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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 윤동재 - 사십(四十) / 나태주 - 사십 / 복효근 - 마흔 / 이영주 - 사십세 / 박후기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9. 2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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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윤동재

 

 

야간 대학 국문과 1학년

고전 문학의 이해 시간

국문과 신입생 가운데

올해 나이 딱 사십인

중학교 3학년 딸까지 둔

주부 학생 이숙자 씨가

떡 버티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시간 강사만 십 년째라는

박 아무개 시간 강사가

여자 나이 사십이면

장승도 돌아보지 않는다고 하는

옛말이 있다고 소개하자

주부 학생 이숙자 씨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신입생 여학생들이

여자 나이 사십이면

장승도 돌아보지 않는다고 하니

언니는 큰일이네요

언니는 큰일이네요 하며

진지하게 걱정을 해 주자

주부 학생 이숙자 씨가 한마디 하기를

장승이니까 안 돌아보지?

장승이니까 어떻게 돌아보겠니?

 

 

 

―시집『대표작』(지식산업사, 2008)
―월간『좋은생각』(2012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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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四十)


나태주

 


1
이제부터는 내리막

비탈길이다.

빠른 걸음으로 가야 하는 길이다.

가진 것은 없지만 그래도

버리면서 버리면서

가야 하는 길이다.

 

 

2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걸

갖지 못하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걸

누리지 못하는 건

섭섭한 일이다.

 

더구나 남들이 다 버리는 걸

버리지 못하고 사는 건

답답한 일이다.

 


3
물은 흘러간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며 흘러간다.

 

물은 울며 간다.

내가 버리지 못하는 것을

버리며 울며 간다.

 

그러나 물은

외톨이라는 점에서

나와 같다.

 

 

4
모든 사람으로부터 받는 찬사는

찬사가 아니다.

동지로부터 받는 찬사도

찬사가 아니다.

그것은 욕설이요 소음이요

낭떠러지로 가는 눈먼 길이다.

 

 

 

―시집『빈손의 노래』(문학사상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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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복효근

 

 

이마에 손을 세워
손 차양을 하고서도
잘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멀리 있느냐
아니면 너무 가까운 것이냐
햇살이 눈을 찔러와도 부시지 않던 세상이
이제 너무 부셔서
실눈을 뜨고
손 차양을 하고
가까이 있는 꽃잎도
멀리 구름도
세상이 두루 곡진하다
이쯤이면 애인이여
시방은 내 눈시울 가까이 와도 좋겠다
그대 슬픔도 한숨소리마저도
너무 눈부시겠다

 

 


―시집『새에 대한 반성문』(시와시학,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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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흔

 
  이영주
 

 

  내가 가는 곳은 홀로 떨어져서 조금씩 떠내려가는 곳 가지 않아도 이미 세계의 끝이라는 문장을 쓰고 있다 아, 그렇다면 세계의 모든 괴물 중에 내가 제일 큰 괴물

 

  다른 생물을 보기가 두려워라 햇빛이 쏟아지면 울고 싶고 눈물을 말려줄 빛의 입자가 퍼지는 순간

 

  꿈속에서 죽은 죽은 오빠가 손을 잡았지 아직은 살아서 야근을 하고 있던 오빠였는데 심장에서 나무뿌리가 돋아나는 꿈

 

  죽는 꿈을 꾸고 살아가는 순간들도 있다 비오는 오늘은 오른쪽 가슴이 아프다 핏줄이 점점 불거지는 왼쪽에게 전해질까 봐 밤에만 비명을 지른다 모든 왼쪽은 못 듣는 언어를 갖고 싶어

 

  심장에 있는 뼈가 아픈건가?

  심장에도 뼈가 있어?

  이제 집으로 가자 통증이 있는 곳

 

  몸속의 어둠을 키우느라 어둠 속에서 떨고 있는 마음을 보지 못한다 추락할수록 담담해지는 세계가 있다

 

 

 
ㅡ계간『문예중앙』(201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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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십 세

 

  박후기

 


  날아가는 새의 그림자를 본 적 있는가.

 
  한순간도 머물지 못하고 날아가는 새의 그림자, 같은 시간을 살았다. 마흔 살에 이르렀을 때, 나는 비로소 이생을 가로질러 빠르게 날아가는 내 그림자를 보게 되었다.


  그림자는 허공에 뜬 나보다 먼저 진흙탕 속에 발을 담갔다. 나의 부리는 동족의 누란을 겨누었고, 입 안에 감춰진 작고 날카로운 혀는 연인(戀人)의 가슴에 상처를 입혔다.


  나는 분주한 초침의 속도를 지나 어느덧, 느린 분침의 속도로 도 익숙하게 시간 속을 날 수 있게 되었다. 비탈진 강안(江岸)을 오르내리며 선악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했다.


  죽은 새의 그림자를 본 적 있다.


  비로소 그림자와 하나 된 죽은 새의 주검이 햇빛조차 무겁다는 듯 조금씩 제 그림자를 덜어내고 있었다. 정든 몸을 허물고 있었다. 죽은 새의 그림자가 가슴에 깃을 꽂은 채 사라졌다.


  나는 진흙 위에 발자국을 남겼다. 발자국들은 생각의 무게만큼 깊었고, 실의에 빠진 두 발은 번갈아가며 각오를 다졌다. 그림자를 움켜쥔 발자국은, 차라리 집착에 가까웠다.

 

 

 

―계간『문학수첩』(2009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