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작과비평사.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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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지하도 입구에 서서
정희성
저녁 무렵, 박수 갈채로 날아오르는
저 비둘기떼의 깃치는 소리
광목폭 찢어 펄럭이며
피 묻은 팔뚝 함께 일어서
만세 부르던 이 광장
길을 걸으며 나는 늘
역사를 머릿속에 떠올린다
종합청사 너머로 해가 기울면
조선총독부 그늘에 잠긴
옛 궁성의 우울한 담 밑에는
워키토키로 주고받는 몇 마디 암호와
군가와 호루라기와 발자국소리
나는 듣는다, 이상하게 오늘은
술도 안 취한다던 친구의 말을
신문사를 가리키며 껄껄대던 그 웃음을
팔엔 듯 심장엔 듯 피가 솟구치고
솟구쳐 부서지는 분수 물소리
저녁 무렵, 박수갈채로 날아오르는
저 비둘기떼 깃치는 소리 들으며
나는 침침한 지하도 입구에 서서
어디론가 끝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을 본다
건너편 호텔 앞에는 몇 대의 자동차
길에는 굶주린 사람 하나 쓰러져
화단의 진달래가 더욱 붉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작과비평사.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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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살기 위하여
정희성
한 밤에 일어나
얼음을 끈다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보라, 얼음 밑에서 어떻게
물고기가 숨쉬고 있는가
나는 물고기가 눈을 감을 줄 모르는 것이 무섭다
증오에 대해서
나도 알 만큼은 안다
이곳에 살기 위해
온갖 굴욕과 어둠과 압제 속에서
싸우다 죽은 나의 친구는 왜 눈을 감지 못하는가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봄이 오기 전에 나는
얼음을 꺼야 한다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나는 자유를 위해
증오할 것을 증오한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작과비평사.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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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정희성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창작과비평사. 1991)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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