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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 그릇 / 겨울 노래 / 음악 / 열매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10. 9.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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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그릇


오세영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節制)와 균형(均衡)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理性)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히서 성숙하는 혼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사랑의 저쪽』. 미학사. 1990)
1992년>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5』(조선일보 연재, 2008)
 


 

*조선일보애 연재된 시에는 제목이 <그릇1>로 되어 있고 한국문학선집에는 제목이 <그릇>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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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노래


오세영

 


산자락 덮고 잔들
산이겠느냐.
산 그늘 지고 산들
산이겠느냐.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아침마다 우짖던 산까치도
간데 없고
저녁마다 문살 긁던 다람쥐도
온데 없다.
길 끝나 산에 들어섰기로
그들은 또 어디 갔단 말이냐.
어제는 온종일 진눈깨비 뿌리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내리는 폭설.
빈 하늘 빈 가지엔
홍시 하나 떨 뿐인데
어제는 온종일 난(蘭)을 치고
오늘은 하루 종일 물소릴 들었다.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어리석은 꿈』. 시와시학사. 1999)
 

 

구룡사시편(龜龍寺詩篇)·겨울노래


오세영

 


산자락 덮고 잔들
산이겠느냐.
산 그늘 지고 산들
산이겠느냐.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아침마다 우짖던 산까치도
간 데 없고
저녁마다 문살 긁던 다람쥐도
온 데 없다.
길 끝나 산에 들어섰기로
그들은 또 어디 갔단 말이냐.
어제는 온종일 진눈깨비 뿌리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내리는 폭설(暴雪)
빈 하늘 빈 가지엔
홍시 하나 떨 뿐인데
어제는 온종일 난(蘭)을 치고
오늘은 하루 종일 물소리를 들었다.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제4회 정지용문학상』.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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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오세영

 


잎이 지면
겨울 나무들은 이내
악기가 된다.
하늘에 걸린 음표에 맞춰
바람의 손끝에서 우는
악기.


나무만은 아니다.
계곡의 물소리를 들어보아라.
얼음장 밑으로 공명하면서
바위에 부딪쳐 흐르는 물도
음악이다.


윗가지에서는 고음이,
아랫가지에서는 저음이 울리는 나무는
현악기,
큰 바위에서는 강음이
작은 바위에서는 약음이 울리는 계곡은
관악기.


오늘처럼
천지에 흰 눈이 하얗게 내려
그리운 이의 모습이 지워진 날은
창가에 기대어 음악을
듣자.


감동은 눈으로 오기보다
귀로 오는 것,
겨울은 청각으로 떠오르는 무지개다

 

 

 

(『어리석은 헤겔』. 고려원.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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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오세영

 


세상의 열매들은 왜 모두
둥글어야 하는가.
가시나무도 향기로운 그의 탱자만은 둥글다.


땅으로 땅으로 파고드는 뿌리는
날카롭지만,
하늘로 하늘로 뻗어가는 가지는
뾰족하지만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


덥썩
한입에 물어 깨무는
탐스런 한 알의 능금
먹는 자의 이빨은 예리하지만
먹히는 능금은 부드럽다.


그대는 아는가.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어리석은 헤겔』. 고려원. 199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