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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학 - 저수지 / 이미지 / 진흙탕에 찍힌 발자국 / 제비집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8. 8.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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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저수지


이윤학

 


하루 종일,

내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그 저수지가 나오네

내 눈 속엔 오리떼가 헤매고 있네

내 머릿속엔 손바닥만 한 고기들이

바닥에서 무겁게 헤엄치고 있네

 

물결들만 없었다면, 나는 그것이

한없이 깊은 거울인 줄 알았을 거네

세상에, 속까지 다 보여주는 거울이 있다고

믿었을 거네

 

거꾸로 박혀 있는 어두운 산들이

돌을 받아먹고 괴로워하는 저녁의 저수지

 

바닥까지 간 돌은 상처와 같아

곧 진흙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섞이게 되네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문학과지성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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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이윤학

 


삽날에 목이 찍히자
뱀은
떨어진 머리통을
금방 버린다


피가 떨어지는 호스가
방향도 없이 내둘려진다
고통을 잠글 수도꼭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뱀은
쏜살같이
어딘가로 떠난다


가야 한다
가야 한다
잊으러 가야 한다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문학과지성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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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탕에 찍힌 바퀴 자국


이윤학

 

 

진흙탕에 덤프트럭 바퀴자국 선명하다.
가라앉은 진흙탕 물을 헝클어뜨린 바퀴 자국 선명하다.
바퀴자국 위에 바퀴 자국.
어디로든 가기 위해
남이 남긴 흔적을 지워야 한다.

다시 흔적을 남겨야 한다.
물컹한 진흙탕을 짓이기고 지나간
바퀴자국, 진흙탕을 보는 사람 뇌리에
바퀴 자국이 새겨진다.
하늘도 구름도 산 그림자도
바퀴 자국을 갖는다.
진흙탕 물이 빠져 더욱
선명한 바퀴자국.
끈적거리는 진흙탕 바퀴 자국.
어디론가 가고 있는 바퀴 자국.

 

 


(『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문학과지성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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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집


이윤학

 


제비가 떠난 다음날 시누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제비집을 헐었다. 흙가루와 함께 알 수 없는
제비가 품다 간 만큼의 먼지와 비듬.
보드랍게 가슴털이 떨어진다. 제비는 어쩌면
떠나기 전에 집을 확인할지 모른다.
마음이 약한 제비는 상처를 생각하겠지.
전깃줄에 떠지어 앉아 다수결을 정한 다음날
버리는 것이 빼앗기는 것보다 어려운 줄 아는
제비떼가, 하늘 높이 까맣게 날아간다.

 

 


(『먼지의 집』. 문학과지성사. 1992)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