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
채호기
터지고 부서지는 태양의 파편이
지상의 모든 사물을 뜨겁게 익힐 때도
어둠의 창자 속에서 나온
뱀의 몸은 차디차다
기름 단지에 빠졌다
나온 것처럼
손아귀에 잘 잡히지 않는 뱀의
길고도 미끄러운 화사한 징그런 몸
구멍의 어둠 속에서 나와 어둠의 구멍 속으로
들락날락하는
온갖 사물의 몸 속의 암흑을 탐사하는
구불구불하고 예민한 영혼이여!
뜨거운 여름 그토록 차가운 뱀이
나무의 터진 구멍으로 완벽하게 사라지듯
내 몸은 뱀처럼 그대의 끓는 어둠 속으로
빨려들 듯 숨어버리느니
이제 없다! 나는
몸 밖의 그대여
이 세상에서 나를 찾으려거든
그대 캄캄한 몸 속을 들여다보라
(『지독한 사랑』. 문학과지성사. 1992)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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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탕에 찍힌 바퀴 자국
이윤학
진흙탕에 덤프트럭 바퀴자국 선명하다.
가라앉은 진흙탕 물을 헝클어뜨린 바퀴 자국 선명하다.
바퀴자국 위에 바퀴 자국.
어디로든 가기 위해
남이 남긴 흔적을 지워야 한다.
다시 흔적을 남겨야 한다.
물컹한 진흙탕을 짓이기고 지나간
바퀴자국, 진흙탕을 보는 사람 뇌리에
바퀴 자국이 새겨진다.
하늘도 구름도 산 그림자도
바퀴 자국을 갖는다.
진흙탕 물이 빠져 더욱
선명한 바퀴자국.
끈적거리는 진흙탕 바퀴 자국.
어디론가 가고 있는 바퀴 자국.
(『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문학과지성사. 2003)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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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花蛇)
서정주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크다른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몽뚱어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낼롱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안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보다. 꽃대님보다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섹시, 고양이 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화사집』. 남만서고. 1941:『미당 시전집』. 민음사. 199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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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시편 6
김형영
뱀보다 더 아름답게 우는 것은 없다
뱀은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다만
스스로를 동여매며 운다
땅 밑으로 밑으로 달아나며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라고
가슴을 치며 통곡할
거룩한 손도 없이
뱀은 스스로를 동여매며
온몸으로 운다.
뱀은 나의 오랜 친구로서
친구인 나는 뱀에게 말했다
가거라, 울부짖음아
죄지은 내 심장의 고동과도 같고
습관처럼 가슴을 치는
내 더러운 손 같은 울부짖음아
가거라, 사람들이 모여
너를 죽이려고 막대기를 들기 전에.
오, 뱀이여
너는 아름다워 죄를 짓는구나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문학과지성사. 1992)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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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스라치다
함민복
뱀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을
뱀, 바위, 나무, 하늘
지상 모든
생명들
무생명들
―계간『애지』(2004년 가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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