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하류
이건청
거기 나무가 있었네.
노을 속엔
언제나 기러기가 살았네.
붉은 노을이 금관 악 기소리로 퍼지면
거기 나무를 세워두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네.
쏟아져 내리는 은하수 하늘 아래
창문을 열고 바라보았네.
발뒤축을 들고 바라보았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희미한 하류로
머리를 두고 잠이 들었네.
나무가 아이의 잠자리를 찾아와
가슴을 다독여 주고 돌아가곤 했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일만 마리 매미소리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네.
모든 대답이 거기 있었네.
그늘은 백사장이고 시냇물이었으며
삘기풀이고 뜸부기 알이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이제는 무너져 흩어져 버렸지만
둥치마저 타 버려 재가 돼 버렸지만
금관 악기 소리로 퍼지던 노을
스쳐가는 늦기러기 몇 마리 있으리.
귀 기울리고 다가서 보네.
까마득한 하루에 나무가 있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 세계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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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우물
이건청
그 우물은 깊었다.
찬물이 고여 있었다.
우물 안쪽으로 쌓아올린 돌 틈에선
검푸른 이끼가 자라고,
이끼에 서린 물방울이 툭 떨어져
투명한 소리로 울리곤 하였다.
한나절 우물에 귀를 대고 있으면
떨어진 물방울 소리들이
소리끼리 어우러져
한 편의 시로 울리는 걸 들을 수 있었다.
우물은 우물가에
닭의장풀이며 여뀌, 질경이풀들도 기르면서
자잘하고 여린 꽃들로
박새나 노랑턱멧새들을 불러
지저귀게 하였다.
그 우물은 깊었다.
하늘을 향해
까마득한 바닥까지 열어 놓고 있었다.
(『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세계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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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광촌을 지나며
이건청
고한읍 어딘가에 고래가 산다는 걸 나는 몰랐다. 까아맣게 몰랐다. '사북사태' 때도 그냥 어용노조만 거기 있는 줄 알았다. 혹등고래가 산 속에 숨어 탄맥을 쌓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냥 막장인줄만 알았다. 푸슬푸슬 내리는 눈발이 아이들도 개도 지우고 유리창도 깨진 사택들만 남아 있는 줄 알았다. 고래가 사는 줄은 몰랐다. 역전 주점, 시뻘겋게 타오르는 조개탄 난로의 그것을 불인줄만 알았다. 카지노 아랫마을 찌그러진 주점에서 소주잔을 들어올리는 사람들의 한숨인 줄만 알았다. 검은 탄더미인 줄만 알았다. 그냥 석탄인 줄만 알았다.
(『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세계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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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의 이리 2
이건청
탱자나무가 새들을 깃들이듯
저녁부터 새벽까지 어둠이 되듯
침묵하겠다.
풀들이 장수하늘소를 숨긴 채 풀씨를 기르듯
봄부터 가을까지 침묵하겠다.
이빨도 발톱도 어둠에 섞여 깜장이 되겠다.
나는 짖지 않겠다.
말뚝 가까운 자리에 엎드려
바람소릴 듣겠다.
떨어진 가랑잎을 몰고가는 바람소릴 듣겠다.
불꺼진 골목처럼 어둠이 되겠다.
나는 짖지 않겠다.
밤새도록 깨어 있겠다.
(『하이에나』문학세계사. 1989)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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