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다/황동규-나는 바퀴를 보면 안 굴리고 싶어진다/김기택-이제 바퀴를 보면 브레이크 달고 싶다/윤재철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11. 23. 12:23
728x90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다


황동규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자전거 유모차 리어카의 바퀴
마차의 바퀴
굴러가는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가쁜 언덕길을 오를 때
자동차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길 속에 모든 것이 안 보이고
보인다, 망가뜨리고 싶은 어린날도 안 보이고
보이고, 서로 다른 새떼 지저귀던 앞뒷숲이
보인고 안 보인다, 숨찬 공화국이 안 보이고
보인다, 굴리고 싶어진다. 노점에 쌓여있는 귤,
옹기점에 엎어져 있는 항아리, 둥그렇게 누워 있는 사람들,
모든 것 떨어지기 전에 한 번 날으는 길 위로.

 

 


-시집『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문학과지성사, 1978)


---------------------------------------
나는 바퀴를 보면 안 굴리고 싶어진다


김기택

 


하루 종일 내가 한 일은
바퀴 굴린 일
할 일 없는 무거운 엉덩이를 올려놓고
무늬가 다 닳도록 바퀴나 굴린 일

 
미안하다
무슨 대단한 일이나 있는 줄 알고
시키는 대로 좆 빠지게 돈 바퀴들에게
뜨겁고 빵빵한 바퀴 속에서
터지지도 못하고 무작정 돈 둥근 공기들에게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문학행사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꽃나무들
늘 뚫려 있어서 심심한 구멍들을 채우느라
괜히 비운 밥그릇과 술잔들


이토록 먼 곳까지 왔으니
시인으로서 뭔가는 남겨야 하겠기에
문학적인 체취가 은은하게 묻어나는 사인처럼
정성껏 남기고 온 똥오줌


미안하다
배부른 엉덩이 밑에서
온몸으로 필사적으로 뺑뺑이 돈 바퀴들에게

 

 

 

―격월간『유심』(2010년 7-8월호)

 

----------------------------------
이제 바퀴를 보면 브레이크 달고 싶다

 

윤재철

 

 

바퀴는 몰라

지금 산수유가 피었는지

북쪽 산기슭 진달래가 피었는지

뒤울안 회나무 가지

휘파람새가 울다 가는지

바퀴는 몰라 저 들판

노란 꾀꼬리가 왜 급히 날아가는지

 
바퀴는 모른다네

내가 우는지 마는지

누구를 어떻게

그리워하는지 마는지

그러면서 내가 얼마나 고독한지

바퀴는 모른다네

 

바퀴는 놀라

하루 일 마치고 해질녘

막걸리 한 잔에 붉게 취해

돌아오는 원둑길 풀밭

다 먹은 점심 도시락 가방 베개하여

시인도 눕고 선생도 눕고 추장도 누워

 
노을 지는 하늘에 검붉게 물든 새털구름

먼 허공에 눈길 던지며

입에는 삘기 하나 뽑아 물었을까

빙글빙글 토끼풀 하나 돌리고 있었을까

하루해가 지는 저수지 길을

바퀴는 몰라

 
이제 바퀴를 보면 브레이크 달고 싶다

너무 오래 달려오지 않았나

 

 

 

―시집『거꾸로 가자』(삶창,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