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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 이재무 / 김기상 / 강연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10. 24.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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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이재무 

 


한밤중 늙고 지친 여자가 울고 있다
그녀의 울음은 베란다를 넘지 못한다
나는 그녀처럼 헤픈 여자를 본 적이 없다
누구라도 원하기만 하면 그녀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 그녀 몸 속엔
그렇고 그런 싸구려 내용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녀의 몸엔 아주 익숙한
내음이 배어 있다 그녀가 하루 24시간
노동을 쉰 적은 없다 사시사철
그렁그렁 가래를 끓는 여자
언젠가 그녀가 울음을 그칠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그녀들처럼 흔한 것도 없으니
한밤중 늙고 지친 여자가 울고 있다
아무도 그 울음에 주목하지 않는다
살진 소파에 앉아 자정 너머의 TV를
노려보던 한 사내가 일어나
붉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그녀에게로 간다
그녀 몸속에 두꺼운 손을 집어넣는다
함부로 이곳저곳을 더듬고 주물럭댄다
 

 

 

―시집『푸른 고집』(천년의 시작,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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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김기상

 

 

만 사십년이 지났다, 세상은
썩지 않고
얼지 않을 만큼의 적정온도로
나를 저장해 온 것이다.


앞으로가 문제다
신선도가 많이 떨어져서
웃거나 울지 않아도 주름이 접힌다.
그간에 기술수준이 높아져 신선도뿐만 아니라
숙성기능까지 갖추었다고는 하나
적은 량의 술로도 쉽게 취하고
몸과 마음 전반적인 발기기능도 예전 같지 않다.
병들지 않고
죽지 않을 만큼의 절대온도
절대기능의 개발이 시급하다. 숙성기능도 아직은 형편없어서
단맛은 고사하고 시금털털 사람들 인상을 구겨놓기 일쑤다
뜨거우면 뜨거운 대로 차면 찬대로 제 맛을 내는 물
맛이면 좋겠다.


썩지 않고 얼지 않게
내 안에 세상을 품어보고 싶은 것이다

 

 

―시집『푸르륵 참』(시로여는세상,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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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강연호

 


누군가 들판 농수로에 내다버린 냉장고
여름 다 가도록 그대로 있다
지난 봄과 달라진 건 이제 문을 활짝 열어
제 속을 온통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비탈에 비스듬히 누운 자세가 제법 선정적이다
다들 지나치면서 얼굴을 찌푸리지만 다만 그뿐
치우라고 누가 신고 좀 하지 다만 그뿐
민원 접수가 없으니 일 만들기 싫은 관청에서도
다만 그뿐, 계절만 또 바뀌나 보다
저렇게 문 열어놓으면 음식들 다 상할텐데
무엇보다 전기세 만만찮을 텐데
사람들이 혀 빼무는 줄을 아는지 모르는지
냉장고는 웅웅웅 밤낮으로 돌아간다
들판을 건너가는 바람이 모터 소리를
이쪽 아파트 단지까지 실어 나른다
바람은 빨래 빨래는 집게 집게는 입 입은 침묵
말잇기 놀이에도 심심한 냉장고
하늘에 풀칠하다 시들해진 냉장고
웅웅웅 들판을 두들기다 지친 냉장고
그의 골똘한 생각은 사실 이렇다
전기 코드라도 누가 빼어 주었으면 좋으련만

 

 

 

―월간『현대시』(2004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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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강연호

 

 

냉장고에는 방이 많다
냉동실과 냉장실 사이
위 칸과 아래 칸 사이
김치특선실과 신선야채실과 과일참맛실 사이
각얼음실과 해동실과 멀티수납실 사이
어디쯤의 중간 소음으로 막연하게
서로 눈 흘기는 아파트 같다
방이 많은 집은 춥다
밥 먹을 때만 각자 문을 열고 나와
수저는 입으로
눈은 TV로
묵묵 식사가 끝나면 다시 각자의 방으로
서둘러 들어간다
문은 언제나 쾅 닫히는데
다들 냉골에 떤다
냉장고는 방이 많아도 가난하다
가난은 마음만 아궁이 앞이란 말이다
냉장고는 잠도 없다
온종일 끙끙 앓거나 웅웅거린다
송곳니를 세운 얼음조각들이 달그락거린다
냉장고는 아무나 열지 못한다
코끼리가 가끔 드나들었다는 전설이
공룡 발자국처럼 남아있을 뿐이다


아주 큰 냉장고만 들판에 큰대자로 드러누워
비로소 활짝 문을 열어젖히고
방이란 방은 죄다 트고
세상 모르고 잔다

 

 

 

―계간『창작과 비평』(2012년 겨울호)
―이은봉·김석환·맹문재·이혜원 엮음『2013 오늘의 좋은시』(2013, 푸른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