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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석 - 부서진 활주로 / 강변 유원지 1 / 초록의 길 / 대가천 2 ―은어낚시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10. 4.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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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부서진 활주로


이하석

 


활주로는 군데군데 금이 가, 풀들
솟아오르고, 나무도 없는 넓은 아스팔트에는
흰 페인트로 횡단로 그어져 있다. 구겨진 표지판 밑
그인 화살표 이지러진 채, 무한한 곳
가리키게 놓아 두고.


방독면 부서져 활주로변 풀덤불 속에
누워 있다. 쥐들 그 속 들락거리고
개스처럼 이따금 먼지 덮인다. 완강한 철조망에 싸여
부서진 총기와 방독면은 부패되어 간다.
풀뿌리가 그것들 더듬고 흙 속으로 당기며.
타임지와 팔말 담배갑과 은종이들은 바래어
바람에 날아가기도 하고, 철조망에 걸려
찢어지기도 한다, 구름처럼
우울한 얼굴을 한 채.


타이어 조각들의 구멍 속으로
하늘은 노오랗다. 마지막 비행기가 문득
끌고 가 버린 하늘.

 

 

 

(『투명한 속』문학과지성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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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 유원지 1


이하석

 

 

강물에 반쯤 몸 담그고, 사이다 병은

주둥이 속으로 속의 작고 깊은 하늘을

내보인다. 햇빛 속에서, 병 속의 물과

강물은 같이 썩는다. 물결이 뜨거운 모래를 적시며

기어올라 깡통 하나를 물 밖으로 밀어낸다.

붉은 녹물을 흘리며, 깡통에는 몇 개의 이즈러진

글자와 숫자가 지워지고 있다. 사랑의

표시일까, 그것을 이젠 해독할 수 없다.

 

엉겅퀴꽃 그늘에 숨어들던 눈을 치뜨고

여자는 발로 모래를 헤집으면서,

강가에 선 남자의 맨발을 눈부시게

바라본다. 남자 양말 구겨져 던져진 모래밭 위,

여자의 그림자가 짧게 흔들린다. 햇빛 속에서

남자의 발 밑에서 강물은 뒤척인다. 아지

랭이로 뜨거움은 피어오르고.


대여섯 명의 남녀의 웃음이 어우러져

피어오르는 술집. 탁자 밑으로 구두와 하이힐은

부딪치고 여자들의 스타킹은 구겨진다.

소주와 사이다와 콜라 사이를 지글대며

솟아오르는 돼지고기 구이 연기 속으로 마릴린

몬로의 젖은 거대한 입술이 보인다. 낙서로 얼룩진

입술은 찢어져, 그 구멍 속으로 먼지 낀 유리창 밖

두 남녀가 모래의 아지랭이 속에서 흔들리며

맨발로 만나는 것이 보인다. 그들의 가슴을 지나

싸구려 여인숙이 보이고, 강물의 더러운 깊이 속,

어딘가에서 새어나오는 혼곤한 신음 소리가

들린다.

 

 

 

(『김씨의 옆얼굴』문학과지성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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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의 길


  이하석

 

 

  때때로 가벼운 주검이

  아주 가까운 데서 만져지는 수가 있다.

  11월의 오후, 차고 마른 풀잎들이 모여 있는

  도시 변두리 또는 도심의 공터의

  푸른 빛이 먼지와 함께 흩어지는 곳에서.


  방아깨비 한 마리를 내가 사는 아파트의 빈터에서 서성대다 발견했다. 아이들의 노래소리 가까이 그 주검은 아무도 몰래 버려져 있었다. 바랭이풀의 마른 잎 사이에서 서걱이는 것을, 처음에 나는 빈터 멀리서 날아온 은사시나무 가로수의 마른 잎인 줄 알았다. 그것은 속날개였다. 바깥을 덮었던 초록 외피의 튼튼한 겉날개는 떨어져 나가고, 속날개는 끝이 찢긴 채 몸체에 겨우 붙어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렸다. 흡사 죽어간 방아개비의 몸을 떠나, 방아개비의 초록 영혼을 이 도시의 하늘 위로 날리려는 것처럼. 통통했던, 미세한 물결무늬로 마디를 이루었던 배는 벌레에게 뜯겨나가, 속이 비어 있었다. 머리 역시 반쯤 뜯겨 나가, 속이 비어 있었다. 껍질뿐인 몸으로 바람에 조금씩 날개 파닥이며 닳아갔다. 우리가 사는 도시의 밑바닥에는 칼날의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댔다. 나는 풀밭을 계속 걸어다녔다. 잠시 후 풀섶 아래서 풀무치의 주검을 보았다. 이어서 여치와 잠자리의 주검들을 보았다. 그러나 이 주검들 앞에서 애통해 할 까닭은 없다.


  가난하게 떨어져 땅에 눕는
  내 시간의 따스한 집이여 주검이여
  살아 있던 날들의 모든 기억을 고마워하며
  우리 함께 여기에 눕느니
  내 존재의 끝이자 시작인 너의 가슴에
  지금 고요히 누워 있느니


  풀무치와 방아개비, 여치, 잠자리들은 그들의 빛나는 날개로 여름을 분주히 날았고, 어쩌다 이곳까지 왔었고, 죽을 때가 되어서 죽은 것이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이 아파트의 가까운 이웃이 죽었을 때, 애통해하는 가족들의 울음 속으로 여치 울음이 끊임없이 들렸음을 나는 슬퍼한다. 죽은 이는 밧줄에 묶여 지상에 내려가 장의차를 타고 도심을 빠져나갔다. 이 도시와 산을 눈물로 이은 길을 만들면서. 또 나는, 사랑하는 이를 그릴 때 풀벌레의 울음을 끊임없이 들어야 하는 길고 고적한 밤도 보냈다. 내가 발견한 풀벌레의 주검들은 그 때 내 영혼을 흔들던 그것들이었으리라. 지금은 모든 풀벌레 소리도 끊기고, 밤은 너무나 고요하다. 모든 풀벌레들의 울음은 죽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 하나 하나가 온 길을 비로소 찾아 나설 마음이 인다. 풀무치는 초록의 집을 따라, 산이나 들에서 이 도시 변두리의 빈터로 이어졌으리라. 그 다음엔 우리가 모르는 풀에서 풀로 이어진 길이 풀무치르르 미세하게 이끌었으리라. 그렇다, 이 도심의 회색 콘크리트의 세계에도 자세히 보면 ―― 풀무치의 눈으로 보면 ―― 들과 산으로 이어진 초록의 길이 있다. 아무도 찾으려 하지 않는 그런 신비한 길이. 단순하게 자연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우리 삶 속에는 그렇게 열린 길이 있다.

 

 

 

(『우리 낯선 사람들』세계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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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천 2
―은어낚시


이하석

 

 

나는 은어를 본다.
물의 힘줄 속에 그것들의 길이 있다.
물의 힘줄을 은어들이 당겨 강이 탱탱해진다.

나는 은어를 본다.
강의 힘줄이 내 늑간근에도 느껴진다.
그밖에 중요한 것은 없다.
 

나는 은어를 본다,
언어에 기대어서.
이건 물론 중요한 게 아니다.
 

누가 강의 힘줄을 풀어놓느냐.
강에는 은어가 올라와야 한다.
그밖에 중요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측백나무 울타리』문학과시성사. 1992)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