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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 나희덕 -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 김규리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9. 3.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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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희덕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 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 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 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들은 척 나오지 않고
여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 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 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 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시집『어두워진다는 것』(창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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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이규리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은 여러 날인데 어느 날의 꽃이 가장 꽃다운지 헤아리다가

어영부영 놓치고 말았어요

산수유 피면 산수유 놓치고

나비꽃 피면 나비꽃 놓치고

 
꼭 그날을 마련하려다 풍선을 놓치고 햇볕을 놓치고

아,

전화를 하기도 전에 덜컥 당신이 세상을 뜨셨지요

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나를 때렸어요

 
죄송해요

꼭 그날이란 게 어디 있겠어요

그냥 전화를 하면 그날이 되는 것을요

꽃은 순간 절정도 순간 우리 목숨 그런 것처럼

순간이 순간을 불러 순간에 복무하는 것인데

 

차일피일, 내 생이 이 모양으로 흘러온 것 아니겠어요

 

그날이란 사실 있지도 않은 날이라는 듯

부음은 당신이 먼저 하신 전화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당신이 이미 꽃이라,

당신 떠나시던 날이 꽃피는 날이란 걸 나만 몰랐어요

 

     
 

ㅡ웹진『시인광장』(2013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