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무인도 몇 개
이건청
사람들은 누구나 한 마리씩 고래를 기르고 있다고 한다. 넘어져 무르팍이 깨진 자리가 피에 젖기 시작하면서, 일어서고 일어서면서 들판을 바라보고, 바람에 흔들리는 풀밭을 보게 되면서, 풀밭에서 날아오르는 노고지리를 보게 되면서, 속에서 커가고 있는 진짜 고래를 보게 된다고 하는데, 수평선을 툭, 툭 끊으면서 달려가고 싶은 녀석을 보게 된다고 하는데, 그 고래가 흉터로나 남은 무인도 몇 개를 노을 속으로 끌고, 밀면서 돌아오는 걸 보게 된다고 하는데
(시와 정신, 여름호)
―이은봉·김석환·맹문재·이혜원 엮음『2011 오늘의 좋은시』(2011, 푸른사상)
--------------
폐광촌을 지나며
이건청
고한읍 어딘가에 고래가 산다는 걸 나는 몰랐다. 까아맣게 몰랐다. '사북사태' 때도 그냥 어용노조만 거기 있는 줄 알았다. 혹등고래가 산 속에 숨어 탄맥을 쌓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냥 막장인줄만 알았다. 푸슬푸슬 내리는 눈발이 아이들도 개도 지우고 유리창도 깨진 사택들만 남아 있는 줄 알았다. 고래가 사는 줄은 몰랐다. 역전 주점, 시뻘겋게 타오르는 조개탄 난로의 그것을 불인줄만 알았다. 카지노 아랫마을 찌그러진 주점에서 소주잔을 들어올리는 사람들의 한숨인 줄만 알았다. 검은 탄더미인 줄만 알았다. 그냥 석탄인 줄만 알았다.
(『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세계사. 2005)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 > 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준태 - 감꽃 / 형제 / 참깨를 털면서 /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0) | 2013.09.07 |
---|---|
이건청 - 하류 / 깊은 우물 / 폐광촌을 지나며 / 황야의 이리 2 (0) | 2013.09.07 |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 유홍준 / 황정산 - 서서 오줌 누고 싶다 / 이규리 (0) | 2013.09.05 |
정희성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어두운 지하도 입구에 서서 / 이곳에 살기 위하여 /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0) | 2013.09.03 |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 나희덕 -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 김규리 (0) | 2013.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