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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 - 정호승 / 이문재 / 강미정 / 정은기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10. 29.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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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


정호승

 


산 입에 거미줄을 쳐도

거미줄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거미줄에 걸린 아침 이슬이

햇살에 맑게 빛날 때다

송이송이 소나기가 매달려 있을 때다

 

산 입에 거미줄을 쳐도

거미줄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진실은 알지만 기다리고 있을 때다

진실에도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진실은 기다림을 필요로 한다고

조용히 조용히 말하고 있을 때다

 

 

 

―시집『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비,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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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


이문재
 


거미로 하여금 저 거미줄을 만들게 하는
힘은 그리움이다


거미로 하여금 거미줄을 몸 밖
바람의 갈피 속으로 내밀게 하는 힘은 이미
기다림을 넘어선 미움이다 하지만
그 증오는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어서
고요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팽팽하지 않은 기다림은 벌써
그 기다림에 진 것, 져버리고 만 것


터질 듯한 적막이다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

 

 

 

―시집『산책시편』(민음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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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미줄


  강미정

 


  거미줄이 심하게 흔들린다, 기다려야 한다, 거미줄이 심하게 퍼덕인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거미줄이 심하게 헝클어진다, 아직은 좀더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한다, 심하게 흔들린 거미줄이 멈춘다, 심하게 퍼덕이던 거미줄이 멈춘다, 심하게 헝클어진 거미줄이 멈춘다, 거미는 심하게 흔들린 고통을 먹는다, 거미는 심하게 퍼덕인 고통을 먹는다, 거미는 심하게 걸려든 고통을 먹는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고통을 먹는다, 천천히 거미가 되는, 고통은 언제나 흔들린다, 흔들리는 고통은 언제나 배가 고프다, 배고픔에 걸린 고통은 언제나 달콤하다, 달콤한 고통은 언제나 골과 뼈를 빤다,

 

  나는 걸려들지 않으려고 버둥거린다,

 

 

 

―계간『시와 사상』(200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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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미줄


  정은기

  

 

  당신, 어젯밤에는 고양이가 담을 넘다가 거미줄에 걸리는 사건이 있었
어요 다른 시간으로 훌쩍 뛰어넘고 싶었다고 진술하더군요 거미들이 다
리 한쪽을 다 먹어치우기까지 구조대가 도착하지 않아 제가 가서 구출해
주었답니다 아무리 아침을 맞아도 벌레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당신은
카프카를 원망하곤 했잖아요 저를 바라보는 고양이의 눈을 보는 순간 당
신의 말이 떠올랐답니다
 

  포식한 거미들이 어찌나 빠르게 불어나던지 주머니 속에도, 콧구멍에
도, 달팽이관에서도 떼를 지어 기어 나오고 있었어요 여기저기 알을 슬
어 밤새 가려웠습니다 머릿속까지 긁어대느라 당신 생각을 할 수 없었어
요 다행스럽게도 치명적인 독은 검출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이대로
고치를 틀고 있기로 했답니다 어차피 외로움으로 실을 풀어 집을 짓는
일에 익숙하니까요
 

  저 편으로 걸쳐 있는 거미줄은 따뜻한 물에 잉크가 번지는 모습만큼이
나 매혹적이었습니다 이 동네 고양이들은 매일 밤 그 아름다움 때문에
담을 넘었다고 하니까요 모두 외로운 녀석들이어서 저 편의 다른 시간을
살고 싶었다고 야단입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곧 저도 당신이
있는 저 편으로 몸을 풀고 건너 갈 테니까요

 

 


―계간『미네르바』(2012.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