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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 - 이은규/장혜원/이종섶/복효근/박해람/김해자/이덕규/박해림/김일태/강수니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10. 4.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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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자들의 경전

 

이은규

 

 

어느 날부터 그들은
바람을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바람은 형상을 거부하므로 우상이 아니다

떠도는 피의 이름, 유목
그 이름에는 바람을 찢고 날아야 하는
새의 고단한 깃털 하나가 흩날리고 있을 것 같다

유목민이 되지 못한 그는
작은 침대를 초원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건기의 초원에 바람만이 자라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생은 건기를 맞아 바람 맞는 일이
혹은 바람을 동경하는 일이, 일이 될 참이었다

피가 흐른다는 것은
불구의 기억들이 몸 안의 길을 따라 떠돈다는 것
이미 유목의 피는 멈출 수 없다는 끝을 가진다

오늘밤도 베개를 베지 않고 잠이 든 그
유목민들은 멀리서의 말발굽 소리를 듣기 위해
잠을 잘 때도 땅에 귀를 댄 채로 잠이 든다지
생각난 듯 바람의 목소리만 길게 울린다지
말발굽 소리는 길 위에 잠시 머무는 집마저
허물고 말겠다는 불편한 소식을 싣고 온다지
그러나 침대위의 영혼에게 종종 닿는 소식이란
불편이 끝내 불구의 기억이 되었다는
몹쓸 예감의 확인일 때가 많았다

밤,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은
바람의 낮은 목소리만이 읊을 수 있다
동경하는 것을 닮아갈 때
피는 그 쪽으로 흐르고 그 쪽으로 떠돈다
地名을 잊는다, 한 점 바람

 

 


(2008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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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경전

 

장혜원

 

 

어머니의 텃밭 한 두름이 택배로 왔다
애비 녹즙해주어라는 문구와 함께
케일이 단정히 묶여 왔다
갈피 사이에 숨어들어
달팽이도 따라 왔다
케일을 씻다가 무심코 물과 함께 버린 달팽이
개수대 위로 올라와 몸을 곧추세운다
팽팽한 더듬이가 내 촉수를 건드린다
공명통 같은 집에서 소리를 퍼올린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
내 달팽이관을 밀어붙여도
말랑거리는 퍼포먼스를 독해할 수가 없다
어머니 기도하는 모습 같기도 하여
무어라고 하더냐고 물었다
연신 같은 동작만 거듭하더니
묵묵히 창쪽으로 걸어간다,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 말고
알아도 모르는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제 갈 길만 가라는 듯

 

 


-『시와정신 』(2010,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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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자경전

 

이종섶

 

 

한 해의 고단했던 농사는

마른 논바닥과

벼 밑동을 수확하기 위함이다

두꺼운 종이 한 장씩 넘기며

깨알 같은 점자를 파고 있는 가을 들판

낫으로 싹둑싹둑 벼를 베어나가면

가지런히 나타나는 글자들

자근자근 밟아가며 꼭꼭 눌러 쓰는

폭신한 문장들의 감촉

한 자 한 자 깨닫고자

허리를 깊숙이 숙인 채

얼굴에 구슬땀을 흘리는 자만이

도톰한 점자를 읽을 수 있는 법

더듬거리는 빗물

훑고 지나가는 바람

스치는 소리 하나 없이

오랫동안 읽고 있는 햇빛 때문에

점점 낮아지는 점자들

닳아 없어지기 전에

하늘도 눈을 내려 읽어보고

그 달디 단 말씀 영원히 보관하고 싶어

함박눈으로 탁본해간다

밤하늘에 하얗게 음각되어 빛나는

벼 밑동자리 별들

달빛이 밤새 어루만지며

포근하게 묵상하고 있다

하늘에서 지상에서 마주보고 있는 책갈피

한 해에 한 질씩 탄생하는 점자전집

먼 길을 떠나는 새들이

부리로 읽고 가는

경전이다

 

 

 

(2007 기독교타임즈 문학상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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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의 경전


복효근

 


겨울을 넘긴 고구마는
툭툭 힘줄이 불거지기 시작한다
새 봄의 기미를 알아채고는
제 몸에 혈관을 트는 것이다
물길을 트는 것이다
물그릇에 잠가두면
뿌리가 내리고 검푸른 줄기가 잎과 함께 돋는데
고구마 순이 자라는 만큼
그 혈관과 물길로
새싹에 줄기에 젖줄을 대는 것이다
넌출이 무성하게 뻗은 어느날
정작 고구마 덩이는 그 안이 텅 비게 된다
기꺼이 그것 때문에 몸 바칠 수 있다면
그 푸른 잎들을 고구마의 경전이라고 해야 옳다
껍질만 쭈글쭈글 내려앉은 그것을 이제
더 이상 고구마라 부르지 않는다
어느 새 앞 장의 경전이 뒷장에게
그 잎이 또 그 뒷장에게
그리하여 긴 탯줄을 이루어
고구마를
한 계절 너머의 어느 세상에 전해주었던 것이다

 

 


-계간『서정시학』(2005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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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잎 경전


박해람

 


물가에 버드나무 한 그루

제 마음에 붓을 드리우고 있는지

휘어 늘어진 제 몸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휙휙 낙서를 써 갈기고 있다.

어찌 보면 온통 머리를 풀어헤치고

헹굼필법의 머리카락 붓 같다

발 담그고 머리 감는 갠지스 강의

순례객 같기도 하고

 

낙서로도 몇 마리의 물고기를

허탕치게 하는 재주도 부럽고

낙서하기 위해

몇십 년을 허공으로 오른 다음에야 그 줄기를

늘어뜨릴 줄 아는 것도 사실 부럽다.

 

쓰자마자 지워지는

저만 아는 낙서 경전

지우고 또 지우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지며 흐를 뿐이지만

물 묻은 제 마음이 물 묻은 제 문장을 읽는

제가 저를 속이는 독경

 

지구의 모든 문장이 저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참 대책 없다.

 

 

 

-시집『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사내』(램덤하우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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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경전


김해자

 


산모퉁이 하나 돌 때마다
앞에서 확 덮치거나 뒤에서 사정없이 밀쳐버리는 것
살랑살랑 어루만지다 온몸 미친 듯 흔들어대다
벼랑 끝으로 단숨에 떨어져 버리는 것
안을 수 없는 것 저 붙잡을 수도 가둘 수도 없는 것
어디서 언제 기다려야 할 지 기약할 수조차 없는 것
애비 애미도 없니 집도 절도 없이 광대무변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허공에 무덤을 파는,
영원히 펄럭거릴 것만 같은 무심한 도포자락
영겁을 쓰고도 한 자도 새기지 않은 길고긴 두루마리
몽당 휩쓸고 지나가고도 흔적 없는
저 헛것 나는 늘 그의
첫 페이지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

 

 

 

-시선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9』(국립공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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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그릇 경전

 

이덕규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잡념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드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그르렁 물어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마음대로 제 밥그릇을

가지고 놀 수 있을가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 있는,그 경전

꼼꼼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조주선사와 어느 학인과의 선문답

 

 

 

ㅡ시집『밥그릇 경전』(실천문학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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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경전

 

박해림

 

 

엎드려야 보이는

온전히 몸을 굽혀야 판독이 가능한 전典이 있다

서 있는 사람의 눈에 읽힌 적 없는

오랜 기록을 갖고 있다

묵언의 수행자도, 맨발의 현자도 온전히 엎드려야만

겨우 몇 글자를 볼 뿐이다

어느 높은 빌딩에서 최첨단 확대경을 들이대고

글자를 헤아려 들었지만

번번히 실패하였다

일찍이 도구적 인간의 탄생 이후

밤새 달려야만 수평선을 볼 수 있다고 믿게 되면서

바닥은 사람들에게서 점점 멀어졌던 것이다

온전히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울긋불긋 방언을 새겼던 것이다

빗물이 들이치고 폭풍이 몰아치면서

웅덩이가 패었고 글자들이 합해졌거나 떨어져나가

텍스트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일생을 대부분 엎드려 산 사람은

상형문자가 되어버린 이 경전을

판독해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손끝으로 감아올리는 경전經典의 구와 절에

바닥이 힘껏 이빨을 박고 있어 애를 먹을 뿐이라는 것이다

  

 

 
―시집『바닥경전 』(나무아래서,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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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경전

 

김일태

 

 

나무가 수행자처럼 길을 가지 않는 것은

제 스스로가 수많은 길이기 때문이다

 

나무가 날지 않아도 하늘의 일을 아는 것은

제 안에 날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입을 다물고 있다고 침묵한다 말하지 마라

묵언으로 통하는 나무의 소리가 있다

 

나무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말하지 마라

제 몸으로 모든 것을 기록하는 나무의 문자가 있다

 

그러한 이유로 나무에게 함부로 말하지 마라

가지지 않았기에 나무는 경계 없이 우거져 산다

 

 

 

―시집『코뿔소가 사는 집』(시학,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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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꾸리 경전

 

강수니

 

 

어릴 적 어머니는

타래실 양팔에 끼워주며 팽팽히 힘주라고 하셨네

마주보고 그 실을 다 감는 동안

팔이 아래로 처질 때마다

늘어진 실은 풀리지 않는 법이라고

사람 사는 것도 그 같은 이치라고 하셨네

 
첫애기 둘러업고 울면서 친정 갔을 때

매섭게 돌려세우며 포대기 뒤로 밀던 말

눈물도 실패에 감아두어라

야문 실꾸리 되고 나면

한 발씩 풀어먹고 사는 날 있을 게다

 

크고 작은 실패(失敗)는

실패에 감아올려 실꾸리가 되고

그 실꾸리 한 발씩 한 발씩 풀어내어

홈질로 또박또박 걸어 나와서

바람 새는 마음마다 휘감기로 붙이고

실밥 삭는 위기를 박음질로 메우며 살았네

 

감고 푸는 중중연가*

실꾸리 경전이 법문이었네

아득히 어머니의 하늘 시간 가에서

쓰고 남은 실꾸리 꺼내 보이면

이것밖에 못 풀고 살았냐고 야단하실 것이네

 

 
 *중중연가 : 불교에서 말하는 무겁고 큰 연기법.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는 우주만물의 인연법.

 

 


―시집『실꾸리 경전』(나무아래서,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