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다로의 연인들
강인한
독화살이 심장을 파고들어 마침내 숨을 끊은
콸콸 더운 피를 끄집어낸 곳, 여기쯤인가 부러진 뼈 한 도막
몇 날 몇 밤의 증오를 순순히 받아들인 곳
피는 굳고, 벌들이 찾던 꽃향기는 언제 희미해진 것일까
부릅뜬 눈으로 빨아들인 마지막 빛은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눈, 햇빛보다 부신 웃음이었다
껴안은 팔에서 부서져 내리는 허무한 흙덩이
잘 가라, 우리들 포옹 아래로 흘러가는 시간이여
눈보다 희고 부드러운 시간들이여
꿀처럼 달고 보드라운 당신의 입술은
아름다운 노래를 버리고 어디로 갔나 만토바의 하늘을 스치는
한 덩이 구름, 한 줄기 놀빛으로 산을 넘어
서늘한 밤의 대기가 되고
내 온몸을 거울처럼 담아 빛나던 당신의 눈은
벌써 여름밤 별자리로 찾아가 맑게 빛나고 있거니
부패라는 것, 오 망각이란
가시 많은 사람살이에 얼마나 고마운 벗일 것인지
오랜 망설임 끝에 다가가서
한 점 한 점 불타는 기쁨으로 땀흘리던 육체는
기꺼이 벌레의 밥이 되고 다시 흩어져 희미한 슬픔으로
흐르다 올리브나무 수액이 되고, 더러는 바람에
무심한 바람에 팔랑이는 올리브나무 잎새가 되었다
잠도 천 년, 다시 또 몇 천 년이 꿈결 같았다
무서운 살육의 전설도 기억에서 지워지고
수많은 파란이 지나가고 난 뒤
문득 깨어난 아침이 웬일인가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침묵으로 말하노니
손대지 마라, 우리들 기나긴 사랑의 포옹을
비가 오고 눈이 오는 곳, 빗발치는 편견을 법으로 세우는 곳이라면
우리 이대로 다시 몇 천 년이라도 견디고 견딜 것이니.
―격월간『유심』(2009년 3-4월호)
―웹진 시인광장 선정『2009 올해의 좋은시 300選』(2009, 아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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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다로의 연인
김세형
살은 썩고 사랑의 골격만 남았다
그들은 사랑의 뼈까지 사랑했다
단죄의 독화살이 이브의 가슴에 안긴
붉고 탐스런 능금을 관통했으나
아담은 독배를 마시듯
독 묻은 그 붉은 능금을 받아먹고는
죽어가는 이브를 가슴에 꼬옥 껴안은 채
입가에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죽어갔다
시간의 모래흙 속에서
사랑의 골격만 쓸쓸히 드러났지만
그들은 결코 뜨거운 포옹을 멈추지 않았다
신神은 죄진 그들을 동산에서 쫓아냈으나
그들의 사랑을 말릴 수는 없었다
오천 년 동안이나 말릴 수 없었다
* 발다로의 연인 - 이탈리아 북부 만토바 인근 발다로에서 오쳔 년 전 신석기 유적을 발굴하던 고고학자들이 찾아냈다고 한다. 치아 상태로 미뤄 젊은이로 추정되는 둘은 서로 얼굴이 닿을 듯 가까이 마주 본 채 남자는 화살이 박힌 채로 팔다리를 얽고 있었다
―시집『찬란을 위하여』(황금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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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김정임
두 팔은 대지를 향했고 낮게 뜬 구름 둘러앉아 그림자 드리우네
빛이 떠나버린 눈은 떡갈나무 서성이는 여름 강을 기억하네
날이 어두워지자 돌계단에 서서 습관처럼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 듣네
오목한 나뭇잎이 대지의 공복을 채우기 위해 바람에 흩어지네
잠깐 사랑한 것 같은데 얼굴 없는 사랑니만 남았네
반짝이며 생의 어두컴컴한 통로를 외등처럼 밝히네
태아를 품은 골반 그 어디쯤 흐느껴 울던 심장의 윤곽에 어스름이 깔리네
말없이 흘러내리는 이 느낌이 무얼까 싶을 때는
수만 년을 흘러갔다 흘러온 루시의 자기장이 너의 가슴에 간절히 닿은 순간이네
여름 내내 강물은 한곳으로만 흐르네
너의 그리운 세월 속으로 네 눈물 타고 루시가 돌아오네
*루시: 350만 년 전에 존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의 화석.
―계간『문학과 창작』(201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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