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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화엄(華嚴)에 오르다 / 동두천 1 / 소금바다로 가다 / 침묵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9. 13.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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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화엄(華嚴)에 오르다


김명인

 


어제 하루는 화엄 경내에서 쉬었으나
꿈이 들끓어 노고단을 오르는 아침 길이 마냥
바위를 뚫는
천공 같다, 돌다리 두드리며 잠긴
山門을 밀치고 올라서면 저 천연한
수목 속에서도 안 보이는
하늘의 운판(雲板)을 힘겹게 미는 바람소리 들린다
간밤에는 비가 왔으나, 아직 안개가
앞선 사람의 자취를 지운다, 마음이 구절양장(九折羊腸)인 듯
길을 뚫는다는 것은
그렇다, 언제나 처음인 막막한 저 낯선 흡입
묵묵히 앞사람의 행로를 따라가지만
찾아내는 것은 이미 그의 뒷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무엇이 이 산을 힘들게 오르게 하는가
길은, 누군들에게 물음이
아니랴, 저기 산모롱이 이정표를 돌아
의문부호로 꼬부라져 우화등선(羽化登仙)해 버린 듯 앞선 일행은
꼬리가 없다, 떨어져도 떠도는 산울림처럼
이 허방 허우적거리며 여기까지 좇아와서도
나는 정작 내 발의 티눈에 새삼스럽게 혼자 아픈가
길섶 풀물에 든
낡은 經소리 한 구절 내내 떨쳐 버리지 못해
시큰대는 발자국마다 마음 질척거리는데
화엄은 화음 속에 얼굴을 감추고 하루종일
굴참나무 잔가지에 얹히는 경전을 들어 나를 후려친다

 

 


(『물 건너는 사람』. 세계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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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 1


김명인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우리가 내리는 눈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
역두(驛頭)의 저탄(貯炭) 더미에 떨어져
몸을 버리게 되더라도
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
서럽지는 않으리라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
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
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
발 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


그리고 덜미에 부딪혀 와 끼얹는 바람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은 알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으리라
안으로 굽혀지는 마음 병든 몸뚱이들도 닳아
맨살로 끌려가는 진창길 이제 벗어날 수 없어도
나는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떠나야 되돌아올 새벽을 죄다 건너가면서

 

 


(『동두천』. 문학과지성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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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바다로 가다


김명인

 


내 몸이 소금을 필요로 하니, 날마다 소금에 절어가며
먹장 매연 세월 썩는 육체를 안고 가는 여행 힘에 겹네
썩어서 부식토가 되는 나뭇잎이 자연을 이롭게 한다면
한줌 낙엽의 사유라도 길바닥에 떨구면 따뜻하리라
그러나 찌든 엽록의 세상 너덜토록
풍화시킨 쉰 살밖에 없어
후줄근한 퇴근길의 오늘 새삼 춥구나
저기, 사람이 있네, 염전에는 등만 보이고
모습을 볼 수 없는 소금 굽는 사람이 있네
짜디짠 땀방울로 온몸 적시며
저물도록 발을 딛고 올라도 늘 자기 굴헝에 떨어지므로
꺼지지 않으려고 수차를 돌리는 사람, 저 무료한 노동
진종일 빈 허벅만 퍼올린 듯 소금 보이지 않네
허나, 구워진 소금 어느새 썩는 살마다 저며와 뿌옇게
흐린 눈으로 소금바다 바라보게 하네
그 눈물 다시 쓰린 소금으로 뭉치려고
드넓은 바다로 돌아서게 하네

 

 

 

(『물 건너는 사람』. 세계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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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김명인
 

 

긴 골목길이 어스름 속으로

강물처럼 흘러가는 저녁을 본다

그 착란 속으로 오랫동안 배를 저어

물살의 중심으로 나아갔지만, 강물은

금세 흐름을 바꾸어 스스로의 길을 지우고

어느덧 나는 내 소용돌이 안쪽으로 떠밀려 와 있다

그러고 보니, 낮에는 언덕 위 아카시아 숲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어둠 속이지만

아직도 나무가 제 우듬지를 세우려고 애쓰는지

침묵의 시간을 거스르는

이 물음이 지금의 풍경 안에서 생겨나듯

상상도 창 하나의 배경으로 떠오르는 것,

창의 부분 속으로 한 사람이

어둡게 걸어왔다가 풍경 밖으로 사라지고

한동안 그쪽으로는

아무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우연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 침묵은 필경 그런 것이다

나는 창 하나의 넓이만큼만 저 캄캄함을 본다

그 속에서도 바람은

안에서 불고 밖에서도 분다

분간도 안 될 정도로 길은 이미 지워졌지만

누구나 제 안에서 들끓는 길의 침묵을

울면서 들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길의 침묵』. 문학과지성사. 1999)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