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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를 견디는 법 외 - 법, 법, 법..............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7. 27.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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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를 견디는 법


오명선

 


몇 겹으로 접혀
낡은 소파에 누웠다


며칠 현관문이 '외출 중'을 붙잡고 서있는 동안
나는 세상에서 방전되었다


익숙한 풍경이 커튼처럼 걸리고
빛이 차단된 몸에서
수많은 눈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간다
 

화창한 오후는 그림자를 둘둘 담요처럼 감는다


뱉지 못한 문장 뒤틀린 서술들
나는 오래전 어둠에 길들여진 어긋난 문법, 나를 필사하는
오후의 손가락이 한 뼘 길어졌다 흐린 지문으로 나를 한 술 떠먹는다


적막의 두께로
낡은 하루가 완성되었다


가끔 손을 넣어 가라앉은 나를 휘저어 본다

 

 


-계간『詩로 여는 세상』(2011, 여름호)
-시집『오후를 견디는 법』(한국문연,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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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법詩作法


천양희

 

 
구름과 비는 짧은 바람에서 생겨나고
긴 강은 얕은 물에서 시작된다


모든 시작들은 나아감으로 되돌릴 수 없고
되풀이는 모은 시작詩作의 적이므로
문장을 면면이 뒤져보면
표면과 내면이 다른 면面이 아니란 걸
정면과 이면이 같은 세계의 앞과 뒤라는 걸 알게 된다
 

내면에서 신비롭게 걸어나온 말맛들! 말의 맛으로
쓸 수 없는 것을 위해 쓴다고
반복해서 말하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혼자 걸을 때 발걸음이
더 확실해진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이미 쓴 것들은 써봐야 소용없고
이미 잘못 쓴 문장들은 엎질러진 물과 같아
무슨 작법으로 자연을 받아 쓰고
무슨 독법으로 사람을 받아 읽기나 할까
 

모든 살아 있는 시의 비결은 시작에 있다고?
시작의 비결은 어떤 복잡한 문장이라도
짧은 줄로 나누어 첫 줄부터 시작하는 데 있다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서
자신을 벗어나기 위해서 시작할 수는 있지
그러나 경박한 마음으로 백지를 대해선 안 되는 것이지
경외감을 가지란 말은 아니지만
진지해져야 한다는 말 놓치면 안 되지
 

애매하고 모호한 것이
속수이며 무책인 것이
안절과 부절 사이에서 헤맬 때
심사하고 숙고한 단 하나의 진정한 시는
다른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눈을 뜨는 것
내일의 불확실한 그것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 것
이 말들은 던져진 운명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의자의 위치만 바꿔 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을 몇 번이나 볼 수 있는
그런 자리는 없는 것일까
시는 시인의 땅에서 바람을 향기롭게 하고
시인은 오직 시를 위해서만 몸을 굽힐 수는 없는 걸까
 

얼마나 쓰는 것보다 어떻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들
현실을 받아 쓰는 서기書記가 되기 위해
쓰지 않는 것이 쓰는 것보다 더 중노동이란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중요한 건 스스로에게 더 많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일생 동안 시쓰기란 나에게는
진창에서 절창으로 나아가는 도정이었고
삶을 철저히 앓는 위독한 병이었다
그래서 의연하게 고독을 살아내면서 나아가지만
 

시는 달리는 이들에게 멈추기를 요구하네
빠름보다는 느림을 준비하네 그러므로 시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깊은 고독에 바치는 것이네
그게 좋은 시를 읽어야 할 이유
이 세상에 눈물 가득한 예지는 이것뿐이네
 
고독이 고래처럼 너를 삼켜버릴 때
너의 경멸과 너의 동경이 함께 성장할 때
시를 향해 조금 웃게 될 때
그때 시인이 되는 것이지
결국 시인으로 존재하기 위해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월간『현대시학』(2012,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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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법


이규리

 


방과 후 날마다 비유법을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이 계셨다*

비유법을 밥처럼 먹던 시절 있었다

비유는 하나로 여럿을 이해하는 일이야

 

노을이 철철 흘러 뜨거워서 닫아거는 저녁에

우리는 서쪽 창가에 앉아 흰 단어들을 널었다

나뭇가지에 서늘한 시간이 척척 걸리곤 했다

 

그 놀이에 탐닉하는 동안

놀이 끝에 서서히 슬픔이 배어나고 있었다 아파서

좋았다

그 찬란에 눈이 베이며 울며 또 견디며

 

아직 비유법을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이 계실까

선생님들은 다 어디 갔을까

비유법을 모르는 추운 꽃밭, 죽어가는 나무, 무서운 옥상들

 

뭐 이런 시절이 다 있어,

이건 비유가 아냐 방과 후가 아냐

 

제 생이 통째 비유인 줄 모르고,

 

저기 혼자 지는 붉은 해

눈 먼 상처들이야 자해한 손목들이야


  

* 이하석시인의 초등학교시절 회고담 중에서 취함

 

 

 

―계간『문학과 의식』(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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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략법(省略略)


장이엽

    

 

생략법(省略略)을 좋아하는 이들을 보았다.

그들은 쉽게 생략했고 생략된 것들에 대해 가볍게 받아넘겼다.

 

그들의 대화는 생략에서 생략으로 이어졌다.

대부분 의견의 전반을 생략으로 표현하는데도

그들끼리의 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생략에 익숙한 이들은 뭐든지 짧게 끝냈다.

그들은 언제 꼬리를 자르고 사라져야 하는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생략이 서툰 이들은

난처함을 감추지 못한 채 쩔쩔매는 표정이 역력했다.

자리를 뜨기 전 이야기를 끝내려는 것인지

들어주는 이가 없을까 봐서인지

주위를 돌아보거나 수시로 시간을 확인하면서

숨 쉴 겨를 없이 빠른 속도로 많은 말을 했다.

 

몇몇은 나에게도 생략법을 써서 접근해왔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단계를 말하는 이는 없었다.

실수로 빠트린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일부러 뺀 것인지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간극에 숨어있는 생략들 사이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불명의 정체를 생략해야만 생략으로 이해될 수 있는 생략들 앞에서.

소리 없는 소리로 말하고 발 없는 발로 뛰어다니다가

제멋대로 팽창하고 재구성된 생략법에 잠식당한 우리는,

아니 나는, 지금 위태롭다.

 

 

―웹진『시인광장』(201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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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탕법


김명은

 
 

욕조에 앉아 턱까지 물을 끌어다 덮는다


혼자 있는 집

잠긴 욕실
 

몸과 물이 불안을 반반씩 덜어낸다

물에 굴절되어 휘어지는 다리, 거울을 지우는 수증기
 

안개꽃이나 마가렛 줄기를 가지런히

끓는 물에 넣었다 꺼내는 꽃의 열탕법을 생각하다가

그렇게까지 해서 더 살아 뭘 하나

바디샴푸 거품을 움켜쥔다


열기가 뼈끝까지 닿아야 뜨거워지는 몸

구석구석 물혹만 늘어난다


나른한 라벤더 향기

몸을 뒤척일 때마다 쏟아지는 물소리


납작한 가슴의 혹을 만지다가 온수 수도꼭지를 돌린다

꽃처럼 붉어지는 손가락

데일 듯한 물속에 뜨거운 몸을 꽂는다

 

 

 

―계간『시와환상』(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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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가 되는 법


  최호일

 

 
  매일 하늘을 날면서 밥을 해 먹을 것 새의 목소리와 성격으로 수술하고 천장과 바닥을 없애버릴 것

 
  일주일에 두 번 날갯죽지에 얼굴을 묻고 너무 캄캄해서 울 것 아직 태어나지 않은 듯 잡았던 손을 놓고 흔들며 인간의 마을에서 잊혀질 것

 
  새장을 만들어 놓고 새장을 부술 것 하얀 새의 천 번째 울음소리로 얼굴을 씻고 하얗게 될 것 어둠이 묻어 있는 바람을 끌어다 덮고 자면서 오월이 오면 오월을 등에 지고 다닐 것


  아침이면 새소리에 잠이 깨 새의 그림자를 만들어 놓고 빠져 나갈 것 시를 쓰고 짝짝 찢어서 바람에 날린 후 가장 멀리 날아 갈 것

 
  자신이 새인 줄 모르고 새처럼 날아가다가 깜짝 놀랄 것
 

  냄새 나게 새는 왜 키우니 하고 돌을 던지면 맞아서 죽을 것 죽어서 매화그림 속으로 들어갈 것

 

 


―월간『현대시학』(2010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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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법


송용호

 


저탄장으로 귀가하는
화물열차의 기적 소리로 수업은 시작되었다
밤새 바람은 나비처럼 석탄가루를 날라
마당 가득
꿈만큼이나 어지럽게 피어난 철쭉꽃잎 사이사이에 뿌리고
나는 사분의 사박자 행진곡에
발맞춰야 할 내 춤의 한 귀퉁이를 비우기 위해
애써 거짓 일기를 쓰곤 했다
아무리 해도 잘 풀리지 않던
우리나라의 산수과목 문제와 함께 자라는 것은
왜 이리 어려운 것일까
자주 나의 장래를 의심하곤 했다
잦은 어머니의 등교로 우수수 우수수 낙엽되어 쌓이던 나의 성적표
때때로 그곳에 산불이라도 나기를 바라며
무궁화 꽃이 자꾸만 피고 져도 찾아내지 못하던
이 다음에 내가 해야 할 숙제를 미리 걱정하곤 했다
학년이 바뀔 때마다
새 이름표를 달듯 쉽게 바뀌곤 하던 내
희망의 간이역에서
종종 발견되곤 하던 절망의 상처에
어머니는 빨간 약을 발라주셨지만,
유년의 계획표는 가뭄처럼 갈라지고
국민학교 6학년을 마감하는 생활기록부에는
불안한 졸업이
버즘처럼 피어 있었다

 

 


―계간『정인문학』(2006년 창간호-시인들의 대표시)
(198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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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모자를 조문하는 법

 
최호일

 

 

꿈을 꿀 때도 노란 모자를 쓰고 있었지 노란 모자라고 불렀던 그 여자

비가 오는 날에도 눈이 크다
 


곱창과 소주 생각이 나서 곱창에 소주 마시는 생각을 했다

시간은 느리게 갈 것이고

밤은 덜 익은 곱창처럼 질기고 소주는 너무 써

물방울무늬의 암세포가 시간의 덩굴처럼 아름답게 자라는

누우면 젖과 젖 사이가 멀어지는 여자
 


서른여섯이니까 하늘을 봐요

같은 병실에서 잠이 드는 게 지루하고 미안해 별을 보고 말했다

 

별은 단순하고 쓸쓸한 쪽에서 빛난다

 

먼 부부처럼 밥을 따로 떠먹으며

그녀와 함께 바람 부는 날 소주에 곱창을 먹을 확률에 대해 생각했다

이런 생각들은 형광등 불빛으로 멀리 새 나가

더 먼 곳에서 사라진다
 


안녕, 노란 모자

노란 모자가 불이 켜지는 냉장고 위에 놓여 있다

죽음에 무사히 도착하려면 모자를 벗어야지

 
누가 내 혀를 잘라서 가지고 있는지

요즘 소주는 싱거워

 

 


―계간『미네르바』(201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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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독서법


김연아

 


내가 아주 작고 어린 고양이였을 때

꽃들에게 다가가면 꽃들도 내게 다가왔죠


침대맡에 펼쳐진 책 위를 걸어 다니던 고양이

똥 묻은 분홍발바닥으로 데이지꽃을 찍어놓았다


당신의 책속에는 나비같은 말들이 있어요

나는 그 말들을 만지고 맛보아요

당신의 우아한 거짓말이 내 몸안에서 수정되어요


당신이 책이라 부르는 것

그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나는 당신의 해석에 만족할 수 없어요

잘못쓴 꽃들을 지우면서

나는 데이지를 데이지로 보았답니다


나에게 시간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공간이라고 말할 거예요

시간을 머금은 내 눈동자는

밤을 담은 수정구처럼 그윽하죠


내 생의 시작은 몽상의 시작

나는 토성의 달 아래 잠이 들고

금강의 이름을 지닌 당신의 경전을

아무 염려 없이 물어뜯어요


보랏빛 눈을 가진 데이지꽃이 자라는 소리

당신이 보고 싶어하던 여명이 이제 시작되려해요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이 나를 바라봐요,

백 개의 눈을 가진 아르거스처럼


당신의 밤에서 태어난 그림자들

검은 새가 밤의 끝에서 노래를 하네

검은 새가 밤의 끝에서 노래를 하네

 

 


―월간『현대시학』(2007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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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길들이는 법

 
심언주

 

 

함께 걷던 '거리'가 있다

함께였는데 '거리'를 둔다

징글벨이 울리는 '거리'

벚꽃이 혼자 피는 '거리'

넘어올 수 있는 '길'

넘어가지 못하는 '길'

 
'길'들을 한데 모아

점선을 따라 접는다

실선을 따라 오린다

잘게 자른다

뿌린다

수북이

꽃잎이 지고

두근거림도 수런거림도

낙엽으로 쌓여 썩은

땅 위에

꽃씨들이 풀씨들이

자라

발목을 뒤덮고

허리를 휘감고

마침내는

머리맡까지 우거질 때까지


 


―시집『4월아, 미안하다』(민음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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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여자가 사는 법
 

 홍일표
 
 
 
 
 
해금 속에서 총을 꺼내들고

조준을 한다

방아쇠를 당기면 불 꺼진 집이 튀어나온다

가고 싶지 않은

그러나 갈 수밖에 없는

혼자 사는 집

한 덩어리의 울음으로 집을 켠다

천천히 밝아지는 아홉 평

해금은 무기가 되고

그 여자는 전사가 된다

바닥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원유

시커먼 울음에 불을 당긴다

해금이 흐느끼고

그 여자가 활활 타오른다

해금도 총도,

머리 긴 그 여자도 보이지 않는다

 

 


―월간『문학사상』(2008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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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대의 은유법


  박진성

 

 

  아이들은 온라인 게임에서 은유를 배우네.

  십사층에 떠 있는 창백한 국어교과서. 총 쏘는 게임을 좋아하는 소년이 있었지. 나의 은유에 동의하지 못하는 소년.

  연평도를 재밌어하는 소년이 있었지. 총기 사건에 관심이 많은 소년. 빈 라덴을 좋아하던 소년은

  과외를 그만두었다. 대안 학교로 간 소년은

  내게서 환멸을 배웠다.

  무심해질 수 있을까.
 

  엘리베이터의 층수를 조준한다.

  탄환처럼 나는 지상에 박힐 것이다.

  나무들은 골라 쏘기 좋은 총기류, 아파트 단지에 캐릭터들이 나부낀다. 말풍선처럼 장바구

니를 서류가방을 책가방을 들고서 휴대폰을 들고서 이런 말들을 보네. 하루하루가 전쟁이

야…… 가계 빚, 한국 경제 뇌관……물폭탄 수도권 강타……,

 
  총알택시는 총알의 감정을 모르지.

  내일 저녁에는 마트에 가자.

  싱싱한 사건들이 자라고 있을 거야.

  과일의 감정을 파프리카의 감정을

  텅 비어 있는 카트의 감정을

  너희는 소녀라고 부르지.

 

 


―월간『현대시학』(201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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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한 마리의 밀항법


황성희

 

교차로로 뛰어들던 개의 행운을 빕니다.

필기해도 괜찮습니다.

나는 오늘 아침의 사실을 말합니다.

멸치 볶음에 간장 넣지 않았습니다.

통깨는 마지막에 뿌렸고 원산지는 모릅니다.

설탕 봉지는 노란 고무줄로 입구를 봉했고

지름이 서로 다른 팬 두 개를 사용했습니다.

아니요, 나는 방사 유정란만 씁니다.

두 개를 사용했지만 깨뜨린 것은 세 개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어떻게 됐을까요.

시간 속으로 모락모락 피가 증발하는 동안

골몰할 유정란 하나는 사치가 아닙니다.

배아를 둘러싼 실핏줄이 비위를 건드린다면

행운을 빌었던 오늘 아침의 개는 아직 교차로에 있습니다.

왜 하필 거기 멈춰 꼬리를 살랑거렸는지 궁금해 볼까요.

옆 사람 얼굴 쳐다볼 필요 없습니다.

배는 항상 그렇게 얼렁뚱땅 갈아타는 겁니다.

가끔 가족사진 꺼내 보는 것만 잊지 마시길.

멀미가 걱정된다면.

 


―월간『현대문학』(2011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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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통해 허공을 말하는 법


박남희

 


나는 어느 날
당신이 말하는 것이 허공을 말하는 것 같아
당신이 문득 꽃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지


꽃은 자신이 허공에 있다는 것을 모르지
자신의 안에 허공이 있다는 것도


하지만 뿌리는 꽃을 통해 허공을 말하는 법을 알고 있지
그런데 한차례 꽃이 피어나고 시드는 허공의 이치를
뿌리는 왜 끝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인지

그러면서 실뿌리는 점점 땅 속 깊이 뻗어가
낯선 돌을 만지고 샘을 더듬다가
어둠의 차디찬 깊이를 만나고 끝내 꽃을 떨구게 되지


아름다움은 모두 한차례의 흔들림으로 기억되는 것인지
허공은 자꾸만 꽃을 흔들고 꽃은 점점 외로워지지
그렇게 꽃은 떨어져 시들어가지


꽃이 외롭게 흔들리다 만들어낸 흔적이
다시 허공이 된다는 것을 바람은 알고 있지


그렇게 만들어진 텅 빈 커다란 꽃이 허공이라는 것을
아무도 가르쳐주는 이가 없어도
허공은 텅 빈 꽃으로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지


당신과 내가 마주보며 흔들려서 만들어낸
바람의 빛깔, 저 허공의 언어가
꽃이라는 것은 영원히 당신과 나만이 알지

 

 


―계간『미네르바』(200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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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보는 법

 
문숙

 

 
사랑할 때는 눈을 반만 뜨세요

관념을 버리고 기호만 보세요

상상력은 금물입니다

눈길이 새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세요

내용을 놓치면 길을 잃습니다

너무 깊이 들여다보지는 마세요

대상이 흐려지고 구성이 흔들립니다

사랑은 견고한 눈길에 잘 무너집니다


관심이 증발하면 잠깐 쉬기도 하십시오

관계를 벗어나면 영혼을 다칩니다

눈을 감았다 새순처럼 뜨세요

동공을 넓혀 산도 보고 강도 보고

부처도 들이고 하나님도 들이세요

적당한 거리에서 무념무상

지루하고 운명적인 관계를 오자 탈자 없이

잘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월간『현대시학』(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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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나무가 사는 법


  양문규
 


  한겨울 세상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늙은 나무들을 본다


  한평생 붙들어 맸던 구름과 바람과 비와 햇살과 안녕

  같은 하늘 속에 집이 되고, 그늘이 되고, 양식이 되던 풀과 꽃과 까
치와 다람쥐와 애기벌레들과도 안녕

  봄날 한 아름 나무 등걸 속에 움틀 푸른 열기의 유혹마저도 영원히
잠재운 채

  안녕, 또 안녕


   고래심줄 같은 뿌리가 폭설과 맞닿는 순간

  한 생은 극한이면서 또 얼마나 황홀한 사랑인가

  서성이는 통곡 대신 허공을 들쳐메고 가는 하얀 길

 
  누구도 나이테에 그려진 죽음을 읽지 못하지만 늙은 나무들은 안다
 

  걸으면서 쏴아 센 비바람에 잔가지 몇 개쯤 버리고,

  누우면서 쎄앵 거친 눈보라에 굵은 몸 통째로 내려놓으며

  저 높은 곳이 언제나 무덤이라는 것을


  하늘을 떠가는 늙은 나무들 풍찬노숙(風餐路宿) 속에서 또 다른 나
를 본다

 

 


-월간『유심』 (201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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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에 이르는 법

 


복효근

 

 

  

  엘리베이터에서나 미용실에서
  좌우 혹은 전후로 붙어있는 거울 사이에 있을 때
  거울에 비친 모습이 반대편 거울 속에 비치고 다시 그 모습이 반대편 거울 속에 비치고
  그래서 끝 간 데를 알 수 없이 서로가 서로를 비춰주듯
  가령 그대와 내가 마주보고 있을 때
  내가 눈부처로 그대 눈 속에 비치고 그대의 모습은 내 눈 속에 눈부처로 비치고
  그 눈부처의 눈 속에 다시 그대가 비치고 내가 비치고 비친 그 눈부처의 눈 속에 서로가 서로를 끝 간 데 없이 비출 것을 생각하면
  아예 없을지도 모를 그 소실점의 거리를 생각하면
  영원에 이르는 것은 순식간이네
  그 순식간을 영원으로 이어놓는 일은 아무 일도 아니네
  다만 그대와 내가 마주보고 있을 때

 

 

 


―시집『따뜻한 외면』(실천문학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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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를 읽는 법


박지웅   

 


나비는 꽃이 쓴 글씨
꽃이 꽃에게 보내는 쪽지
나풀나풀 떨어지는 듯 떠오르는
아슬아슬한 탈선의 필적
저 활자는 단 한 줄인데
나는 번번이 놓쳐버려
처음부터 읽고 다시 읽고
나비를 정독하다, 문득
문법 밖에서 율동하는 필체
나비는 아름다운 비밀을 깨닫는다
울퉁불퉁하게 때로는 결 없이
다듬다가 공중에서 지워지는 글씨
나비를 천천히 펴서 읽고 접을 때
수줍게 돋는 푸른 동사(動詞)들
나비는 꽃이 읽는 글씨
육필의 경치를 기웃거릴 때
바람이 훔쳐가는 글씨

 

 


-계간『詩로 여는 세상』(2011년 가을호)
-안도현 지음 『2012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작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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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로 사는 법

 

박정원

 

 

그녀를 안아 본 사람은 안다

그녀가 왜 둥근지를

 

지상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나뭇가지를 감고 올라가는

사위질빵의 여린 새순처럼

동그랗게 몸을 마는 그녀

 

웅덩이에서 숨을 고른다  

발버둥을 쳐봐도 그녀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허우적거릴 때마다 그녀의 동그라미는 더욱 견고해진다

나는 동그라미를 빠져나오기 위해 간사한 내 혓바닥을

동그랗게 말아

동그라미를 애무한다

 

내가 즐기는 동그라미에 나를 즐기는 동그라미가 침대

위에 겹쳐진다

 

둥근 바퀴 하나가 산산조각 내놓고 가면

둥근 그녀의 몸이 산산조각 낸 동그라미를

이내 동그랗게 동그라미를 쳐놓아

또 하나의 바퀴자국을 남긴다

 

그녀의 둥근 몸을 닮아가는 나는

그녀의 달콤한 젖무덤처럼 점점 더 동그랗게 말린다

 

그녀와 나는 왜 동등하지 않나

왜 수시로 동침하면서 함께 살지 못하나

 

둥근 그녀를 안으려면 둥그런 바퀴로 굴러야 한다

 

모서리에 찧은 멍이 오래 간다

각이 진 빗방울일수록 웅덩이 속을 뒤집어놓는다

 

바퀴에 눌린 피멍 하나가

웅덩이 속 하늘을 찢어놓고 간다

 

 


 

―함시엔솔러지『꽃의 바닥』(2012. 제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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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속을 여행하는 법 2


권혁웅

 

 

제국에 들려면 구규九竅라 불리는 관문들 가운데
하나를 통과해야 한다
북쪽에 일곱, 남쪽에 둘이 있는데
전자는 대륙으로 통하는 관關이고 후자는 항구다
위의 일곱 곳은 자유무역 지대다
식량과 문물과 소문이 관세 없이 교환된다
행정중심복합도시가 이곳에 있는데
원래는 복개한 납골당 자리였다
아래 두 곳은 쓰레기 매립지 위에 건설해서
악취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요하尿河와 구절양장이 부지런히 냄새를 실어나른다
가운데 수도가 자리 잡았는데 매양
여국汝國을 향해 두근댄다
제국은 내내 서향西向이고
백두대간이 동쪽에 바투 솟아 있어서
영동이 좁고 영서가 넓다
청춘은 잠깐이고 이후로는 내내 일몰이란 증거다
제국의 전성기에는 강역이 끝도 없어
지평선과 수평선이 흥청망청 뻗어나갔다
후에 분국分國들이
수도의 가렴주구에 들고 일어났다
이제는 간도 잃고 쓸개도 빠진 꼴이어서
북쪽 국경의 고원지대에선 봉두난발이 자라고
남쪽 국경의 평야지대는 파자마의 원산지다
그 사이로 우수마발과 견원지간이 들고난다
제국은 지금 저녁이다
저녁은 이녁의 반대말이어서
그쪽도 이쪽도 되지 못한 우유부단과 우왕좌왕이
제국의 신민이다
그렇게 제국은 작아진다
그렇게 제국은 사라진다

 

 


-계간『선』(2011, 가을호)
- 웹진 시인광장 선정『2012 올해의 좋은 시 100선』(아인북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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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간 여자 붙잡는 법


  류근 

 


  도망간 여자가 아직 지구 안에 머물고 있다면
  그녀를 붙잡는 것은 아주 쉬운 일
  우선 몸의 부피부터 부풀려야 한다
  태양계보다 커야 한다
  지구 밖으로 물러나 좀 살펴보다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지구의 속도를 가볍게
제압한 후
  태양 가까이 가져가서 자세히 관찰하도록 한다
  그래도 도망간 그녀는 쉽게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도망간 여자가 채석장에서 돌을 깨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집어등 밝힌 어선을 타고 오징어를 잡고 있지는 않
을 테니까
  강물과 바닷물을 비워낸다
  너무 예리하지 않은 칼로 지구의 껍데기를 벗겨낸다
  아, 지붕들만 살짝 벗겨내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핀셋으로 남자들을 골라낸다
  좀 작업이 더딜 것 같으면 도처에 싸움을 일으키면
된다
  남자들은, 어쨌든 무엇을 위해서든 뛰쳐나가지 않
고선
  배겨내지 못할 테니까 그게 남자들이 주로 하는 일
이니까
  이번엔 동네 구멍가게든 백화점이든 모든 상점마다
  폭탄 세일을 벌이도록 한다 도망간 여자가
  설마 그 비좁은 틈바구니에서 구두를 고르고 있진
않을 테니까
  홍당무와 감자의 무게를 달고 있진 않을 테니까
  이제 좀 정리가 됐는가
  그때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준다
  한사코 귀를 막고 다시 도망가는 여자가 있다면
  그녀를 주시하라 그녀는 아직도 그 노래를 기억하
고 있고
  내가 되었든 당신이 되었든 결코 다시 듣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
  도망간 여자가 아직 지구 안에 머물고 있다면
  그녀를 붙잡는 것은 아주 쉬운 일
  그러나 도망간 여자를 붙잡는 일은 너무나 어리석
어서
  제발 그만두라고 말리고 싶다
  그건 지구를 괴롭히는 일이니까
  태양계를 비좁게 만드는 일이니까

 

 


-시집 『상처적 체질』(문학과지성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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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법

 
천양희

 

 

하루가  길게 저물 때

세상이 거꾸로 돌아갈 때

무슨 말이든

거꾸로 읽는 버릇이 내게는 있다

 

정치를 치정으로 정부를 부정으로 사설을 설사로

신문을 문신으로 작가를 가작으로 시집을 집시로

 

거꾸로 읽다보면

하루를 물구나무 섰다는 생각이 든다

내 속에 나도 모를 비명이 있는 거다

 

어제는 어제를 견디느라

잊고 있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직성(直星)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넌 아직도

바로 보지 못하는 바보냐, 한다

 

거꾸로 읽을 때마다

나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나도 문득

어느 시인처럼

자유롭게 궤도를 이탈하고 싶었다

 

 


-시집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창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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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복효근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떼가
누우들이 물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발굽으로 강둑을 치던 몇 마리 누우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우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중 몇 마리는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시집『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문학과경계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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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차크라, 풀어진 태엽을 다시 감는 법

 

 

 

고장 난

벽시계의 뚜껑을 열어 본다

감기지 않은 태엽의 자리가 궁금하다

 

 

맞물린 톱니바퀴의 틈

사이사이

떨어진 시간 가루들 자리 굳히고 있다

 

 

분침의 가슴 속에 묻혀 있는 것은

미처 아물지 못한 기억 속의 어제

시침의 어깨 위에 올라앉은 것은

잡을 수 없는 기대감 속의 내일

 

 

풀어진 태엽의 골짜기는 그림자 시간의 보금자리

옆 돌아볼 틈 없이 달려온 시간이

한숨 놓고 편히 쉬는 곳

 

 

굳이 태엽을 고쳐 감는 일을 쉬기로 한다

 

 

단단히 감아두었던

내 마음 속의 태엽도

끊어진 것은 끊어진 대로

풀어진 것은 풀어진 대로

어제도 내일도 두어두기로 한다

 

지금 이 시간은 여기에 있으니까.

 

 

* 칼라차크라(Kalacakra) : ‘영원한 시간의 수레바퀴’라는 뜻을 가진 산스크리트어.

 

 

 

 

 

-시집 『고비사막 은하수』(문학아카데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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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법

 

김용옥

 

 

길을 가다가

길바닥에 돌멩이 병조각을

치웠습니다

사람을 만나다가

그의 몸에 박혀 있는 못을

빼내어 버렸습니다

 

……

……

 

고요히 앉아서 나를 들여다보았습니다

발에는 상처 투성이었습니다

몸에는 못이 촘촘히 박혀 있었습니다

 

……

 

 

 

―시집『누구의 밥숟가락이냐』(계간문예,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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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는 법

 

정호승

 

           

밥상  앞에

무릎을  끓지 말 것

눈물로 만든 밥보다

모래로 만든 밥을 먼저 먹을것

 

무엇보다도

전시된 밥은 먹지 말 것

먹더라도  혼자 먹을 것

아니면 차라리 굶을 것

굶어서 가벼워질 것

 

때때로

바람 부는 날이면

풀잎을 햇살에 비벼 먹을 것

그래도 배가  고프면

입을 없앨 것

 

 

 

-곽재구 엮음 『우리가 별들 사이를 여행할 때』(이가서,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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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작 패는 법

 

 


복효근

 

 

 

 

이제 때가 되어

베어진 나무라 할지라도 나무에겐 추억이 있다네

잘린 나무토막을 보면 나이테가 보이지

그 나이테가 나무의 온 몸에 결을 만들고 있지

그 결을 따라 바람이 드나들고

물이, 말하자면 나무의 피가 돌았지

그래서 말인데

장작을 팰 땐 포정*이 소를 다루듯 해야 하네

무리한 힘을 줄 필요가 없어

나무가 이룬 결을 따라 도끼날을 집어넣어주면 돼

마치 지수화풍(地水火風)이었던 그 모습으로 돌려보내주기 위해

천장사가 육신을 잘게 나누어

새들에게 먹이는 조장처럼 말이야

포정의 소는 뼈와 살이 다 분리되어 무너지는 순간까지

제 몸에 칼이 들어와 후비고 다녔다는 걸 몰랐다잖나

무엇보다 나무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나무가 물이었던 시절

나무가 바람이었던 시절로 돌려보내주겠다는 생각으로

나무가 미리 내놓은 길을 찾아

그 길을 넓혀주면 되는 거지

그러면 나무가 쩍 박수소리를 내며 벌어진다네

주의할 점도 있지

제 몸의 상처를 감싸고 돌처럼 굳어진 옹이엔

도끼날을 들이대지 않아야 하네

옹이는 나무의 사리이므로

상처를 사리로 만드는 기나긴 나무의 생에 대한 예의이므로

온몸에 불을 붙이고 제 갈 길 제가 밝히고 가는 장작,

장작에 대한 예의이므로

 

 


????

*포정 : <장자(莊子)>에 나오는, 소 잡는 데 도가 튼 백정.

 

 

 


-계간『시작』(2011,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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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에 말뚝 박는 법

함민복


뻘에 말뚝을 박으려면
긴 정치망 말이나 김 말도


짧은 새우 그물 말이나 큰 말 잡아줄 써개말도
말뚝을 잡고 손으로 또는 발로
좌우로 또는 앞뒤로 흔들어야 한다
힘으로 내리박는 것이 아니라
흔들다보면 뻘이 물러지고 물기에 젖어
뻘이 말뚝을 품어 제 몸으로 빨아들일 때까지
좌우로 또는 앞뒤로 열심히 흔들어야 한다
뻘이 말뚝을 빨아들여 점점 빨리 깊이 빨아주어
정말 외설스럽다는 느낌이 올 때까지
흔들어주어야 한다

수평이 수직을 세워

그물 넝쿨을 걸고
물고기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 상상을 하며
좌우로 또는 앞뒤로
흔들며 지그시 눌러주기만 하면 된다

 

 

 

―안도현 엮음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이가서,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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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 먹는 법


문정희

 

 

오도독! 네 심장에 이빨을 박는다

이빨 사이로 흐르는 붉고 향기로운 피

나는 거울을 보고 싶다

사랑하는 이의 심장을 먹는 여자가 보고 싶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져서

마녀처럼 두개골을 다 파먹는 여자

오, 내 사랑

알알이 언어를 파먹는다

한밤에 일어나 너를 먹는다

 

 


―월간『현대시』(2007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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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화 보는 법


장옥관

 


한사코 보는 것만 보려 한다
수석 취미 가진 사람은 알리라 강바닥에서 주워온 돌에 박혀 있는 온갖 무늬
우리는
한사코 무언가를 떠올리려 한다
누가 말릴 것인가 국화빵에서 국화를 피우려는 그 집요함을,
신기한 것은
제목 붙이고 설명 곁들이고 난 뒤에는
누구든 이의를 달지 않는다는 사실
아무리 어르고 쥐어박아도 다르게 볼 수 없다는 사실
뭐든 보려면 제대로 봐야 한다는데
디자인이 좋아 사온 로가디스 기성양복
굵은 몸통 기어코 끼워 넣으려는 나의 정신은,
살색 의수에 끼워놓은 꽃반지 같다

 

 


―계간『문예중앙』(2005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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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가 사는 법


천양희

 


벌새는 1초에 90번이나
제 몸을 쳐서
공중에 부동자세로 서고
파도는 하루에 70만 번이나
제 몸을 쳐서 소리를 낸다


나는 하루에 몇 번이나
내 몸을 쳐서 시를 쓰나

 

 

『제51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2006 제51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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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길들이는 법

 
심언주

 

 

함께 걷던 '거리'가 있다

함께였는데 '거리'를 둔다

징글벨이 울리는 '거리'

벚꽃이 혼자 피는 '거리'

넘어올 수 있는 '길'

넘어가지 못하는 '길'

 
'길'들을 한데 모아

점선을 따라 접는다

실선을 따라 오린다

잘게 자른다

뿌린다

수북이

꽃잎이 지고

두근거림도 수런거림도

낙엽으로 쌓여 썩은

땅 위에

꽃씨들이 풀씨들이

자라

발목을 뒤덮고

허리를 휘감고

마침내는

머리맡까지 우거질 때까지


 


―시집『4월아, 미안하다』(민음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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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법
놀이 33

       홍윤숙

 

 

일찍이 낙법을 배워둘 것을
젊은 날 섣부른 혈기 하나로
오르는 일에만 골몰하느라
내려가는 길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어느덧 전방엔 '더는 갈 수 없음'의
붉은 표시판


석양을 등지고 돌아선 너의
한쪽 어깨 이미 어둠에 묻힌
발밑에 돌무더기 시시로 무너져내리는
아슬한 벼랑 끝에 외발로 섰다


세상에 진 빚과 죄로
몸보다 무거운 영혼의 무게
추스려 이마에 얹고
남은 한 발 허공에 건다


아득하여라
해 아래 떨어지는 모과의 향기
바람에 섞이듯 그렇게
사라지는 소멸의 착지 그
아름다운 낙하를

 

 

(『낙법 놀이』.세계사. 1994 :『홍윤선 시전집』. 시와시학사. 2005)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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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법落法

 

권순진

 


유도에서 맨 먼저 익혀야할 게 넘어지는 기술이다
자빠지되 물론 상하지 말아야 한다
메칠 생각에 앞서 패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훈련
거듭해서 내동댕이쳐지다 보면 바닥과의 화친이 이루어진다
몸의 접점이 많을수록 몸은 얌전해지고
나아가 기분 더럽지 않고 안락하기까지 하다
탁탁 손바닥으로 큰소리 장단 맞춰 바닥에 드러눕는 것이
더러는 보는 이에게도 참 흐뭇하다
머리를 우선 낮추고 몸을 둥굴게 말아 구르니
넘어진들 몸과 마음이 상할 리 없다
어깨에 얹힌 힘을, 발목에 달린 힘을, 모가지에 붙은 힘을
죄다 빼고 헐거워져서야 마음도 둥글어진다
그때서야 엉덩살은 왜 그리 두껍게 붙어있는지
넘어지고서도 다시 일어서야할 생각은 왜 솟아나는지
누운 자세에서도 깨달으며 무릎 세운다
 

 

 

-시집『낙법』(문학공원,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