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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 슬픔이 나를 깨운다 / 남산, 11월 /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7. 23.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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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황인숙

 


보라, 하늘을
아무에게도 엿보이지 않고
아무도 엿보지 않는다.
새는 코를 막고 솟아오른다.
얏호, 함성을 지르며
자유의 섬뜩한 덫을 끌며
팅! 팅! 팅!
시퍼런 용수철을
튕긴다.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문학과지성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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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나를 깨운다


황인숙

 


꽃 몸살 앓으며 생강꽃 피어날 깨

 

슬픔이 나를 깨운다.
벌써!
매일 새벽 나를 깨우러 오는 슬픔은
그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
슬픔은 분명 과로하고 있다.
소리 없이 나를 흔들고, 깨어나는 나를 지켜보는 슬픔은
공손히 읍하고 온종일 나를 떠나지 않는다.
슬픔은 잠시 나를 그대로 누워 있게 하고
어제와 그제, 그끄제, 그 전날의 일들을 노래해준다.
슬픔의 나직하고 쉰 목소리에 나는 울음을 터뜨린다.
슬픔은 가볍게 한숨지며 노래를 그친다.
그리고,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다.
모르겠어…… 나는 중얼거린다.


슬픔은 나를 일으키고
창문을 열고 담요를 정리한다.
슬픔은 책을 펼쳐주고, 전화를 받아주고, 세숫물을 데워준다.
그리고 조심스레
식사를 하시지 않겠냐고 권한다.
나는 슬픔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지 않다.
내가 외출할 때도 따라나서는 슬픔이
어느 결엔가 눈에 띄지 않기도 하지만
내 방을 향하여 한 발 한 발 돌아갈 때
나는 그곳에서 슬픔이
방안 가득히 웅크리고 곱다랗게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슬픔이 나를 깨운다』. 문학과지성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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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11월


황인숙

 

 

단풍 든 나무의 겨드랑이에 햇빛이 있다. 왼편, 오른편,
햇빛은 단풍 든 나무의 앞에 있고 뒤에도 있다.
우듬지에 있고 가슴께에 있고 뿌리께에 있다.
단풍 든 나무의 안과 밖, 이파리들, 속이파리,
사이사이, 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가 있다.


단풍 든 나무가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있다.
단풍 든 나무가 한없이 붉고, 노랗고, 한없이 환하다.
그지없이 맑고 그지없이 순하고 그지없이 따스하다.
단풍 든 나무가 햇빛을 담쑥 안고 있다.
행복에 겨워 찰랑거리며.
 

싸늘한 바람이 뒤바람이
햇빛을 켠 단풍나무 주위를 쉴 새 없이 서성인다.
이 벤치 저 벤치에서 남자들이
가랑잎처럼 꼬부리고 잠을 자고 있다.

 

 


(『자명한 산책』. 문학과지성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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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황인숙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무관심의 빵조각이 퉁퉁 불어 떠다니는
어딘지 알 수 없는 음습한 호수에서.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우리는 철새처럼.


플라타너스야, 너도 때로 구역질을 하니?
가령 너는 무슨 추억을 갖고 있니?
나는 내가 추억을 구걸했던 추억 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굴욕스런 꿈속에 깨어 있다 잠이 들고
자면서도 나는 졸리웠다.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문학과지성사. 199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