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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영 - 따뜻한 봄날 / 통화 시편 6 / 모기 / 노루귀꽃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11. 13.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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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따뜻한 봄날
 

김형영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 핀 봄 날
어머니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봄구경 꽃구경 눈 감아버리더니
한 움큼 한 움큼 솔잎을 따서
가는 길바닥에 뿌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하시나요.
꽃구경은 안 하시고 뭐하시나요.
솔잎은 뿌려서 뭐하시나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
산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다른 하늘이 열릴 때』. 문학과지성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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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시편 6


김형영

 

 

뱀보다 더 아름답게 우는 것은 없다
뱀은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다만
스스로를 동여매며 운다
땅 밑으로 밑으로 달아나며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라고
가슴을 치며 통곡할
거룩한 손도 없이
뱀은 스스로를 동여매며
온몸으로 운다.


뱀은 나의 오랜 친구로서
친구인 나는 뱀에게 말했다
가거라, 울부짖음아
죄지은 내 심장의 고동과도 같고
습관처럼 가슴을 치는
내 더러운 손 같은 울부짖음아
가거라, 사람들이 모여
너를 죽이려고 막대기를 들기 전에.


오, 뱀이여
너는 아름다워 죄를 짓는구나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문학과지성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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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

 

김형영

 

 

모기들은 날면서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온몸으로 소리를 친다
여름밤 내내
저기,
위험한 짐승들 사이에서


모기들은 끝없이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살기 위해 소리를 친다
어둠을 헤매며
더러는 맞아 죽고
더러는 피하면서


모기들은 죽으면서도 소리를 친다
죽음은 곧 사는 길인 듯이
모기들,
모기들,
모기들,
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모기 소리로 소리를 친다
영원히 같은
모기 소리로……

 

 


(『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리를 친다』.문학과지성사. 19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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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귀꽃


김형영

 


어떻게 여기 와 피어 있느냐
산을 지나 들을 지나
이 후미진 골짜기에

바람도 흔들기엔 너무 작아
햇볕도 내리쬐기엔 너무 연약해
그냥 지나가는
이 후미진 골짜기에

지친 걸음걸음 멈추어 서서
더는 떠들지 말라고
내 눈에 놀란 듯 피어난 꽃아

 

 

 

(『낮은 수평선』. 문학과지성사. 200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