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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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고영민

  

 

그리고 9월이 왔다

 
산구절초의 아홉 마디 위에 꽃이 사뿐히 얹혀져 있었다

 

수로水路를 따라 물이 반짝이며 흘러갔다

부질없는 짓이겠지만

누군지 모를 당신들 생각으로

꼬박 하루를 다 보냈다

 
햇살 곳곳에 어제 없던 그늘이 박혀 있었다

이맘때부터 왜 물은 깊어질까

산은 멀어지고 생각은 더 골똘해지고

돌의 맥박은 빨라질까

 
나무에 등을 붙이고 서서

문득 모든 것들이 다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왕버들 아래 무심히 앉아

더 어두워지길 기다렸다

 

이윽고 저녁이 와

내 손끝 검은 심지에 불을 붙이자

환하게 빛났다

자꾸만 입안에 침이 고였다

 

 

 

ㅡ계간『시인세계』(20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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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과 구월들

 

김미정 
 

 

구름이 구름을 삼키는 날들
누구라도 불러주면 좋겠어 
코스모스 가느다란 목이 지상으로 내려올 때
바람은 버스에서 내리고 너는 떠난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손가락들은 모두 어디로 숨어버렸나 
약속을 좋아하는                
그때 난 휘어진 그림자를 움켜쥐고 뛰어갔지
바람이 따라 왔던가
너의 오른 손과 나의 왼손을 남겨두고
9월이 오면 떠나자고 했지

 

골목에서 터지기 시작한 울음들이 번지고
잠 속으로 흐르는 낡은 노래 사이
너의 젖은 혀는 담장이처럼 
벽을 타고 올라갔지
어디든지 날아가고파

 
한 그림자에서 천천히 
어느 그림자가 빠져나가고

 

기다리던 정거장은 버스를 스치며
이제 막 풍경을 떠나는 시든 꽃잎처럼
너무 느리거나 빨리 지워지는 것들
차라리 일부러 그랬다고 말해주지
미처 돌아서지 못하는 바람들
출렁이는 맨발로
다행스러운 8월을 건너고 있다

 

허공에 떠있는 저어 먼 허공에서
뭉게구름이 피어오른다

 

 

 

―월간『현대시』(2009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