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법詩作法
천양희
구름과 비는 짧은 바람에서 생겨나고
긴 강은 얕은 물에서 시작된다
모든 시작들은 나아감으로 되돌릴 수 없고
되풀이는 모은 시작詩作의 적이므로
문장을 면면이 뒤져보면
표면과 내면이 다른 면面이 아니란 걸
정면과 이면이 같은 세계의 앞과 뒤라는 걸 알게 된다
내면에서 신비롭게 걸어나온 말맛들! 말의 맛으로
쓸 수 없는 것을 위해 쓴다고
반복해서 말하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혼자 걸을 때 발걸음이
더 확실해진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이미 쓴 것들은 써봐야 소용없고
이미 잘못 쓴 문장들은 엎질러진 물과 같아
무슨 작법으로 자연을 받아 쓰고
무슨 독법으로 사람을 받아 읽기나 할까
모든 살아 있는 시의 비결은 시작에 있다고?
시작의 비결은 어떤 복잡한 문장이라도
짧은 줄로 나누어 첫 줄부터 시작하는 데 있다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서
자신을 벗어나기 위해서 시작할 수는 있지
그러나 경박한 마음으로 백지를 대해선 안 되는 것이지
경외감을 가지란 말은 아니지만
진지해져야 한다는 말 놓치면 안 되지
애매하고 모호한 것이
속수이며 무책인 것이
안절과 부절 사이에서 헤맬 때
심사하고 숙고한 단 하나의 진정한 시는
다른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눈을 뜨는 것
내일의 불확실한 그것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 것
이 말들은 던져진 운명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의자의 위치만 바꿔 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을 몇 번이나 볼 수 있는
그런 자리는 없는 것일까
시는 시인의 땅에서 바람을 향기롭게 하고
시인은 오직 시를 위해서만 몸을 굽힐 수는 없는 걸까
얼마나 쓰는 것보다 어떻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들
현실을 받아 쓰는 서기書記가 되기 위해
쓰지 않는 것이 쓰는 것보다 더 중노동이란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중요한 건 스스로에게 더 많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일생 동안 시쓰기란 나에게는
진창에서 절창으로 나아가는 도정이었고
삶을 철저히 앓는 위독한 병이었다
그래서 의연하게 고독을 살아내면서 나아가지만
시는 달리는 이들에게 멈추기를 요구하네
빠름보다는 느림을 준비하네 그러므로 시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깊은 고독에 바치는 것이네
그게 좋은 시를 읽어야 할 이유
이 세상에 눈물 가득한 예지는 이것뿐이네
고독이 고래처럼 너를 삼켜버릴 때
너의 경멸과 너의 동경이 함께 성장할 때
시를 향해 조금 웃게 될 때
그때 시인이 되는 것이지
결국 시인으로 존재하기 위해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월간『현대시학』(2012,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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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법
이규리
방과 후 날마다 비유법을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이 계셨다*
비유법을 밥처럼 먹던 시절 있었다
비유는 하나로 여럿을 이해하는 일이야
노을이 철철 흘러 뜨거워서 닫아거는 저녁에
우리는 서쪽 창가에 앉아 흰 단어들을 널었다
나뭇가지에 서늘한 시간이 척척 걸리곤 했다
그 놀이에 탐닉하는 동안
놀이 끝에 서서히 슬픔이 배어나고 있었다 아파서
좋았다
그 찬란에 눈이 베이며 울며 또 견디며
아직 비유법을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이 계실까
선생님들은 다 어디 갔을까
비유법을 모르는 추운 꽃밭, 죽어가는 나무, 무서운 옥상들
뭐 이런 시절이 다 있어,
이건 비유가 아냐 방과 후가 아냐
제 생이 통째 비유인 줄 모르고,
저기 혼자 지는 붉은 해
눈 먼 상처들이야 자해한 손목들이야
* 이하석시인의 초등학교시절 회고담 중에서 취함
―계간『문학과 의식』(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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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략법(省略略)
장이엽
생략법(省略略)을 좋아하는 이들을 보았다.
그들은 쉽게 생략했고 생략된 것들에 대해 가볍게 받아넘겼다.
그들의 대화는 생략에서 생략으로 이어졌다.
대부분 의견의 전반을 생략으로 표현하는데도
그들끼리의 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생략에 익숙한 이들은 뭐든지 짧게 끝냈다.
그들은 언제 꼬리를 자르고 사라져야 하는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생략이 서툰 이들은
난처함을 감추지 못한 채 쩔쩔매는 표정이 역력했다.
자리를 뜨기 전 이야기를 끝내려는 것인지
들어주는 이가 없을까 봐서인지
주위를 돌아보거나 수시로 시간을 확인하면서
숨 쉴 겨를 없이 빠른 속도로 많은 말을 했다.
몇몇은 나에게도 생략법을 써서 접근해왔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단계를 말하는 이는 없었다.
실수로 빠트린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일부러 뺀 것인지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간극에 숨어있는 생략들 사이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불명의 정체를 생략해야만 생략으로 이해될 수 있는 생략들 앞에서.
소리 없는 소리로 말하고 발 없는 발로 뛰어다니다가
제멋대로 팽창하고 재구성된 생략법에 잠식당한 우리는,
아니 나는, 지금 위태롭다.
―웹진『시인광장』(201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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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보는 법
문숙
사랑할 때는 눈을 반만 뜨세요
관념을 버리고 기호만 보세요
상상력은 금물입니다
눈길이 새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세요
내용을 놓치면 길을 잃습니다
너무 깊이 들여다보지는 마세요
대상이 흐려지고 구성이 흔들립니다
사랑은 견고한 눈길에 잘 무너집니다
관심이 증발하면 잠깐 쉬기도 하십시오
관계를 벗어나면 영혼을 다칩니다
눈을 감았다 새순처럼 뜨세요
동공을 넓혀 산도 보고 강도 보고
부처도 들이고 하나님도 들이세요
적당한 거리에서 무념무상
지루하고 운명적인 관계를 오자 탈자 없이
잘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월간『현대시학』(2012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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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법
천양희
하루가 길게 저물 때
세상이 거꾸로 돌아갈 때
무슨 말이든
거꾸로 읽는 버릇이 내게는 있다
정치를 치정으로 정부를 부정으로 사설을 설사로
신문을 문신으로 작가를 가작으로 시집을 집시로
거꾸로 읽다보면
하루를 물구나무 섰다는 생각이 든다
내 속에 나도 모를 비명이 있는 거다
어제는 어제를 견디느라
잊고 있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직성(直星)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넌 아직도
바로 보지 못하는 바보냐, 한다
거꾸로 읽을 때마다
나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나도 문득
어느 시인처럼
자유롭게 궤도를 이탈하고 싶었다
-시집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창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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