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고은
64년 전 고향 할미산에 올라갔다 나는 열심이었다
도마뱀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내 머리빡 흉터도 번쩍 놀랐다
멀리 비행장에서
쌍엽비행기가 떴다
그 비행장 너머로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다
그뒤로 고향 떠나
무등산
월출산
대둔산
백운산
소백산 비로봉
내장산
가야산
오대산
팔공산
영축산
금정산을 올라갔다
북한산 도봉을 올라갔다
44년 전 강화 마니산에 올라가
하룻밤 덜덜 떨며
두 길 중
한 길을 시작했다
종교냐
문학이냐
35년 전 한라산에 올라갔다
온통 바다였다
24년 전 한라산에 올라갔다
30년 전 설악산 대청봉
20년 전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갔다
백무동으로 내려왔다
15년 전
중앙 히말리야
카일라스산 6천 3백 미터쯤 올라갔다 나는 반송장이었다
체중 11킬로그램이 빠져버렸다
원고지 백장이
원고지 열장으로 팍 줄어들었다
10년 전 장백산에 올라갔다
7년 전 백두산에 올라갔다
7년 전 백두산 장군봉에 올라갔다
2년 전 또 백두산에 올라갔다
뜨는 해 지는 달이
하늘에 함께 있었다
내려오며
북의 작가 몰래 울었다
내가 오른 산꼭대기들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텅 비어 있었다
단 한마디도 없었다
괜히 나만
무엇무엇무엇을 잔뜩 가지려 하고 있었다
나의 탐욕이 아니라면
나 또한 텅 비어 있을 것이다
부끄럽구나
우리집에 걸려 있는 내 옷들의 텅 빈 주머니들이
아니 백화점 오층
양복들의 텅 빈 주머니들이
나의 내일일 것인가 아닐 것인가
-시집『허공』(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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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정재호
산을 배우려고
산에 오른다
가까이 갈수록
멀어지는 산의 얼굴
한 하늘 우러르며
몇 겁을 살고 있다
꽃바람이 스쳐도
머리끝만 흔들 뿐
옴짝 않는 산의 마음
새소리 물소리에도
귀먹은 체 멍하니 서 있다.
종일 헤매어도
산은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는 것은
철 늦은 진달래 꽃가지뿐
산은 안개 속에
얼굴을 감춘다
-시집『그 말 한마디』(그루,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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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박이문
초록은 초록
끝이 없는 땅의 파동
여전히, 살아 있는
끝없이 펼쳐진 청아한 지평
하늘과 땅 그 사이에 있는
거기 나는 서 있다
이 모든 것을 노래하며
열린
자유, 그리고 하나
―시집『부서진 말들』(민음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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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산행
임영조
사람이 그리운 날
사람을 멀리하고 산에 오른다
오르면 오를수록 상승하는 곳
색이 공일까? 공이 색일까?
이 세상 날고 기던 목숨들
종당에는 산으로 가기 마련
그러니까 등산은 사전답사 같은 것?
인파 넘치는 관악산 피해
매봉에 올라 야호! 고함 한번 지르고
다시 청계산 올라 천공(天空)을 받는다
그제서야 법어로 돌아오는 메아리
네가 산이다! 네가 부처다!
떨갈나무 차일 친 오솔길 가노라면
찔레꽃이 하얀 지등을 켜고
자, 여기를 보세요!
때죽나무 꽃초롱 조리개 열고
일제히 터뜨리는 플래시 세례
(우상은 늘 외눈박이 편견들이 세웠다!)
연초록물 번지는 잡목림 사이사이
버짐처럼 허옇게 핀 산벚꽃
색이 넘치면 보는 눈도 가렵다
밤나무가 되려다 만 너도밤나무
아직도 숙제를 못해 왔는지
손 들고 벌 서는 아이처럼 멋쩍다
자꾸만 키들대는 제비꽃 무리
(너희들도 신세대니?)
그러도 보니 어느새 나도
사람 벗은 한 마리 나비였구나
어느 경전 위에 앉아도 두렵지 않은……
뻐꾹새가 불현듯
내 마음 빈터로 날아들어
뻐꾹뻐꾹 뻑뻐꾹 방점을 찍는다
이제 그만 환속하라고?
-임영조 시전집『그대에게 가는 길 2(제4시집)』(천년의 시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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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산행
임영조
더위 먹은 수캐처럼 헐떡거리며
내가 여름 산에 당도하니
산은 이미 막달 찬 임부였다
간밤에 내린 비로 뒷물 막 끝낸
서늘하고 향긋한 냄새
홀리듯 계곡으로 몸 들이민다
(그럼 이내 섹시한 허리 꿈틀
아무나 받아줄 줄 알았지?)
그러나 여름 산은 내색이 없다
까닭 없이 변심한 애인처럼
표정 참 냉랭하고 무겁다
(이 머쓱한 화상을 어디 감추지?)
에라, 웃통을 홀랑 벗고 내가 눕는다
누워서 산을 받는 이 쾌감!
왜 몰랐을꼬? 이 손쉬운 열락을!
이 아음 나 세상 뜰 때도
옳거니, 무릎 치듯 문득 떠나리
내내 기척 없던 매미들
쑤왈쑤왈 범어로 염불하는
저 아래 으슥한 숲 속
조루증의 사내들 대여섯이
시근땀 뻘뻘 개고기를 뜯는다
나무아미타불? 비호같이 내려가
모조리 산 채로 어흥! 관세음보살!
여름 한낮 꿈이 비리다.
-임영조 시전집『그대에게 가는 길 2(제4시집)』(천년의 시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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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산행
임영조
청 하늘 워낙 높고 고요하시니
우러러보는 것도 누될까 싶다
마침내 자중하는 가을 산
그래도 난감한지 안색이 붉다
(솔직히 말하자면 누구나
스스로 낯 뜨거운 삶이 있을 것)
저 공평한 가을볕에 내 생을 널면
마지막 얼룩은 무슨 색일까?
욕계일까 색계일까 무색계일까?
궁금한 생각이 산문을 민다
정상이 빤히 뵈는 지척 같은데
길은 오를수록 숨 가쁘고 험하다
가파른 능선 먼저 오른 억새꽃
하얀 웃음소리 산을 흔든다
기척에 놀란 청설모 한 쌍
남은 해를 서둘러 꼬리로 잰다
덩달아 분주해진 마음 두리번
가을 숲을 엿본다, 와! 말년에 모여
너나없이 거나한 동창회 같다
중년에 돌연 풍 맞은 생처럼
열에 들떠 상기된 단풍나무 숲
저런 ! 온몸에 시너 끼얹고
지금 막 분신중인 산이 뜨겁다
오, 장엄한 다비식이여!
그 황홀한 화염 속에
내 정신 함께 던져 태우고
맨몸으로 가볍게 내려오는 길
잠시 올려다본 남녘 하늘 멀리
기러기 떼 끼룩끼룩 저녁놀 몰고 온다
제 이름 밑에 언더라인 치듯
일렬종대로 점점점(點點點) 멀러져 간다.
-임영조 시전집『그대에게 가는 길 2(제4시집)』(천년의 시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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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행
임영조
눈 오다 그친 일요일
흰방석 깔고 좌선하는 산
아무리 불러도 내려오지 않으니
몸소 찾아갈 수밖에 딴 도리 없다
가까이 오를수록, 산은
그곳에 없다, 다만
소요하는 은자의 처소로 남아
오랜 침묵으로 품(品)을 세울 뿐
어깨는 좁고 엉덩이만 큰 보살
도량이 워낙 넓고 깊으니
나무들은 제멋대로 뿌리를 박고
별의별 짐승까지 다 받아주며
이승의 마지막 대자대비여!
뾰드득
뽀드득 잔설을 밟고
숨가쁘게 비탈길을 오르면
귀가 맑게 트이는 법열이여!
잡목들이 받쳐든 푸른 하늘에
간간 수묵을 치는 구름
눈짐 진 노송이 문득
잘 마른 화두 하나 던지듯
옛다! 솔방울을 떨군다
덤불 속 멧새들이 화들짝 놀라
재잘재잘 산경을 읽는 소리
은유인지 풍자인지 아니면 해학인지
들어도 모를 난해시 같다
(좌우간 정상에 있을 때 몸조심하고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
더욱 조심하도록)
귀뺨을 때리는 눈보라여!
단지 헝클어진 마음이나 벗으러
겨울 산을 오르는 나는
리얼리스트인가?
로맨티시스트인가?
그것이 알고 싶어 산에 오른다.
-임영조 시전집『그대에게 가는 길 2(제4시집)』(천년의 시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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