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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후기의 울림을 주는 시 한 편 (1 ~153 ) - 목록과 시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11. 4.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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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 ~ 153) - 목록과 시  

 

 

 

001 김종삼 - 민간인(民間人)

002 함민복 - 긍정적인 밥

003 마르틴 니묄러 - 그들이 처음 왔을 때

004 오규원 - 죽고 난 뒤의 팬티
005 황지우 -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006 김중식 - 이탈한 자가 문득

007 박정대 -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008 이덕규 - 연애질

009 장석남 - 얼룩에 대하여

010 송경동 - 사소한 물음에 답함

011 이정록 - 의자

012

013 박소란 - 용산을 추억함

014

015 한우진 - 북

016

017 정우영 - 황로

018 류시화 - 붉은 잎

019 박해람 - 病書

020 박후기 - 복서 2

021 고  은 - 문의(文義)마을에 가서
022 함성호 - 벚꽃 핀 술잔

023 박용래 - 저녁눈

024 장경린 - 開花 -김영태 시인에게

025 이창기 - 수인선 철도

026 김사인 - 바짝 붙어서다

027 홍문숙 - 파밭

028 고  영 - 달팽이 집이 있는 골목

029 권혁재 - 단디해라

030 전윤호 - 이제 아내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

031 하  린 - 야구공을 던지는 몇가지 방식
032 오주리 - 침시의 침대

033 정호승 - 마음의 준비

034 기형도 - 백야(白夜)

034 성윤석 - 지상에서 2

035 최갑수 - 밀물 여인숙

036 김요일 - 체 게바라에게
037 최승자 - 봄

038 윤중호 - 본동일기 넷 -본동에 내리는 비

039

040 김선우 - 이런 이유

041 최명란 - 내 친구 야간 대리운전사

042 유종인 - 봄의 강가

043 이윤택 - 참나무

044 김  륭 - 치약

045 황규관 - 예감

046 이영광 - 가나안

047 김소월 - 신앙

048 황병승 - 춤추는 언니들, 추는 수밖에

049 김  산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050 마종기 - 겨울 이야기

051 전연옥 - 멸치

052 도종환 -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053 이   안 - 나비 4

054 하상만 - 간장

055 이시영 - 어머니 생각

056 안주철 - 오동나무 아래서

057 이성목 - 쓸쓸한 환유

058 베르톨트 브레히트 -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059

060 강은교 - 풀잎

061 조용미 - 삼베옷을 입은 自畵像

062 박석수 - 술래의 잠

063 천서봉 - 납골당 신축 감리일지

064 박재삼 - 울음이 타는 강

065 박  철 -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066 임성용 - 하늘 공장

067 고정희 - 상한 영혼을 위하여

068

069 장영수 - 自己 自身에 쓰는 詩

070 킴벌리 커버거 -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071 김광규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072 도종환 - 덕담

073 임희구 - 1964

074 서규정 - 金堤

075 최승호 - 대설주의보

076 최영미 - 백화점 가는 길

077 안미옥 - 나의 고아원

078 김도연 - 당신

079 이인원 - 천천히 먹어 라는 말은

080 김어영 - 감기

081 윤의섭 - 꽃의 탄생

082 최  준 - 겨울 동화처럼 마을에도

083 박성현 -  폭염

084 이선균 - 섭패

085

086 오철수 - 밤목련

087 전영관 - 울화

088 김정웅 - 역세권

089 김소연 - 반대말

090

091

092 신미나 -부레옥잠

093

094

095

096  

097  최문자 - 파밭

098  이면우 - 화엄경배

099  김수복 - 고목 한 그루

100 신동엽 - 산문시(1)

101 김경미 - 청춘이 시킨 일이다

102 이용임 - 평창 민박

103 이현승 - 친애하는 사물들

104 이시가와 다쿠보쿠 - 주먹

105 박남준 - 화살나무

106 전다형 - 달팽이

107 이인철 - 관통

108

109 김주대 - 형편대로

110 황지우 - 꽃말

111 채상우 - 血書

112

113 타다토모 - 하이쿠

114 서산대사 -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115 서영식 - 납이다

116 이해존 - 녹번동

117

118

119 이서화 - 바람 조문

120 최형심 - 겨울은 철거를 기다린다

121 봄을 찾아 - 작자 미상

122 정호승 - 손에 대한 예의

123 서안나 - 애월, 혹은

124 김유석 - 골목의 자유

125 조유리 - 흰 그늘 속, 검은 잠

126 조인선 - 그날 이후

127 박수현 - 복사뼈를 만지다

128  미야자와 겐지  - 비에도 지지 않고 

129

130

131 최영철 - 고독한 사람

132 조용숙 - 문단속

133 귄터 아이히 - 비가 전하는 소식

134 박  철 - 버리긴 아깝고

135 백은선 - 자매

136

137

138

139 권민경- 자매의 맛

140 박도희 - 나의 빈티지

141 오명선 - 돌의 잠

142 이주언 - 서랍이 달린 여자

143 김종철 - 고백성사 -못에 관한 명상 1

144 김현서 - 칸타타 사탕가게

145 박상천 - 살아남은 자의 기

146 안희연 - 몽유산책

147 이돈형 - 패(牌)

148

149 김혜선 - 녹턴

150 안영선 - 더덕북어

150 김정란 - 꽃의 신비

151

152 김인자 - 숙호에서 길을 잃다

153 박후기 - 동백, 대신 쓰는 투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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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간인(民間人)


김종삼

 


1947년 봄
심야(深夜)
황해도 해주(海州)의 바다
이남(以南)과 이북(以北)의 경계선(境界線) 용당포(浦)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兒)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용인신문. 2010년 06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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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긍정적인 밥

 

함민복

 

 

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2』(용인신문. 2010년 06월 21일)
―시집『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창비.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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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들이 처음 왔을 때  

 

  마르틴 니묄러(1892~1984)
 

 

  그들이 처음 왔을 때 마르틴 니묄러 나치가 공산당원에게 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뒀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노동조합원에게 갔을 때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유태인에게 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나에게 왔을 때 항의해 줄 누구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3』(용인신문. 2010년 06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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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죽고 난 뒤의 팬티

 

  오규원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者도 아닌 죽은 者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4』(용인신문. 2010년 07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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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황지우

 


初經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 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일간『황인숙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5』(용인신문. 2010년 07월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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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탈한 자가 문득


  김중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6』(용인신문. 2010년 07월19일)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68』(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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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박정대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달리는 소리, 위그르, 위그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7』(용인신문. 2010년 0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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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연애질

 

이덕규

 

 

북조선에선 남녀가 사귀는 걸 두고 연애질이라고 한다는데, 연애질!
그 질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게 보여
삽질 가래질 쟁기질 써래질 호미질 낫질로 일구어낸 만 평 푸른 보리밭 물결이 보이고
휘영청 달빛 젖은 이랑 사이로 밤새 축축하게 걸어놓은 물방아 소리 들려오는데
누가 거기 대고 손가락질을 하겠어
뭔가 질퍽대고 싶은 게 사랑인데
흘끔흘끔 곁눈질만 하다가 깔짝깔짝 입질만 하다가 돌아서는 당신
어디 이걸 낚시질이라 할 수 있겠어
핏대 세우고 삿대질만 해대는 당신들 쌈질은 발길질 주먹질로 걸어야지
연장 있으면 뭐해 연장질을 해야지
애정 전선에 균열이 생기면 즉시 구멍 난 냄비나 솥단지 때우듯
물 샐 틈 없이 온몸으로 땜질을 해야지
열흘 굶고도 도적질할까 말까 망설이는 당신 말이야
그 우라질 마음만 있으면 뭐하냐구, 몸이 떠나는데 그걸 뭣에다 쓰냐구 젠장!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8』(용인신문. 2010년 08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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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얼룩에 대하여


장석남

 


못 보던 얼룩이다

한 사람의 생은 이렇게 쏟아져 얼룩을 만드는 거다


빙판 언덕길에 연탄을 배달하는 노인
팽이를 치며 코를 훔쳐대는 아이의 소매에
거룩을 느낄 때


수줍고 수줍은 저녁 빛 한 자락씩 끌고 집으로 갈 때
千手千眼의 노을 든 구름장들 장엄하다


내 생을 쏟아서
몇 푼의 돈을 모으고
몇 다발의 사랑을 하고
새끼와 사랑과 꿈과 죄를 두고
적막에 스밀 때


얼룩이 남지 않도록


맑게
울어 얼굴에 얼룩을 만드는 이 없도록
맑게
노래를 부르다 가야 하리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9』(용인신문. 2010년 0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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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송경동

 


어느 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 하지 않겠느냐고 찾아왔다
얘기 끝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 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오?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해방전선에 함께 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 영광과 함께 하지 않았다


십 수 년이 지난 요즈음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다물결에 밀리고 있고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
걷어차인 좌판과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0』(용인신문. 2010년 08월 23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24』(동아일보. 2013년 07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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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1
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라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데
의자 몇 개 내 놓는 거여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1』(용인신문. 2010년 08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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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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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용산을 추억함


박소란

 

 

폐수종의 애인을 사랑했네,
중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용산우체국까지
대설주의보가 발효된 한강로 거리를 쿨럭이며 걸었네
재개발지구 언저리 함부로 사생된 먼지처럼
풀풀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도시의 몸 구석구석에선 고질의 수포음이 새어나왔네
엑스선이 짙게 드리워진 마천루 사이 위태롭게 선 담벼락들은 저마다
붉은 객담을 쏟아내고 그 아래 무거운 날개를 들썩이던
익명의 새들은 남김없이 철거되었네
핏기 없는 몇 그루 은행나무만이 간신히 버텨 서 있었네
지난 계절 채 여물지 못한 은행알들이
대진여관 냉골에 앉아 깔깔거리던 우리의 얼굴들이
보도블록 위로 황망히 으깨어져갔네
빈 거리를 머리에 이고 잠든 밤이면 자주 가위에 눌렸네
홀로 남겨진 애인이 흉만(胸滿)의 몸을 이끌고 남일당 망루에 올라
오, 기어이 날개를 빼앗긴 한 마리 새처럼
지옥불 일렁이는 아스팔트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쳐가는 불온의
미몽이 사이렌처럼 머릿속을 낭자하게 물들였네
상복을 입은 먹구름 떼가 순식간에 몰려들었네 깨진 유리창 너머
파편 같은 눈발이 점점이 가슴팍에 박혀왔네
한숨으로 피워낸 시간 앞에 제를 올리듯
길고 긴 편지를 썼으나 아무도 돌아올 줄 모르고
봄은 답장이 없었네 영영
애인을, 잃어버린 애인만을 나는 사랑했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3』(용인신문. 2010년 09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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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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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북


  한우진


   아버지는 북이다 한 번도 북을 두드려 보지 못하고 북을 향해 누웠다 나는 생전의 아버지 앞에서 한 번도 북을 위로 놓고 지도를 펴보지 않았다 북을 발밑에 깔고 남으로 서울을 지나 괴산, 충주를 손톱으로 눌렀다 피 묻히고 얼룩진 자리가 고향이 아닌가요, 나는 우기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북을 따듯한 남쪽으로 그리워했다 형편없는 마당이었지만 목련은 피었다 목련은 남을 등지고 북으로만 꽃을 피웠다 아직 맺히지도 못한 나는 아버지 등을 돌려 보세요, 이쪽이 따뜻한걸요, 남풍이 불어도 아버지는 북을 향해 단추를 풀었다 북창이 많은 집일수록 아버지는 값을 높게 쳐주었다 내가 북리(北里)에 편지를 써대기 시작할 무렵 북관에서 새들이 날아올랐다 그것 보렴, 두드릴 수 있다니깐 그러나 새들은 얼음덩어리로 북적거렸다 아버지는 누가 두드려 주지 않는 북처럼 윗목에 놓여졌다 아직도 아버지는 북이다 어김없이 올해도 나는 북을 향해 아들과 함께 절을 하였다 아버지 북 받으세요,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5』(용인신문. 2010년 10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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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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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황로

 

정우영

 

 

독도 사는 황로의 배를 가르자
물고기가 아니라 작은 새들이
오밀조밀 뱃속에 숨어 있었다.
황로가 콕콕 찍어 삼키기도 전에
작은 새들은 스스로 원해서
황로의 부리를 밀고 쏙쏙 뛰어들었다 했다.
적당히 삭은 작은 새들은
새근새근 단숨을 내쉬면서
뱃속이 참 나른하다고 말했다.
내가 다시 조심스레 황로의 배를 꿰매자
황로는 트림하듯 부리를 벌렸고
나는 냅다 부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제 그만 세상과의 소통은 접고
나도 어딘가 나른한 곳에 숨어서
적당히 삭아지고 싶은 것이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7』(용인신문. 2010년 10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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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病書

                                                                                    
  박해람


 

  약봉지를 접어 내게 보낸 편지에
  그대의 병력(病歷)이 붙어 있다
  심신에 색(色)이 들어 그늘에도 못 들고 있다고 쓰여진 문장은 기침이 심하다
  만추에 앉아서 받는 病書라니
  우울한 그늘 한 자락은 도무지 잎을 떨굴 줄 모르니
  그 그늘에도 차가운 얼음이 얼 것이네


  여기 잠깐 그대의 필체를 들려줄라치면…


  국진의 그늘에도 서리가 내리는 요즘 무탈하신가. 나는 여름 내내 풀지게를 지고 휘청거렸다네. 내 거처에는 온통 약봉지뿐이니 이렇듯 오후에 그것도 자네가 좋아하는 석양의 한 때를 빌려 보내는 友書에도 약봉지를 쓰는 것을 이해해주시게. 나는 내 몸이 전생에 온갖 약을 싸던 봉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네. 허연 김으로 한 때의 독을 다 빼낸 물렁한 약을 싸던 약봉지. 무릇, 세상에서 덮던 이불이 수의(壽衣)가 되는 것 아닌가. 모든 색이 다 흙 속으로 돌아가듯 나도 내 거처쯤 궁금하여 오늘은 이제 돌아가도 되냐고 빈 묵정밭에게 물어보고 온 참이네.


  흰 색은 세상의 독이니
  내 몸에도 간간이 새치가 빠져 나온다네
  장자(壯子)의 젊은 손끝을 빌려 보낸 그대의 병서는
  뒤끝에 단 것이 필요한 문장이어서 한 번에 들이키지 못하고 읽었다네.


  세상의 모든 귀퉁이들을 모아 만든 것이 알약이어서
  내 몸에도 툭툭 부딪히는 소리가 시끄럽다네.
  한 사발 약기운조차 그대에게 보내지 못하고 얼음은 또 풀리고 말 것이네.
  미진한 약효와 벗하여 소일하는 일이 바쁘시겠네
  안부를 처방하여 답신을 보내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8』(용인신문. 2010년 11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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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잎


류시화

 

 

그리고는 하루가 얼마나 길고
덧없는지를 느끼지 않아도 좋을
그 다음 날이 왔고
그 날은 오래 잊혀지지 않았다
붉은 잎, 붉은 잎, 하늘에 떠가는 붉은 잎들
모든 흐름이 나와 더불어 움직여 가고
또 갑자기 멈춘다
여기 이 구름들과 끝이 없는 넓은 강물들
어떤 섬세하고 불타는 삶을 나는 가지려고 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졌었다, 그렇다, 다만 그것들은
얼마나 하찮았던가, 여기 이 붉은 잎, 붉은 잎들
허공에 떠 가는 더 많은 붉은 잎들
바람도 자고 물도 맑은 날에
나의 외로움이 구름들을 끌어당기는 곳
그것들은 멀리 있다, 더 멀리에
그리고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흐름이
그것들을 겨울하늘 위에 소용돌이치게 하고
순식간에 차가운 얼음 위로 끌어내린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9』(용인신문. 2010년 11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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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복서 2


박후기

 


지구의 스파링 파트너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삭월의 눈앞이 캄캄해진다


아들3은 실업자,
나비처럼 날아도 벌처럼 쏠 데가 없다
오늘도 집안을 겉돌며 눈치만 살핀다


꼭두새벽 집을 나서는 엄만
정류장까지 로드워크를 한다
아버지가 녹아웃 된 후
대신 엄마가 장갑을 끼고 매일
지옥의 링 위로 올라간다


아들3은
품속에 카운터블로를 숨긴 채
결정적인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달과 엄마처럼
숨죽이며 참고 견딘다


탐색전이 지나치면
식구들의 야유를 받는다
나가 싸우지 않는 아들3을 향해
아들1이 경고를 보낸다
도대체
누가 敵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이다


사랑했다고 치자,
아들1과 한 여자가
링 위에서 엉겨 붙는다
사랑도 결국
사람과 무관한 일이 되어 버린다


때리는 자와 맞는 자,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그로기 상태에 빠진 생이여
너에게 확,
수건을 던지고 싶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20』(용인신문. 2010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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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
 

고 은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소백산맥 쪽으로 벋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꽉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文義)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주(註) : 문의(文義)-충북 청원군의 한 마을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21』(용인신문. 2010년 11월 22일)
-시집『문의(文義) 마을에 가서』(1974 수록)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1974년>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7』(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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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벚꽃 핀 술잔


함성호

 


마셔, 너 같은 년 처음 봐
이년아 치마 좀 내리고, 말끝마다
그렇지 않아요? 라는 말 좀 그만 해
내가 왜 화대 내고 네년 시중을 들어야 하는지
나도 한시름 덜려고 와서는 이게 무슨 봉변이야
미친년
나도 생이 슬퍼서 우는 놈이야
니가 작부지 내가 작부냐
술이나 쳐봐, 아까부터 자꾸 흐드러진 꽃잎만 술잔에 그득해
귀찮아 죽겠어, 입가에 묻은 꽃잎이나 털고 말해
아무 아픔도 없이 우리 그냥 위만 버렸으면
꽃 다 지면 툭툭 털고 일어나게
니는 니가 좀 따라 마셔
잔 비면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보지 말고
술보다 독한 게 인생이라고?
뽕짝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술이나 쳐
또 봄이잖니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22』(용인신문. 2010년 1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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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저녁눈                                                       


박용래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23』(용인신문. 2010년 12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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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開花-김영태 시인에게


장경린

 

 

아들 목우(木雨) 결혼식에서
형님이 입은 가다마이는
소매가 삶은 호박잎처럼 흐늘흐늘했지요
삐딱하게 서서,
마땅히 둘 곳 없는 시선을
가봉하듯 늘어뜨리고


저는 속이 가벼워서
결혼이라는 걸 못해봤어요
블라우스 자락에 클립으로 집어놓은 메모 쪽지처럼
건들건들 사연들을 달고 있다 보면
어느 날 블라우스는 온데간데없고
허공에
홀로 꽂혀 있는 클립
철(鐵)꽃 같아요


사람 하나 간신히 비집고 올라갈 수 있는
중국집 개화(開花)의 목조 계단은
옛날보다 더 삐걱거려요
자장면 면발은 눈에 띄게 가늘어졌죠.
불황 탓이거니 여기고


싱싱한 양파나 한 접시 더 시켜 먹으면
그게 그겁니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24』(용인신문. 2010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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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수인선 철도


이창기

 


그렇게 왔다 가나부다 왜가리 갈대 북서풍과 청둥오리의 2월
스스로 독(毒)을 품게 하던 겨울의, 가난과 갈증의 새벽으로 가는
밤마다 몸서리치며 떨던 바다를 한 광주리씩 머리에 이고
고개 숙인 낙타처럼 또박또박 걷게 하는 하나뿐인 길


떠나는 사람들이 남기고 간 빵과 홀로 남은 여자의 헝클어진 머리 같은
그들이 버리고 간 추억이 깨진 소주병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불륜의 끊임없는 바퀴와 익숙한 체중을 못 잊어하는 옥수수밭에서
숨죽여 지켜보는 아이들의 뜨듯한 가랭이 같은 아직도 귀대면
중무장한 병사의 씩씩한 발자국 소리 같은 것이 오래도록 남아서
태업한 꿈속까지 이어지는 나는 수척한 햇빛에 이리저리 반사되며
얻어터지며 철길 위에 팔 벌려 수평을 잡으며 위태롭게 걷는다


그렇게 왔다 가나부다 70년대(年代) 배호 김종삼 그리고 너는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25』(용인신문. 2010년 1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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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바짝 붙어서다                          

 

김사인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빈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빼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바짝 벽에 붙어 선다
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저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 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 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싱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서 있을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메인다


방 한 구석 힘주어 꼭 짜 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26』(용인신문. 2010년 1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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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파밭


홍문숙

 

 

비가 내리는 파밭은 침침하다


제 한 몸 가려줄 잎들이 없으니 오후 내내 어둡다
다만
제 줄기 어딘가에 접혀있던 손톱자국 같은 권태가
힘껏 부풀어 오르며 꼿꼿하게 서는 기척만이 있을 뿐,


비가 내리는 파밭은 어리석다
세상의 어떤 호들갑이 파밭에 들러
오후의 비를 밝히겠는가
그러나 나는 파밭이 좋다


봄이 갈 때까지 못 다 미행한 나비의 길을 묻는 일은
파밭에서 용서받기에 편한 때문이다


어머니도 젊어 한 시절
그곳에서 당신의 시집살이를 용서해주곤 했단다
그러므로 발톱 속부터 생긴 서러움들도 이곳으로 와야 한다


방구석의 우울일랑은 양말처럼 벗어놓고서
하얗고 미지근한 체온만 옮기며 나비처럼 걸어와도 좋을,
나는 텃밭에서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한줌의 파를 오래도록 다듬고는
천천히 밭고랑을 빠져나온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27』(용인신문. 2011년 0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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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밭


홍문숙

 

 

비가 내리는 파밭은 침침하다
제 한 몸 가려줄 잎들이 없으니 오후 내내 어둡다
다만
제 줄기 어딘가에 접혀있던 손톱자국 같은 권태가
힘껏 부풀어 오르며 꼿꼿하게 서는 기척만이 있을 뿐,
 비가 내리는 파밭은 어리석다
세상의 어떤 호들갑이 파밭에 들러
오후의 비를 밝히겠는가
그러나 나는 파밭이 좋다
봄이 갈 때까지 못 다 미행한 나비의 길을 묻는 일은
파밭에서 용서받기에 편한 때문이다
어머니도 젊어 한 시절
그곳에서 당신의 시집살이를 용서해주곤 했단다
그러므로 발톱 속부터 생긴 서러움들도 이곳으로 와야 한다
방구석의 우울일랑은 양말처럼 벗어놓고서
하얗고 미지근한 체온만 옮기며 나비처럼 걸어와도 좋을,
나는 텃밭에서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한줌의 파를 오래도록 다듬고는
천천히 밭고랑을 빠져나온다

 

 

 

-신춘시『신춘문예 당선작』(세계일보,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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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달팽이 집이 있는 골목


고영

 


내 귓속에는 막다른 골목이 있고,
사람 사는 세상에서 밀려난 작은 소리들이
따각따각 걸어와
어둡고 찬 바닥에 몸을 누이는 슬픈 골목이 있고,
얼어터진 배추를 녹이기 위해
제 한 몸 기꺼이 태우는
새벽 농수산물시장의 장작불 소리가 있고,
리어카 바퀴를 붙들고 늘어지는
첫눈의 신음 소리가 있고,
좌판대 널빤지 위에서
푸른 수의를 껴입은 고등어거 토해놓은
비릿한 파도 소리가 있고,
갈라진 손가락 끝에
잔멸치 떼를 키우는 어머니의
짜디짠 한숨소리가 있고,
내 귓속 막다른 골목에는
소리를 보호해 주는 작고 아름다운
달팽이집이 있고,
아주 가끔
따뜻한 기도 소리가 들어와 묵기도 하는
작지만 큰 세상이 있고,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28』(용인신문. 2010년 0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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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단디해라


권 혁 재


 

가장 간절한 말이어서
짧다
가장 염려하는 말이기도 하여서
또 짧다


식전 첫차를 타고 객지로 떠나는
아들의 어깨 너머로
태초의 말씀처럼 건네는 한 마디
처음 나를 독립된 개체로 치켜세우면서
세상 속으로 밀어 넣던 어머니의 목소리


병상에서 흐린 눈빛으로 나누던
한 박자 끄는 울림이
두레박 닿는 메아리로 되돌아오고


솔갈잎을 긁는 듯한 유언은
애틋하고 간절한 말씀이 되어
짧게도,


니, 단디해라.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29』(용인신문. 2010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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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이제 아내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


전윤호


 

이삿짐을 싸는 데 익숙해진 그녀는
내가 없어도
쉽게 떠날 준비를 끝낸다
내 몫으로 남겨진 가구나 이불들은
너무 낡거나 무거워서
버리고 가도 괜찮은 것들이다
필요하다면 가볍게
그녀는 기르던 개도 이웃에 준다
함께 산 지난 오 년 동안 기른 머리를
새로 이사한 동네에서 싹둑 자른 그녀는
요즘 취한 내 옆에서 자지 않고
슬그머니 부엌으로 빠져나와
주소를 쓰지 않은 편지를 쓴다
송곳니가 빠진 날 무표정한 얼굴로
오래 살펴보면서
냉장고와 함께 밤을 새는 그녀는
낯설게 아름답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30』(용인신문. 2010년 01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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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야구공을 던지는 몇가지 방식

 
  하린

 
 

  직구 - 아버지
  소속팀을 또 옮겼다 군내 버스가 하루에 두 번만 들어오는 동네에서 우루과이라운드라는 새로운 규칙이 발효되자 방어율이 형편없었던 아버지가 마지막 생산의 밭을 자르고 도시 변두리로 이적료도 없이 옮겨갔다 주물공장으로 빨려 들어간 건조한 어깨가 은퇴를 예감하게 했다 뜨거운 쇳물에 발등이 데인 후 공의 구질이 너무 단순한 게 문제였다고 실토했다 직구만을 던지던 습성은 시즌 내내 흥행 없이 끝나고 말았다 아버지의 낡은 감독은 재래식 화장실에서 똥닦이로 사라져간 윤리교과서였다


  슬라이더 - 어머니
  원래 직구를 가장 잘 구사하는 사람은 어머니다 술 취한 아버지에게 얻어맞고도 끈질기게 땅만 팠다 논과 밭에 구사하는 느리고 정직한 구질은 진딧물 탄저병 태풍에게 쉽게 홈런을 허용했다 어머니도 변두리 식당으로 소속팀을 옮겼다 뻔한 직구 대신 반찬에 미원을 쓰며 변화구를 구사했다 손님들의 혓바닥은 방망이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어머니의 구질에 속아 넘어갔다 어머니는 한동안 집안에서 A급 선수로 인정받았다


  포크볼 - 형
  왼손잡이였다 형이 마운드에 들어서면 출루하는 놈들이 많았다 1군들만 모인다는 S대학교 도서관에서 철학책이나 들추다가 약삭빠른 놈에게 안타를 맞고 도루까지 허용했다 졸업도 하지 못한 채 강판 당했다 형은 소속팀을 떠나 지리산과 인도에서 전지훈련을 했다 6년 동안 형이 사라진 후 ‘제 3의 물결’이 밀려와 새로운 구질을 가진 젊은 선수들이 주목받았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광속의 구질을 형은 구사하지 못했고 2군으로 밀려나더니 결국 면사무소 말단 직원으로 떨어졌다


  커브 - 누나
  누나는 일찌감치 포수로 돌아섰다 인기가 많은 투수를 거부한 채 마을금고의 포수가 되었다 마을금고의 감독은 자꾸 변화구를 받아 내라고 주문했다 VIP 고객들은 누나의 미끈한 다리 사이에 입금하길 원했고 누나는 승률을 위해 적당한 편법을 동원했다 야간 경기도 서슴지 않았다 누나의 실적은 높아졌고 승진하여 곧 코치가 될 거라고 했다


  마구 - 나
나는 실업팀에 무명선수가 되었다 임시직을 반복하다 30대 중반을 넘겼다 아무리 기다려도 스카우트 제의는 없었다 정식 선수가 되는 걸 보지 못한 채 아버지가 죽던 날 승리의 기쁨인지 패배의 억울함인지 어머니만이 눈물을 흘렸다 형과 누나는 벌건 육개장 국물에 지루한 감정을 휘휘 저어 먹었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31』(용인신문. 2011년 02월 14일)
―시집『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문학세계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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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집시의 침대


  오주리

 

 

  서울은 시민들에게 잠자리를 주지 못한 죄의식으로 신도시라는 새로운 죄를 짓기 시작했다 서울의 변두리를 벗어나 언저리에 소외된 그림자들이 걷듯 아파트들이 서고 탈주의 끝이 철조망이듯 도로는 8차선이나 자유는 없다 그럼에도 집시들은 시민이란 이름과 잠자리에 감격하여 자유와 평등 그리고 투표권을 예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집시들은 투표일에 꼭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리거나 술 때문에 일어나지 못한 날이 하필 투표일이거나 한 것이었다


  신도시의 시멘트 냄새는 냉동실의 공기처럼 신선했다 그러나, 완성되지 못한 그림의 유화 물감 냄새 위로 제 때 가리지 못한 정액 냄새가, 완성되지 못한 노래의 오선지 위로 제 때 치우지 못한 토사 냄새가, 완성되지 못한 원고의 잉크 냄새 위로 제 때 숨기지 못한 대마초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돗물을 얼린 얼음처럼 무균질의 시민 의식을 지닌 시민들은 집시들로부터 시민이란 이름을 박탈하고 그들의 침대를 위생처리 하기로 할 수밖에 없었다


  집시들은 침대가 놓여 있던 도시를 잊고 다시 주민등록증이 필요 없는 노숙 생활로 돌아갔다 자유야 그들의 천성이었고 평등이야 그들에게 과분했다 시민은 그들의 이웃이었고 투표권은 대통령도 한 표이니 만족했다 집시들은 미완성작들을 위한 진혼 의식을 술과 노래의 밤들로 대신했다 그러나 집시의 아이들은 부모를 따라 그림과 시로 구걸하는 법을 배우면서도 밤이면 침대에서 자는 꿈을 그리고 또 그리는 것이었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32』(용인신문. 2011년 0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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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마음의 준비


정호승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런 말 더 이상 함부로 하지 마라
평생 마음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디 가서 만나 손을 잡고 걸어가나
이젠 정말 마음의 준비를 할 때가 됐나봐 오빠
이런 말도 다시는 듣고 싶지 않다
마음에 옷을 입히고 새벽이 되어야만
아버지가 길을 떠나고 눈이 내리나
나는 아직 시든 화분을 품에 안고 젖을 먹인다
너도 이제 그만 마음의 준비를 하거라
어머니는 맷돌에 콩을 갈던 저녁처럼 앉아
하늘을 바라본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33』(용인신문. 2011년 0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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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백야(白夜)


기형도


 

눈이 그친다.
인천(仁川)집 흐린 유리창에 불이 꺼지고
낮은 지붕들 사이에 끼인
하늘은 딱딱한 널빤지처럼 떠 있다.
가늠할 수 없는 넓이로 바람은
손쉽게 더러운 담벼락을 포장하고
싸락눈들은 비명을 지르며 튀어오른다.
흠집투성이 흑백의 자막(字幕) 속을
한 사내가 천천히 걷고 있다.
무슨 농구(農具)처럼 굽은 손가락들, 어디선가 빠뜨려버린
몇 병의 취기를 기억해내며 사내는
문 닫힌 상회(商會) 앞에서 마지막 담배와 헤어진다.
빈 골목은 펼쳐진 담요처럼 쓸쓸한데
싸락눈 낮은 촉광 위로 길게 흔들리는
기침 소리 몇. 검게 얼어붙은 간판 밑을 지나
휘적휘적 사내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 밤, 빛과 어둠을 분간할 수 없는
꽝꽝 빛나는, 이 무서운 백야(白夜)
밟을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눈길을 만들며
군용(軍用) 파카 속에서 칭얼거리는 어린 아들을 업은 채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34』(용인신문. 2011년 03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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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지상에서 2


성윤석


 

앞만 보고 갔다네
언제나 공사 중, 공사 중인 이 세상
맨홀에 빠질 뻔했다네
어두컴컴해서 배후가 보이지 않는 맨홀
우리는 누구나 그럴 수 있다네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고
집과 집을 잇는 송수관이 보였다네
그래도 나는 걷는다네
도처에 있을 맨홀
그래서 더 우리가 다치지 않는지도
모른다네 동굴 같고 다락 같고
요나의 고래 뱃속 같고
한번 멋모르고 빠지면 깊게
들어가 온몸이 망가지는 심연 같고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맨홀이
있을까 없을까 생각하며 산다네
한 번씩 뚜껑을 열고 세상을 쳐다보는
맨홀 내 심연은 어디로 갔나
여기에서 먼가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34』(용인신문. 2011년 03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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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밀물 여인숙 1


최갑수


 

더 춥다
1월과 2월은
언제나 저녁부터 시작되고
그 언저리
불도 들지 않는 방
외진 몸과 외진 몸 사이
하루에도 몇 번씩
높은 물이랑이 친다
참 많이도 돌아다녔어요,
집 나선 지 이태째라는 참머리 계집은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며
부서진 손톱으로
달을 새긴다
장판 깊이 박히는 수많은 달
외항을 헤매이는 고동 소리가
아련하게 문턱까지 밀리고
자거라,
깨지 말고 꼭꼭 자거라
불 끄고 설움도 끄고
집도 절도 없는 마음 하나 더
단정히 머리 빗으며
창 밖 어둠을
이마까지 당겨 덮는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35』(용인신문. 2011년 03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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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체 게바라에게

 

김요일


 

친구, 잘 있었나
어딘지 알려줄 순 없지만 국경 너머의 외곽 도시에 와 있네
벌써 몇 년 됐지 가끔 쓸쓸하기도 하다만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 술도 있고 여자도 있다네


주일이면 시골 성당 성가대에 앉아
Miserere mei*, Miserere mei 찬양하고 있어
세상을 살해하지도 못하고 떠돌다
이곳에 흘러든 건 혁명에 실패해서만은 아니지


인간은 용서받기 위해 존재하나 봐
결혼 한 번 못해본 검은 옷의 녀석들에게
고해를 하진 않지만
Miserere, miserere 화음을 맞추다 보면
불협의 대위법으로 어깃장 놓던
잔인하고 불량했던 진압군 시절마저 용서받는 기분이 드니까


성경책을 넘길 때 비릿한 슬픔이 책장에서 풍겨나는 까닭은
우리 손에 배었던 죄 냄새가 묻어있기 때문이야
신이 없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비밀,
눈이 마주치면 입가에 살짝 미소를 걸어주지


찾지 마 잊지도 마
이곳에서의 이름은 이방인 K,
아직 담배는 끊지 못했어

 

 

* ‘긍휼히 여기소서’라는 뜻의 라틴어.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36』(용인신문. 2011년 0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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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최승자


 

동의하지 않아도
봄은 온다.
삼십 삼 세 미혼 고독녀의 봄
실업자의 봄
납세 의무자의 봄.


봄에는 산천초목이 되살아나고
쓰레기들도 싱싱하게 자라나고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이
내 입안에서 오물이 자꾸 커 간다.
믿을 수 없이, 기척처럼, 벌써
터널만큼 늘어난 내 목구멍 속으로
쉴 새 없이 덤프트럭이 들어와
플라스틱과 고철과 때와 땀과 똥을
쿵 하고 부려놓고 가고


내 주여 네 때가 가까왔나이다
이 말도 나는 발음하지 못하고
다만 오물로 가득 찬 내 아가리만
찢어질 듯 터져 내릴 듯
허공에 동동 떠 있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37』(용인신문. 2011년 04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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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본동일기 넷
본동에 내리는 비


윤중호

 


성님, 모든 게 젖습니다.
아침마다
국립묘지를 다녀오시는, 옆집
할아버지의 보건체조가 젖고,
또 하루를 공친, 지하철 공사장 아저씨들의
담배 연기가
선술집에서 젖고,
보증금을 20만 원씩이나 넣은
내 삭월세 방 앞에 심어논
호박잎이 젖고, 그 뒤로
아무렇게나 버려진 공터의
풀잎이 젖고,
옆방 아저씨의 청승맞은 유행가도
따라 젖고, 젖다가는
한강물도 제법 뽀얀 물보라를 튀기면서
젖어갑니다.
성님, TV에서는 한강 수위가 어쩌구
말이 많지만, 제일한강교 위로
대낮에도 불을 켜고 씽씽 달리는 차를 보며
산동네 사람들은, 애기를 들쳐 업고 꾸적꾸적
물귀경갑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습니다.
무섭게 불어오르는 물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야 없지만
깜깜하도록 퍼붓는 장마비도
지랄맞고 눅눅한 산동네의 답답한 마음들은
적시지 못하는 모양이지요?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38』(용인신문. 2011년 04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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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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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이런 이유


김선우

 

 

그 걸인을 위해 몇 장의 지폐를 남긴 것은
내가 특별히 착해서가 아닙니다


하필 빵집 앞에서
따뜻한 빵을 옆구리에 끼고 나오던 그 순간
건물 주인에게 쫓겨나 3미터쯤 떨어진 담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그를 내 눈이 보았기 때문


어느 생엔가 하필 빵집 앞에서 쫓겨나며
드넓은 얼음장에 박힌 피 한 방울처럼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없이 적막했던 것만 같고-


이 돈을 그에게 전해주길 바랍니다
내가 특별히 착해서가 아니라
과거를 잘 기억하기 때문


그러니 이 돈은 그에게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나에게 어쩌면 미래의 당신에게
얼마 안 되는 이 돈을 잘 전해주시길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40』(용인신문. 2011년 0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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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내 친구 야간 대리운전사


최명란


 

늦은 밤
야간 대리운전사 내 친구가 손님 전화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은
꼭 솟대에 앉은 새 같다
날아가고 싶은데 날지 못하고 담배를 피우며 서성대다가 휴대폰이 울리면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솟대를 떠나 밤의 거리로 재빨리 사라진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또 언제 날아와 앉았는지 솟대 위에 앉아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그의 날개는 많이 꺾여 있다
솟대의 긴 장대를 꽉 움켜쥐고 있던 두 다리도 이미 힘을 잃었다
새벽 3시에 손님을 데려다주고 택시비가 아까워 하염없이 걷다 보면 영동대교
그대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참은 적도 있다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어제는 밤늦게까지 문을 닫지 않은 정육점 앞을 지나다가 마치 자기가
붉은 형광등 불빛에 알몸이 드러난 고깃덩어리 같았다고
새벽거리를 헤매며 쓰레기봉투를 찢는 밤고양이 같았다고
남의 운전대를 잡고 물 위를 달리는 소금쟁이 같았다고 길게 연기를 내뿜는다
아니야, 넌 우리 마을에 있던 솟대의 새야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솟대 끝에 앉은 우리 마을의 나무새는 언제나 노을이 지면
마을을 한 바퀴 휘돌고 장대 끝에 앉아 물소리를 내고 바람소리를 내었다
친구여, 이제는 한강을 유유히 가로지르는 물오리의 길을
물과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물새의 길을 함께 가자
깊은 밤
대리운전을 부탁하는 휴대폰이 급하게 울리면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솟대를 떠나 밤의 거리로 사라지는
야간 대리운전사 내 친구
오늘밤에도 서울의 솟대 끝에 앉아 붉은 달을 바라본다
잎을 다 떨군 나뭇가지에 매달려 달빛은 반짝인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41』(용인신문. 2011년 05월 02일)
―시집 『쓰러지는 법을 배운다』(램덤하우스, 2008)
(200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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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봄의 강가


유종인


 

언젯적 곡두라는 말 새로 들으니
귀신이란 말 군동내가 나
샛강 가 바위 밑에
숨어 살라 했지, 이즈음

 

영구치가 치받아 가만히 유치(幼齒)가 흔들리는
딸애가 둘, 그 두 딸에
눈독이 지긋한
아내가
하나,
한나절 춘란(春蘭)의 고백 같은 꽃대의 가만한 졸음 곁에
슬픔의 데릴사위 같은 내가
서넛,


봄이 거위영장처럼 다니러 오는
강가에 서면
혁명이나 팔자거나 숙명이나 간에
모두
눈이 흐려오는 앞 강물을 뒷강물이 지긋이 밀어내듯이


맹목(盲目)도 사랑의 쪽매이었지
그걸 깨우칠 듯 봄이 와선
귀류(鬼柳)라 불리던 저 수양버들 치렁한 가지에
슬쩍살짝 뺨을 맞고 선
뇟보 같은 나도 있다니


그러면, 딴청 피우듯
딴청을 따돌리고
다시 흘러오는 물살의 눈매와
늙으나 고운 사랑의 아득한 눈매도
뺨에 스치는 버들잎처럼 갈마들어 오겠지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42』(용인신문. 2011년 0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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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참나무


이윤택


 

참나무 한 그루 서 있다
그래 내가 물었다
참나무야,
너는 어떻게 늙어 가니?


가능한 시선을 멀리 두고 살지
그러면 아직 나를 중심으로
별들은 순행하고


하루쯤 늦은 신문이라도 받아 볼 수 있겠지


좀 외진 곳에 살더라도
그늘을 넓게 확보하는 게 좋아
지금 세상은 빛을 너무 받아 지랄발광하지
깊게 패이고 썩은 몸에서 맛나는 버섯이 자라고
딱정벌레 같은 가족은
내 몸에서 흐르는 진땀을 먹고 산다네


그러나 나는 시간을 담는 그릇
언젠가 허옇게 마른버짐 피우며 부러지겠지
그때는 군불 때는 땔감
그때가 사실 내 삶의 절정이지
활 타오르는 불구덩이에 몸을 던지면
탁, 틱, 툭 짧은 외마디 비명
그대로 숯이 되겠지
숯에 스며든 격문 같은 시 전사 같은 삶
그대로 천년쯤 시간을 견디며
사람을 기다리고 있겠지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43』(용인신문. 2011년 0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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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치약


  김륭

 

 

  오늘은 사랑에 빠졌다는 당신의 달콤한 계단이 되어보기로 한다. 사랑이 밥 먹여 주냐, 욕 대신 꽃을 퍼붓는 배고픈 짐승들의 가래침은 튜브에 담아 무릎 다친 골목의 연고로 사용하기로 한다.


  물간 고등어 한 마리, 달을 뒤집는 저녁 킁킁 비린내를 칫솔로 사용하는 도둑고양이 발톱 하나 숨겨 치약을 쥐약으로 발음할 수 있는 바닥까지, 사랑은 버리고 빠졌다는 말만 남겨 당신의 뿌리까지 키스를 내려 보내기로 한다.


  입 안 가득 퐁퐁을 떨어뜨린 상큼하고 개운한 얼굴들아 안녕 여기는 내가 아니면 아무도 떠오르지 않는 당신의 숨 막히는 내부, 이미 부패가 시작된 목숨의 복숭아뼈를 껑충 뛰어오른 입술로부터 푹푹 발이 빠지는 분화구


  반짝, 창문이라도 달아낼 듯 치통은 걸어 다니고 머리칼은 자꾸 넘어지는데 까칠해진 턱수염 밑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에 불이나 댕기는 당신의 아랫도리를 어디 한번 꾸-욱 눌러 짜보기로 한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44』(용인신문. 2011년 05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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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예감


황규관


 

이제 사랑의 노래는
재개발지역 허름한 주점에서 부를 것이다
가난한 평화는 한 블록씩 깨어지고 있다
그 아픔의 마른 냄새를 맡으며
잃어버린 대지를 찾지 않겠다
모든 밥벌이가 단기계약이듯
사랑도 이제 막바지다
새끼들 칭얼거림을 다 듣고
아내의 지친 한숨도 내 것으로 한 다음에야 노래는
터져 나올 것이다
깨어진 기억은 길가에 치워져 있다
천장이 한없이 낮아
일찍 취하는 주점에서
마시고 내린 빈 잔을 가슴에 가득 담을 것이다
사랑은 막바지고
외로움도 좋다
백척간두가 내 힘이다
그러나 다시 노래는 울고 말 것이다
끝내 오고야 말 폐허까지
폐허의, 폐허의 아침까지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45』(용인신문. 2011년 06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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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가나안


이영광


 

가나안 교회를 어디로 가야 하나요, 그녀는
물었고, 길이 복잡하니 따라오라고 나는 말했다.
마음에 든다는 듯 그녀는 웃었다. 꽃무늬 재킷 전체가 웃었다.
서른이 안 돼 보이는 여자가 마흔이 넘은 나를
내 생애의 어떤 여자보다도 기쁘게 따라왔다.
벚꽃이 지고 있었다. 언덕 밑 자드락길 파밭 지나
골목에 접어들어서도 나는 몰랐다. 놀랐다.
가나안 교회를 얼마나 가야 하니, 반말로 그녀가 다시
물어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별안간
블라우스 앞섶을 홱 열어젖히고 맨가슴을 꺼낸 채로
달려들어서, 내 목을 끌어안고 매달려서가
아니었다. 문득 여자의 등 뒤에서 여자를 꼭 닮은
늙은 얼굴이 나타나 깔깔대는 알몸을 철썩철썩
때려가며 옷을 입히고, 사과도 없이 허둥지둥
사라져서가 아니었다. 아, 나는 정신없는 몸 앞에서
정신없이 옷깃을 여미는 인간이구나. 나도 몸이었구나.
하지만, 너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니. 어떻게
견디지 않을 수 있었니. 벗은 몸이라도 내밀어야 했던
참혹이 있었던가. 다 벗어던지고라도 따라가야 했던
순간이 누구에게는 없었을 것인가. 살 떨리는 그곳이 비록
독과 피가 흐르는 저주의 땅이라고 해도.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46』(용인신문. 2011년 06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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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신앙


김소월

 


눈을 감고 잠잠히 생각하라
무거운 짐에 우는 목숨에는
받아가질 안식을 더 하려고
반드시 힘 있는 도움의 손길이
그대들을 위하여 내밀어지리니.


그러나 길은 다하고 날 저무는가,
애처로운 인생이여
종소리는 배 바삐 흔들리고
애꿎은 조가(弔歌)는 비껴 울 때
머리 수그리며 그대 탄식하리.


그러나 꿇어 앉아 고요히
빌라 힘 있게 경건하게,
그대의 맘 가운데
그대를 지키고 있는 아름다운 신을
높이 우러러 경배하라.


멍에는 괴롭고 짐은 무거워도
두드리던 문은 멀지 않아 열릴지니
가슴에 품고 있는 명멸(明滅)의 그 등잔을
부드러운 예지(叡智)의 기름으로
채우고 또 채우라.


그리하면 목숨의 봄 둔덕의
살음을 감사하는 높은 가지
잊었던 진리의 몽우리에 잎은 피며
신앙의 불붙는 고운 잔디
그대의 헐벗은 영(靈)을 싸 덮으리.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47』(용인신문. 2011년 0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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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춤추는 언니들, 추는 수밖에


  황병승


 

  2층 사는 남자가 창문을 부서져라 닫는다, 그것이 잘 만들어졌는지 보려고
 

  여자가 다시 창문을 소리 나게 열어젖힌다, 그것이 잘 만들어졌다는 걸 알았으니까


  서로를 밀쳐내지 못해 안달을 하면서도 왜 악착같이 붙어사는 걸까, 더 큰 집으로 이사 가려고


  바퀴벌레 시궁쥐 사마귀 뱀 지렁이 이 친구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미움 받고 있는가 알기나 할까, 파티에 초대받은 적이 없어서


  아줌마 아저씨들은 ‘야 야 됐어’ 그런다, 조금 더 살았다고


  그러면 다리에 난간은 뭐 하러 있나 입을 꾹 다물고 죽은 노인네에게 밥상은 왜 차려주나


  그런 게 위안이 되지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빵 주세요 빵 먹고 싶습니다 배고픈 개들이 주춤 주춤 늙어가는 저녁


  춤추는 언니들, 추는 수밖에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48』(용인신문. 2011년 06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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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김산


 

무럭무럭 늙던 할머니의 왼편을 바람이 쓰러뜨렸네
시누대처럼 꼬장꼬장한 할머니의 허리가 도루코 날처럼 접혔네
손목이 접히고 입이 뒤틀리고 무릎이 오그라들었네


엉금엉금 할머니는 학교 갔다 온 나에게 엄마, 엄마, 불렀네
배고파, 배고파, 저 년은 밥도 안 주고 서방질만 한다고,
엄마, 엄마, 나물에 고기반찬 좀 해줘, 어린 내게 졸라댔네


나는 양푼 가득 장조림과 콩나물을 비벼 바람의 아가리에 들이부었네
반은 흘리고 반은 바람이 먹고, 반은 흘리고 반은 바람이 마시고,
뚱뚱해진 바람이 가계의 비닐 창마다 숟가락만 한 구멍을 냈네


어느 가을, 학교 갔다 오니 할머니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셨네
스테인리스 오강 단지를 타고 지붕을 뚫고 우주로 날아가셨네


나는 요즘도 문득문득 양푼을 들고 바람의 入口를 더듬거리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49』(용인신문. 2011년 07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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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겨울 이야기


마종기


 

겨울은 어떻게 오던가.
빈 뜰에 이른 어두움 내리고
빛나던 江물 소리 그치고
그 뺨에는 하얀 성애.


議政府行이었지,
뜻밖에도 눈이 내릴 때
마지막 밤 버스에
흔들리던 요한 啓示錄,
밤새 눈을 맞는
孝婦利川徐氏之墓.


善終하는 老人의 웃음 끝에도
한 줄씩 조용한 눈물.
그 눈물의 速度처럼 아직
겨울은 혼자서 머물고 있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50』(용인신문. 2011년 0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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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멸치


전연옥


 

지난 일들은 모두 잊어버리라고
내 몸에 달디단 기름을 발라 구우며
그대는 뜨겁게 속삭이지만
노릇하게 내 살점을 태우려 하지만
까닭 없이 빈 갈비뼈가 안쓰러움은
결코,
이 빠진 접시 위에 오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님을

 

비틀거리며 쏟아지는
한 종지의 왜간장에 몸을 담그고
목마른 침묵 속에
고단한 내 영혼들이 청빈하게 익어갈 때면
그 어느 것도 가늠할 수 없는 두려움에
쓰라린 무릎을 끌어안고
여기는 에미 애비도 없는
서럽고 슬픈 저녁 나라이더냐
들풀 같은 내 새끼들
서툰 투망질에도 코를 꿰는 시간인데
독처럼 감미로운 양념 냄비 속에 앉아
나는 또 무엇을 잊어버려야 하며
얼마만큼의 진실을 태워야 하는지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51』(용인신문. 2011년 07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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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도종환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도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 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줄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몇 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52』(용인신문. 2011년 07월 26일)

―시집『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창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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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나비 4


이안


 

나비는 눈이 어두워
구절초 책에 쓰인 글자 하나하나를
혀로 맛보며 읽습니다


어떤 페이지는
어려운 맛에 처음부터 다시 읽기도 하고,
어떤 페이지는
싱겁다 싱겁다 건너뛰기도 하면서


그러다가도 다시 돌아와
싱거운 맛 하나하나에
골똘히 빠져들기도 합니다


볕이 좋은 날은 날개 그늘을 펴고
그 아래서 읽습니다
눈이 더 나빠지면 안 되니까요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53』(용인신문. 2011년 08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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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간장


하상만

 


콩자반을 다 건져 먹은 반찬통을
꺼내 놓는다. 반찬통에는 아직
간장이 남아 있다.
외로울 때 간장을 먹으면 견딜 만하다.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내가 일으키려 할 때
할머니는 간장을 물에 풀어오라고 하였다
나는 들어서 알고 있다. 할머니가 젊었을 때
혼자 먹던 것은 간장이었었다는 것을.


방에서 남편과 시어머니가 한 그릇의 고봉밥을
나누어 먹고 있을 때
부엌에서 할머니는 외로웠다고 했다.


물에 풀어진 간장은 뱃속을 좀 따뜻하게 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운을 주었다.
할머니가 내게 마지막으로 달라고 한 음식은
바로 간장.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할머니는
혼자 오랜 시간을 보내었다.
수년째 자식들은 찾아오지 않던 그 방
한 구석엔 검은 얼룩을 가진 그릇이 놓여 있었다.


내가 간장을 가지러 간 사이 할머니는
영혼을 놓아버렸다. 물에 떨어진 간장 한 방울이
물속으로 아스라이 번져 가듯
집안은 잠시 검은 빛깔로 변했다.


비로소 나는 할머니의 영혼이 간장 빛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할머니의 손자이므로 간장이 입에 맞았다.
혼자 식사를 해야 했으므로
나는 간장만 남은 반찬통을 꺼내 놓았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51』(용인신문. 2011년 0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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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어머니 생각


이시영

 

 

어머니 앓아누워 도로 아기 되셨을 때

우리 부부 외출할 때나 출근할 때

문간방 안쪽 문고리에 어머니 손목 묶어두고 나갔네

우리 어머니 빈집에 갇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돌아와 문 앞에서 쓸어내렸던 수많은 가슴들이여

아가 아가 우리 아가 자장자장 우리 아가

나 자장가 불러드리며 손목에 묶인 매듭 풀어드리면

장난감처럼 엎질러진 밥그릇이며 국그릇 앞에서

풀린 손 내미시며 방싯방싯 좋아하시던 어머니

하루 종일 이 세상을 혼자 견딘 손목이 빨갛게 부어 있었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55』(용인신문. 2011년 08월 22일)
―월간『현대시학』(2011,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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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오동나무 아래서

 
안주철


 

오동나무 아래서 비를 피하고 있으면
누에들이 뽕잎 갉아먹는 소리가 들려


엄마는 아궁이에
반쯤 남은 생을 지펴
밥을 짓고 있어
뽕잎 같은 방을 기어다니던 동생이
어제 누에를 집어먹었어
동생은 얼마지 않아
고치를 짓기 시작할 거야


부뚜막 옆에는 석유풍로가 있어
그 뒤 흙벽엔
그을음 나무가 한 그루
검게 자라고 있지


하루하루 굵어지는 그 나무
이제는 베어버려야 할 것 같아
천장까지 닿아 비가 새거든


하지만 굵은 나무가
쓰러지면서 집을 덮칠까
못 베고 있지


오동나무 아래서 비를 피하고 있으면
오동잎들이 빗물 뜯어먹는 소리가 들려


늦가을 집을 짓지 못한 누에처럼
오동잎들이 마르고 있어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56』(용인신문. 2011년 0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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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쓸쓸한 환유


  이성목

 

 
  살아있는 뱀으로 술을 담글 때, 술병에 술을 가득 채우지 않으면 뱀이 술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견딘다고 한다. 그 허기진 뱀은 제 꼬리를 조금씩 잘라 먹으며 목숨을 부지한다고 한다. 훗날 그런 술병 속에는 눈을 치켜뜨고 죽은 뱀의 머리통만 주먹만 하게 불어서 둥둥 떠 있다고 한다.


  양파가 붉은 망을 뚫고 푸른 촉을 내밀었다. 뿌리도 없이 양파의 몸을 뚫고나온 촉에 손을 대는 순간 둥근 양파의 몸이 푹 꺼졌다. 양파의 촉은 제 몸을 빨아먹으며 한 방울의 육즙도 남지 않을 때 대궁을 부풀리며 자진한다.


  몸에 없는 것이 아플 때가 있다. 오른 쪽 다리를 잘라낸 친구는 다리를 잘라낸 뒤에도 발목이 시큰거리고 발가락이 꼼지락거린다고 한다. 잠결에 발바닥이 아파 뒹굴며 발에 손이 갔을 때, 발은 어디 있는지 잡히지 않고 뿌리 없는 통증은 며칠을 그렇게 몸을 다녀갔다고 한다. 다리를 자르지 않았다면 목숨을 구하지 못했으니, 그는 날마다 몸의 일부를 떼어주며 내생을 향하여 절룩절룩 걸어갈 것이다.


  나는 꼬리뼈를 퇴화시키며 사십 년을 살아 왔다. 날개 죽지를 지우며 몸 안으로 숨은 지 사십 년이 지났다. 쇄골 사이로 내다보는 바깥, 없는 꼬리, 없는 날개를 흔들며, 긴 팔 덜렁거리며 춤추는 나를 본다. 아직도 다 사라지지 않았다니! 그림자 둘둘 말아 쥐었던 손바닥을 펼치면, 투명 날개를 단 나비 떼가 날아오른 자리에 손금이 둥근 물결처럼 떠올랐다 가라앉는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57』(용인신문. 2011년 09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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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베르톨트 브레히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되겠기에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58』(용인신문. 2011년 0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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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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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풀 잎

 

강은교

 


아주 뒷날 부는 바람을
나는 알고 있어요.
아주 뒷날 눈비가
어느 집 창틀을 넘나드는지도.
늦도록 잠이 안 와
살(肉) 밖으로 나가 앉는 날이면
어쩌면 그렇게도 어김없이
울며 떠나는 당신들이 보여요.
누런 베수건 거머쥐고
닦아도 닦아도 지지 않는 피(血)를 닦으며
아, 하루나 이틀
해 저문 하늘을 우러르다 가네요.
알 수 있어요. 우린
땅 속에 다시 눕지 않아도.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60』(용인신문. 2011년 10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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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삼베옷을 입은 自畵像


조용미

 

 

폭우가 쏟아지는 밖을 내다보고 있는
이 방을 凌雨軒이라 부르겠다
능우헌에서 바라보는 가까이 모여 내리는
비는 다 直立이다
휘어지지 않는 저 빗줄기들은
얼마나 고단한 길을 걸어내려온 것이냐


손톱이 길게 쩍 갈라졌다
그 사이로 살이 허옇게 드러났다
흰 삼베옷을 입고 있었다
치마를 펼쳐들고 물끄러미 그걸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입은 두꺼운 흰 삼베로 된 긴 치마
위로 코피가 쏟아졌다
입술이 부풀어올랐다
피로는 죽음을 불러들이는 독약인 것을
꿈속에서조차 너무 늦게 알게 되었다


속이 들여다보이는 窓봉투처럼
영롱한 사람이란
얇은 비닐봉지처럼 위태로운 것
명왕성처럼 고독한 것
직립의 짐승처럼 비가 오래도록 창 밖에 서 있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61』(용인신문. 2011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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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술래의 잠


박석수

 


1
일곱살의 골목에는 야도를 찍어내는
두려움이 와아 와아 햇살처럼 쏟아지고
스무살 이후의 도시는 대패날이 되어 나를 문지르고 있었다.


귓속을 웅웅대는 憂愁(우수)의 빛깔을 끌어내
내가 완전한 자유를 깁고 있을 때
내 生涯(생애)는 蘭(난)이와 눈맞추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무궁화꽃이 ...
찾는다-


幻覺(환각)각의 다리에 물구나무선 나의 일곱살
호주머니에서 쏟아지는 천진한 기침을 숨었던 이마들은 辨明(변명)하고
나는 자꾸 목이 말랐다.

 

2
渴症(갈증)을 뜯는 기억의 바다
더듬거리는 스무살을 소리치다가 치다가
찢어진 냄새여, 숨찬 야도여.
빌딩 사이에서 彷徨(방황)하는
內界(내계)의 노오란 잠은
험준한 산맥을 넘어온 밤바람을 만난다.
만나는 손바닥.
握手(악수)의 안에서 눈뜨는
가롯 유다의 야도소리.


스무살 진한 내 感性의 바다를
햇살처럼 헤엄쳐 가는
물고기의 魂이여,
視野에서 흔들리는 노래여,


3
눈물만한 거리에서
이슬 터지는 神秘(신비)를 캐다가
아린 눈을 감으면
幼年時節(유년시절) 연쌈에서 끊긴
하늘땅땅만한 꿈의 길이 보인다.


아픈 별처럼 기침 데불고
G線(선)의 자락을 타고 오는 어둠,
우유빛 빈 호주머니를 흔드는 바람,
나의 契約者(계약자)들이여!


心室(심실)에 불을 켜면
純粹(순수)의 살점 흩어지는가
구겨진 그림자 무리

아아, 머리칼이 보인다
꼭꼭 숨어라.

 

4
나를 外面(외면)한 背景(배경) 속에서
누군가가 둥 둥 둥
끈적끈적한 울음을 친다.


고이는 소리를
-내 안에서 자꾸 꺼내도
잡히지 앉는 認識(인식)의 무게


神經(신경)의 가지 끝에서
묵은 잠의 껍질을 벗기면
피 흐르는 나날.


졸음처럼 닫히는

오만의 귀.


빛을 가려 두른 暗室(암실)에서
이제 나는 日記(일기)처럼
젖은 옷을 벗는다.

 

5
야도가 飛翔(비상)하는 울음 가운데서 뽑은
옥매듭진 스무살의 잠이여,
핏줄을 타고 흐르는
야도의 녹슨 바람소리여,
自己(자기)를 監禁(감금)하는 누에의 作業(작업)이여,

일곱살의 골목에는 야도를 찍어내는
두려움이 와아 와아 햇살처럼 쏟아지고
스무살 이후의 도시는 대패날이 되어
나를 문지르고 있었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62』(용인신문. 2011년 10월 17일)
▶ 1971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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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납골당 신축 감리일지


  천서봉

 


  흉흉히 날 저문다. 魂의 입주일이 가까워오면서 이마에 손수건 붙인 사람들 출입 잦다. 언덕배기로부터 내닫는 바람은 당신의 할머니, 나의 삼촌이 통성명하는 것이므로, 풍하중에 대한 보강을 요구하다.


  한바[飯場], 아주머니의 고단한 손금이 허기를 불러 모으고, 작업 중 음주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다. 보아라, 베어진 둔덕을 쥐고 휘청거리는 억새의 관절을, 관절을 꺾으며 죽은 자의 아파트가 자라고. 골골골 흘러내리는 위태로운 저녁의 벼랑들.


  인부들이 모두 돌아간 뒤 드럼통에 남겨진 잔불을 끄다. 시공의 이음새가 매끄럽지 못하다. 비를 가진 구름이 북촌에서 몰려오는데 거친 내 영혼은 재설계가 가능할까. 흉측하게 드러난 계단탑 단부가 산자의 오만처럼 단단하다고 공문 띄우다.


  어둠이 시끄럽다. 나무들이 자주 공사장까지 내려온다. 미리 집을 보러 오는 혼의 처연함. 입주를 위해 꼬박꼬박 부어온 햇살의 계좌는 숲처럼 두텁게라는 시방을 지우고 내 귀가 종이짝처럼 얇아졌다고 쓰다. 계통수를 묻어둔 자리에 말뚝을 박다.


  지하 깊숙이 흐르는 물길에 대하여, 별들과 협의하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63』(용인신문. 2011년 10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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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울음이 타는 강


박재삼

 

 

마음도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겠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가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강을 처음 보것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64』(용인신문. 2011년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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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박철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 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꾹쑥꾹 쑥꾹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 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 속 깊은 곳에서 쑥꾹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65』(용인신문. 2011년 11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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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하늘공장


임성용

 


저 맑은 하늘에 공장 하나 세워야겠다
따뜻한 밥솥처럼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곳
무럭무럭 아이들이 자라고 웃음방울 영그는 곳
그곳에서 연기 나는 굴뚝도 없애고 철탑도 없애고
손과 발을 잡아먹는 기계 옆에 순한 양을 놓아먹이고
고공농성의 눈물마저 새의 날갯짓에 실어 보내야겠다
저 펄럭이는 것들, 나뒹구는 것들, 피 흐르는 것들
하늘공장에서는 구름다리 위에 무지개로 필 것이다
삶은 고통일지라, 죽어도 추억이 되지 못하는 고통을
하늘공장의 예배당에서는 찬양하지 않을 것이다
힘없이 잘린 모가지를 껴안고 천천히 해찰하며
내일이라도 당장 하늘공장으로 출근을 해야겠다
큰 공장 작은 공장 모두 하나의 문으로 통하는
하늘공장에 가서, 저 푸르른 하늘공장에 가서
부러진 손과 발을 쓰다듬고 즐겁게 일해야겠다
땀내 나는 향기를 칠하고 하늘공장에서 퇴근하는 길
지상에 놓은 집 한 채가 어찌 멀다고 이르랴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66』(용인신문. 2011년 1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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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을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67』(용인신문. 2011년 11월 21일)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을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56』(조선일보 연재, 2008)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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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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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自己 自身에 쓰는 詩


장영수

 


참회는 젊은이의 것이 아닌 것.
죽음은 젊은이의 것이 아닌 것.
젊은 시절엔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이미,
있는 세상에 대해 죄악인 여러 날들이
지나가고.


그것은 대개 이 세상 손 안의
하룻밤의 꿈. 하루 낮의 춤.
그러나 살게 하라. 살아가게 하라.
<젊은 시절을 7 너는 美化, 美化만 한다>고
말하는 세상에 대해 조금씩 깨어나며
살아가게 하라.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69』(용인신문. 2011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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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킴벌리 커버거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 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70』(용인신문. 2011년 1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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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71』(용인신문. 2011년 12월 27일)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19가 나던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리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문학과지성사. 1979 )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7편 수록 중 1편. 2007)
- 現代試選集『70年代젊은詩人들』(文學世界史, 1981)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84』(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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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덕담


도종환

 

 

지난해 첫날 아침에 우리는
희망과 배반에 대해 말했습니다
설레임에 대해서만 말해야 하는데
두려움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산맥을 딛고 오르는 뜨겁고 뭉클한
햇덩이 같은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지 않고
울음처럼 질펀하게 땅을 적시는
산동네에 내리는 눈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오래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과
느티나무에 쌓이는
아침 까치소리 들었지만
골목길 둔탁하게 밟고 지나가는
불안한 소리에 대해서도
똑같이 귀 기울여야 했습니다
새해 첫날 아침
우리는 잠시 많은 것을 덮어두고
푸근하고 편안한 말씀만을
나누어야 하는데
아직은 걱정스런 말들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올해도 새해 첫날 아침
절망과 용기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72』(용인신문. 2012년 01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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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1964


임희구

 


그해 겨울은 암담했다
나는 아직도 어머니 뱃속에 있었으므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으나
손끝 하나 댈 수가 없었다 세상에는
끊임없이 눈보라가 쳤다
어머니 뱃살로 느껴지는 쌩쌩한 바람들이
날마다 귓전을 울렸다
그 무렵 아버지는 대패질을 하면서
다시는 건너오지 못 할 먼 길을 건너가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암세포처럼
독한 약풀에도 지워지지 않는 지독한 싹으로
끈질기게 살아남아야 할 생을
생살로 터득하면서
죽은 듯 입 꼭 다물고 눈 꼭 감고
한없는 날들을 웅크리고 있었다
어머니 그렇게 나를 지우고 지우며 품었다
그 혹독한 겨울이 물러가고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고 저물어 아픈 것들이 아득아득해지면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73』(용인신문. 2012년 01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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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金堤


서규정

 

 

언제여, 마른 꿈을 접어 날렸던 종이비행기는 농약 먹은 풀밭에
지금은 어떤 자세로 뒤집혀져 있는지 모르더라도
맑고 찬 하늘 부셔 오히려 눈물 나고, 흰 두루미 앉았다 뜨던
벌판은 벗어나야 비로소 벌판이겠지
모내기 논에서 동네 사람 몇 웃겨 놓더니, 세탁이나 이발
그 좋은 일자리 다 놔두고 배우가 되겠다고
노을에 물든 마을을 떠난 푼수를 기억하나요
미사일 기지촌으로 가는 트럭, 미군 무릎 위에 인형처럼 떠가던
양공주의 익다 만 미소와 같이
나라가 약하면 우는 일보다 호호실실 웃어야 할 것이 더 많았던
독재와 개발, 젊은 피를 팔러가던 월남전
지글지글 끓던 라디오와 흑백TV에서 듣고 본
서푼 짜리 익살로는 통하지 않던 격랑의 세월을 건너며
대체 무얼 하며 늙었을까
묻지 마세요
꾸욱 다문 입, 생략된 부분이 더 절창일 것이며
우리 삶은 한판 꿈이거나, 연극 같지 않던가요
산다는 건 새끼를 꼬듯 제 갈길 꾸불꾸불 꼬아가듯


백학, 한 모금의 물로 가슴을 적시자마자
긴 목과 다리를 일직선으로 비틀어 짜고, 날아가고 날아가던


金堤, 눈 속에 남은 물기들을 골고루 골라주던 트럭과 먼지의 나날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74』(용인신문. 2012년 0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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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대설주의보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밭을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읽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르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읽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 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75』(용인신문. 2012년 01월 30일)

 


대설주의보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이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다,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1983년>
(현대시 100년 -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편 중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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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백화점 가는 길


최영미

 


내 욕망의 절반은
백화점이 해결해 준다.


식품관은 지하에,
화장품은 일 층에,
청바지는 이 층에,
구두는 삼 층에,
침대는……


전 세계가 모인 곳,
미국과 유럽의 상점에서도 진열되지 않은
내 욕망의 나머지 절반은
그가 채워 주리라, 믿으며
십 년을 이십 년을 기다렸다.
오지 않는 너.


그를 기다리며,
그에게 발견되고파,
치명적인 향기를 수집한다.
샤넬 디오르 아베다……


갖고 싶어서,
갖고 싶지 않아서,
아무것도 사지 못한 불안한 오후.


샴푸는 일 층에,
청바지는 이 층에,
구두는 삼 층에,
그이는 어디에 있을까?
어디쯤 가고 있을까?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76』(용인신문. 2012년 02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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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나의 고아원


안미옥

 

 

신발을 놓고 가는 곳. 맡겨진 날로부터 나는 계속 멀어진다.
쭈뼛거리는 게 병이라는 걸 알았다. 해가 바뀌어도 겨울은 지나가지 않고.
집마다 형제가 늘어났다. 손잡이를 돌릴 때 창문은 무섭게도 밖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벽을 밀면 골목이 좁아진다. 그렇게 모든 집을 합쳐서 길을 막으면.
푹푹, 빠지는 도랑을 가지고 싶었다. 빠지지 않는 발이 되고 싶었다.
마른 나무로 동굴을 만들고 손뼉으로 만든 붉은 얼굴들 여러 개의 발을 가진 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 이상했다. 집을 나간 개가 너무 많고
그 할머니 집 벽에서는 축축한 냄새가 나. 상자가 많아서
상자 속에서 자고 있으면, 더 많은 상자를 쌓아 올렸다.
쏟아져 내릴 듯이 거울 앞에서
새파란 싹이 나는 감자를 도려냈다. 어깨가 아팠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77』(용인신문. 2012년 02월 13일)
(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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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당신


   김도언

 

 

   당신은 지구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의 목소리를 갖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었던 사람이 오래 전 죽은 것은 온전히 당신의 불행이다. 매일매일 당신은 무릎 아래에서 올라오는 동생들의 저녁을 돌보고 어머니의 길고 긴 목을 닦아주었다. 오랫동안 배를 타다가 육지로 돌아온 거친 사내들은 당신의 생밤 같은 얼굴을 만지고 싶어 했다. 당신은 그 중 한 사내의 힘줄을 아무도 몰래 끊고 싶었다. 숲 쪽으로 세 번, 바다 쪽으로 두 번 울었던 여름, 당신은 정갈하게 애인과 헤어졌다. 피로 쓴 편지를 주고받은 적 없었으나, 심장에 그어진 파문 때문에 당신은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당신은 애인의 허리가 가르쳐준 굴욕을, 손톱을 베어내며 조금씩 떠올렸다. 하얀 종아리를 가진 애인을 죽이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달도 뜨지 않은 밤이 깊어, 마당에 매어둔 자전거들이 말처럼 휭휭 울었다. 당신은 관대한 사람들의 생애가 종종 실패하는 것을 목격했다. 별과 비와 시, 눈을 감아도 너무나 잘 보이는 것들만이 문제였다. 어머니의 배꼽을 베고 눈을 감은 아버지의 싱거운 모험을 생각하기도 했다. 동생들은 더디 자랐고 당신은 오랫동안 당신에 머물렀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78』(용인신문. 2012년 0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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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천천히 먹어, 라는 말은


이인원

 


팔팔 끓어오르는 된장국 속 건지들처럼
모처럼 일찍 귀가한 네가 무지 반갑다는 말,


혼자선 슴슴했던 두부 부침을
넌 천배백배 더 구수하게 느끼기를 바라는 말


생선가시 하나하나 발라주며
낮에 있었던 일을 살짝살짝 염탐해 보려는 말


볼이 미어터지는 네 허겁지겁을
코앞에 붙어 앉아 은근히 즐기고 싶다는 말


네가 밥 한 숟갈 먹는 동안 나는
고팠던 너를 두 숟갈은 떠먹겠다는 말


물바가지에 띄운 버들잎 대신
시시콜콜 내 간섭을 숭늉처럼 후후 불어가며 마시라는 말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79』(용인신문. 2012년 0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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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감기


김어영

 


토요일 오후
감기가 찾아와 붙어 지내다
함께 의사를 찾아가
독한 알약을 처방받았다


집에 돌아와
혼자 방에 누웠는데
어느새 뒤쫓아 온 감기가
곁에 눕는다


할 수 없이
밤새 같이 앓았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80』(용인신문. 2012년 03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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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꽃의 탄생


윤의섭

 

 

불면이란 밤새 벽을 쌓는 일이다
감금, 꺼지지 않는 가로등처럼 뜬 눈으로 견디는
밤과 새벽 사이의 생매장
길 잃은 바람이 어제의 그 바람이 같은 자리를 배회하고
고양이 울음은 있는 힘을 다해 어둠을 찢는다
이 터널은 출구가 없다


어떤 기다림은 질병이다
간절한 소식은 끝내 오지 않거나 이미 왔다 가버리는 것


그러니 너는 얼마나 아름답단 말인가


머리를 남쪽으로 두고서야 겨우 잠이 든다
어떤 묘혈은 땅 속을 흘러 다닌다는데
머리맡에 꽃향기가 묻어 있다
첫 매화가 피었다고 한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81』(용인신문. 2012년 03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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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겨울 동화처럼 마을에도

 
최 준

 

 

깜빡 잊고 해를 그려 넣지 않아서

아침이 오지 않았던 날이 있었다

 
거미줄에 걸린 달을 놔두고

거미가 죽어버려서

창문 열지 못했던 밤이 있었다

 
한 아이가 어제의 일기를 오늘 쓰고

한 아이가 레고로 강아지를 만들던 겨울 내내

 
협궤열차를 타고 산으로

사냥 간 어른들이 돌아오지 않는 마을

 
아이들은 아침을 기다리며

눈 속에서 튀밥처럼 자랐다

 
돌아온 어른들이 없는데

겨울이 가고

조팝꽃이 지붕보다 더 크게 희었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82』(용인신문. 2012년 03월 18일)
―계간『시인시각』(201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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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폭염


박성현

 


아버지가 대청에 앉자 폭염이 쏟아졌다.
족제비가 우는 소리였다. 아버지는 맑은 바람에
숲이 흔들리면서 서걱서걱 비벼대는 소리라 말했다.
부엌에서 어머니와 멸치칼국수가 함께 풀어졌다.
땀을 말리며 점심을 먹는다.
아버지의 눈을 훔쳐본다.
여자의 눈을 쳐다보면 눈이 뽑힌다는
아랍의 무서운 풍습을 말한다. 석류가 터질 때
아버지는 다시 아랍으로 갔다. 그리고 어머니는
빗장을 단단히 채우고 방을 나오지 않았다.
세밑까지 어머니는 화석이 되어 있을 것이다.
기다리면 착해진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다.
내게는 마음이 없고, 문도 없었던 겨울이었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83』(용인신문. 2012년 03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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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섭패


   이선균

 


   섭패라고 불리는 전복 껍데기 귀 대본 적 있으신지 섭패 안쪽에 쟁여놓은 바다의 숨결 들어본 적 있으신지 거북 등 같은 섭패의 외피 숫돌처럼 갈고 문질러 진줏빛 벼려지는 바다의 상처, 상처로 길어 올린 낭경대 꽃밭 은수나비 한 마리 내려앉는 심해의 깊이보다 더 아득한 어둠의 깊이를 더해주는 칠색 카메오, 저 빛살 앞에서 발 헛디딘 적 있으신지


   세상 모든 안쪽의 아름다움 꽉 오므려 아귀 쥐었다가 제 영혼 너무 먼 곳으로 이끌려 갈 때 중력의 손아귀 벗어나 오갈 데 없는 칠흑의 백지 위, 한 모금 불 머금고 빛부신 카메오로 피어오르는 꽃, 빛과 어둠의 순수, 詩!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84』(용인신문. 2012년 04월 01일)
―계간『詩로 여는 세상』(201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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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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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밤목련


오철수

 


달이 참 밝다
밤목련이 이불 홑청에 새긴 꽃무늬 같다
그 밑에 서서 처음으로 저 달과 자고 싶다고 생각한다
뜨거운 물주머니처럼 발 밑에 넣고 자면
사십 년 전
담쟁이넝쿨 멋있던 적산가옥 길
백설기 같던 목련
필 것 같다


역사의식도 없이 희고 희었던
일곱 살 배고픔처럼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86』(용인신문. 2012년 04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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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울화(鬱火)

 

전영관

 

 

막걸리도 없는데 앞산은 무논에 엎어져 흥얼거리고

누렁이가 소죽 끓이는 가마솥 보며 눈을 굴린다

우리 농사 대신 짓는 춘식이 아저씨 돌아가고 저녁은

그제야 느릿느릿 마당으로 따라 들어왔다

하늘은 아버지 찾아왔던 그 아줌마 입술만큼 빨갛다

하지감자 껍질 벗기는 엄마 옆에서 수탉은 질겁하는 암컷 등을 짓이긴다

수탉 벼슬이 아버지 얼굴보다 빨갛다

엄마는 누렁이 불알만한 감자를 움켜쥐고 벅벅 문지르다가 와락,

그것들에게 물을 끼얹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툭툭, 누렁이가 가마솥 보며 외양간 기둥을 들이받았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87』?(용인신문. 2012년 04월 23일)
―격월간『유심』(2012년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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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역세권

 

김정웅

 

 

폭설이다

멀지 않은 곳에

아파트와

모텔과

빌딩이 있다 막차가 가면

고독이 온다 택시와

새벽 두 시와

멸시는

하나다 펜트하우스는

과학적이다

과학적이지 않은 것은

모두 적이다

강남으로 가는 버스는

막차가 없고

가난에는

행선지가 없다

관공서가 공원에 붙어 있을

확률은 과학적이다

컵라면 대신 복권을 산다 나는

아주 먼 곳에 산다

길가에 주저앉은

여자의 치마 속으로

눈이 내린다 눈과 눈 사이를

오래 들여다본다

사람이 죽지 않을 만큼

눈이 내린다 나는

아무 곳에서나 내리고 또

바지를 내린다

첫차가 오기 직전

고독은 고통에 가깝다 나는

과학적이지 않은

모든 것을 증오한다

나는 나의 적이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87』(용인신문. 2012년 04월 29일)
―계간『시작』(201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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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봄비가 차마, 귀(耳)가 되어 내리는


박연준

 

 

깨금발로 가벼이 내리는 봄비
뒤척이는 봄의 땀방울일까
아홉 개의 귀를 삼킨 흐르는 봄아

 
등걸잠 자던 옛 애인은
벚꽃 아래 숨어서 늙지도 않고
파랑이 됐다가, 수의(壽衣)가 됐다가
입김이 됐다가, 봄이 되어 내리나
쇳물처럼 붉게
녹을 품고 내리나


당신─이라는 테두리에 스민 철없는 마음
들릴까, 어쩌면 들릴 수도 있을까
속절없이 눈감은 숨을 별들아


바스러진 봄 귀(耳)가 하나, 둘, 우수수
꽃잎처럼 사뿐히 떨어지면은
내리나 당신, 붉게 흘러내리나


봄 그림자 넓게 지나가는 밤
모르고 활짝 핀
밤의 귀들아
눈 감고 실컷 뛰어다니렴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88』(용인신문. 2012년 05월 21일)
―웹진『문장』(2012,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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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말

 

김소연

 

 

컵처럼 사는 법에 골몰한다

컵에게는 반대말이 없다 설거지를 하고서

잠시 엎어놓을 뿐

 

모자의 반대말은 알 필요가 없다

모자를 쓰고 외출을 할 뿐이다

모자를 쓰고 집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게 가끔 궁금해지긴 하겠지만

 

눈동자 손길 입술, 너를 표현하는 너의 것에도 반대말은 없다

마침내 끝끝내 비로소, 이다지 애처로운 부사들에도 반대말은 없다

 

나를 어른이라고 부를 때

나를 여자라고 부를 때

반대말이 시소처럼 한쪽에서 솟구치려는 걸

지그시 눌러주어야만 한다

나를 시인이라고 부를 때에

나의 반대말들은 무용해진다

 

도시에서

변두리의 반대쪽을 알아채기 시작했을 때

지구에서 변두리가 어딘지 궁금한 적이 있었다

뱅글뱅글 지구의를 돌리며

 

이제 컵처럼 사는 법이

거의 완성되어간다

 

우편함이 반대말을 떨어뜨린다

나는 컵을 떨어뜨린다

완성의 반대말이 깨어진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89』(용인신문. 2012년 05월 29일)
―월간『현대문학』(20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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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레옥잠

 

   신미나

 

 

   몸때가 오면 열 손톱마다 비린 낮달이 선명했다

 

   물가를 찾는 것은 내 오랜 지병이라, 꿈속에서도 너를 탐하여 물 위에 空房(공방) 하나 부풀렸으니 알을 슬어 몸엣것 비우고 나면 귓불에 실바람 스쳐도 잔뿌리솜털 뻗는거라 가만 숨 고르면 몸물 오르는 소리 한 시절 너의 몸에 신전을 들였으니

 

   참 오랜만에 당신

 

   오실 적에는 불 밝은 들창 열어두고 부러 오래 살을 씻겠네 문 밖에서 이름 불러도 바로 꽃잎 벙글지 않으매 다가오는 걸음소리에 귀를 적셔가매 당신 정수리 위에 뒷물하는 소리로나 참방이는 뭇 별들 다 품고서야 저 달의 맨낯을 보겠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92』(용인신문. 2012년 06월 18일)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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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밭


최문자

 

 

뜨는 무지개만 여러 번 보았다
무지개가 죽는 건 본 적이 없다
무지개는 죽을 때 어디다 색깔을 버릴까
적어도 일곱 가지 이상의 감정을 죄다 지우고
회칠한 듯한 흰 손 들고
어디 가서 몰락할까
죽는 순간
하얀 홑이불 한 볍 뒤집어쓰고
뭉게뭉게 떠돌다
모네의 그림 상단에서 멈췄을까
쓰라린 파밭을 내려다보고 있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97』(용인신문. 2012년 07월 23일)
―계간『詩로 여는 세상』(2012,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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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경배


이면우

 


보일러 새벽 가동 중 화염투시구로 연소실을 본다
고맙다 저 불길, 참 오래 날 먹여 살렸다
밥, 돼지고기, 공납금이 다 저기서 나왔다
녹차의 쓸쓸함도 따라나왔다 내 가족의
웃음, 눈물이 저 불길 속에 함께 타올랐다.


불길 속에서,
마술처럼 음식을 끄집어 내는 여자를 경배하듯
나는 불길처럼 일찍이 붉은 마음을 들어 바쳤다
불길과 여자는 함께 뜨겁고 서늘하다
나는 나지막히 말을 건넨다 그래, 지금처럼
나와 가족을 지켜다오 때가 되면


육신을 들어 네게 바치겠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98』(용인신문. 2012년 0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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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고목 한 그루


김수복

 


가을바람 속에 내 마음은 텅 비어 있다
나는 헐렁거리는 자루다
욕망이 자꾸 불거져 튀어나오고 싶어 하지만
가을바람은 헐렁거리는 자루를 끌고 간다


자루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길이 없다
자루 속에서 못들이 솟아 나온다
마음은 녹아서 가을 볕 속으로 난
저문 황톳길을 가고 있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99』(용인신문. 2012년 0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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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散文詩(1)


   신동엽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가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대씩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 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 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00』(용인신문. 2012년 08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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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청춘이 시킨 일이다

 

김경미

 

 

낯선 읍내를 찾아간다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

시외버스가 시키는 일이다

 
철물점의 싸리 빗자루가 사고 싶다 고무호스도 사서

꼭 물벼락을 뿜어 주고픈 자가 있다

리어카 위 가득 쌓인 붉은 육고기들의 피가 흘러

옆집 화원의 장미꽃을 피운다 그렇게

서로를 만들고 짓는 것도 청춘이 시켰다

손목부터 어깨까지 시계를 찼던 그때

하늘에 일 년 내내 뜯어 먹고도 남을 달력이 가득했던 그때

모든 게 푸성귀 색깔이었던 그때

 
구름을 뜯어먹으며 스물세 살이 가고

구름 아래 속만 매웠던 스물다섯 살도 가라고 청춘이 시켰다

기차가 시켰다 서른한 살도 청춘이 보내버리고

서른세 살도 보내버리니 다 청춘이 시킨 짓이었다

 
어느덧 옷마다 모조리 불 꺼진 양품점 진열장 앞

마네킹들이 물끄러미 바깥의 감정들을 구경한다

다투고 다방 앞 계단에 쪼그려 앉은 감정,

기차를 끌고 지나가는 감정, 한쪽 눈과 발목을 잃은 감정,

공중전화 수화기로 목을 감는 감정,

그 전화 끊기며 내 청춘이 끝났다는 것도 청춘의 짓이다

 

아직도 얼른 나가보라고 지금도 청춘이 시킨다

지금이라도 줄을 풀라고

기차와 시외버스와 밤과 공중전화가 시킨다 여전히 청춘을 시킨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92』(용인신문. 2012년 06월 18일)
―계간『시와 미학』(201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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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평창 민박


이용임

 


고요한 여자는 잠이 들어
깨어나지 않고


새소리를 잡아먹으며 눈이
내리고


숲 속에는 누가 사나
검은 발톱 바람


흘러내리는 시간은 시계에


잊어버리는 표정은 벽지에


고독한 여자는 잠이 들어
깨어나지 않고


윤곽을 지우며 고양이의 눈은
내리고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02』(용인신문. 2012년 09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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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친애하는 사물들


이현승

 


아파서 약 먹고 약 먹어서 아팠던 아버지는
주삿바늘을 꽂고 소변주머니를 단 채 차가워졌는데
따뜻한 피와 살과 영혼으로 지어진 몸은
불타 재가 되어 날고 허공으로 스몄는데


아버지의 구두를 신으면 아버지가 된 것 같고
집 어귀며 책상이며 손닿던 곳은 아버지의 손 같고
구두며 옷가지며 몸에 지니던 것들은 아버지 같고
내 눈물마저도 아버지의 것인 것 같다


우리는 생긴 것도 기질도 입맛도 닮았는데
정반대의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본다
포옹하는 사람처럼 서로의 뒤편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마주 오는 차량의 운전자처럼
무표정하게 서로를 비껴가버린 것이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03』(용인신문. 2012년 09월 13일)
- 시집『친애하는 사물들』(문학동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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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주먹


이시가와 다쿠보쿠

 


나보다 부자인 친구에게 동정 받아서
혹은 나보다 강한 친구에게 놀림 당해서
울컥 화가 나 주먹을 휘둘렀을 때
화나지 않는 또 하나의 마음이
죄인처럼 공손히
그 성난 마음 한편 구석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웅크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미덥지 못함.


아아, 미덥지 못함.


하는 짓이 곤란한 주먹을 가지고
너는
누구를 칠 것인가
친구인가, 너 자신인가
그렇지 않으면 또 죄 없는 옆의 기둥인가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04』(용인신문. 2012년 0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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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화살나무


박남준

 


그리움이란 저렇게 제 몸의 살을 낱낱이 찢어

갈기 세운 채 달려가고 싶은 것이다

그대의 품 안 붉은 과녁을 향해 꽂혀 들고 싶은 것이다

화살나무,

온몸이 화살이 되었으나 움직일 수 없는 나무가 있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05』(용인신문. 2012년 10월 04일)
―시집『적막』(창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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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달팽이


   전다형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무기수였다 평생을 독방에서 종신형을 살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날은 외출을 했다 그의 따뜻한 집이 슬픈 감옥이었다 절벽 앞에는 겹겹의 어둠이 보초를 섰다 온몸으로 푸른 감옥을 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비가 내리면 집이 있어 짐이 되었다


   창문도 없는 감방에서 제 살을 파먹으며 젖은 슬픔을 말렸다


   비가 감옥의 문을 열었다 굳게 닫힌 귀를 열고 안테나를 높이 세웠다 온몸으로 바닥을 읽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오르막길을 올랐다 마른 길에게 부드러운 속살 다 파 먹히고 겨울 무논에 빈 껍질로 둥둥 떠 있었다 네 어미의 어미가 그랬다 살아서 감옥이던 집 네 어미의 자궁을 열고 네가 태어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집 슬픈 감옥을 죽어서 빠져 나오고 있었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06』(용인신문. 2012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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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관통


이인철

 


목구멍
너는 나의 가장 밑바닥에서 살았다
낙지 빨판이 목구멍
수백 개 목구멍으로, 나를 바다를 삼키고 있다


절단된 연체의 목구멍들이
입천장에 들러붙어
죽을힘을 다하여 내 목구멍을
몸도 없는 제 목구멍으로 넘기려고 한다
남자가 사랑의 이름으로 여자의 뻘을 드나들듯
너도 뻘의 목구멍을 들랑거리면서
도덕과 내장을 목 넘기고 살았잖니
세상의 마지막 바닥을 기는 겸손처럼


사랑도 목숨을 내놔야
한 사람의 가슴을 관통하여
죽는 날까지 내 길이 되지 않겠는가


또 다른 세상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죽어야 하듯
내 몸을 통하여 관통하여라
늪보다 더 깊은 꾸물꾸물한 소장과
따뜻한 대장을 지나
밖으로 삼키는 항문의 목구멍으로


별이 별을 관통하며 폭발하듯
네 주검이 네 비애를 관통할 것이다
신의 항문을 통해 죽음들이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07』(용인신문. 2012년 10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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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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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형편대로


김주대

 


술파는 여자를 사랑했다
그녀는 내 형편을 사랑했고 한동안


나는 외로움을 잊었지만
형편이 어려워지자 그녀는 떠났다


형편 좋은 사람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09』(용인신문. 2012년 11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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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말


황지우

 


식물학 교수 朴斗植씨(48)는 중병(重病)이라 했고,
의학협회 회장 李海萬씨(57)는 단순히 생리적(生理的)이라 했다.
우려스럽다고 하는가 하면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도 했다.
민영방송 에므비씨 기자는 명륜동 대학가 앞 상인에게
마이크를 들이댄다.
푸른 안개 자욱한 춘계(春季)의 캠퍼스를,
적진(敵陳)에서 적진(敵陳)으로
보여준다. 노란 가래침을 뱉는 개나리꽃.
가정주부 安정숙씨(34)는 “불안해요”라고 말했고,
택시 기사 金상훈씨(42)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걱정된다고 했다.
누르기만 하면 스테레오 타이프 카세트테이프에서 말이 나왔다.
신문이 말하는 시계(視界)제로에 대해
치안본부는 절대로 고문한 사실이 없다고 발표했다.
고통의 배기통이 콱 막힌 버스가 급정거했다.
급격한 우회전은 승객의 머리를 좌경화시킨다는 걸 몰라요?
기회에 민감하다는 하마평(下馬評)을 받고 있는 한 온건론자는 말했다.
<중심의 상실>을 쓴 예술사학자 세들 마이어씨는
나치협력자였다.
4.19세대, 정부 여당 관념조정부장 金益達씨(44)는
수유리 묘소에 헌화했다. 대리석 속의 상한 이름들.
상채기에서 꽃잎을 밀어내는 진달래.
상흔은 치유를 위해서 있다는 말로 그는 기념사에 가름했다.
그는, 정치적 위생관념을 강조했고
이성(理性)을 강조했다. 비위생적인 것에 대한 대안은 주문제 식단이었다.
이성의 기념케이크 속에 방부처리된 이스트.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보균자였다.
주한 미군 사령관 스튜어드씨의 '들쥐' 발언은 사실과 다름이
공식적으로 밝혀졌고,
한국인의 의식을 도굴(盜掘)한, 의식의 고고인류학자 李言榮씨(52)는
일본 독자들이 더 좋아한다. '오프 더 레코드'를 요구하고,
한국인은 누르면 눌린다고 누군가 말했었다.
보다 의심스러운 것은 배후였다.
불타는 부산 미문화원의 배후에 구경꾼들이 몰려들고
대다수의 다수는 구경꾼일 뿐이었다.
액션, 스펙타클과 서스펜스. 개봉박두. 이게 현대 한국정치사다.
미국무성에서는 논평을 거부했다.
다만, 20일자 사설이 ‘희망(希望)’, ‘헌신(獻身)’, ‘사랑’. ‘우정’의
꽃말에 ‘반공(反共)’, ‘친미(親美)’, ‘합의’, ‘단언’이라는 흰 팻말을
박았다.
자물쇠에 꽂힌 열쇠, 꽃말.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1985년)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07』(용인신문. 2012년 11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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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血書


   채상우

 


   가지 않았다 묵호에 가지 않았다 주문진에 가지 않았다 모슬포에 가지 않았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다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햇빛 그러나 가지 않았다 아르헨티나에 쿠바에 유고슬라비아에 가지 않았다 내 의지는 확고하다 창문을 휙 긋고 떨어지는 새처럼 무진은 남한에도 있고 북한에도 있지만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가지 않았다 약현성당에 가지 않았다 개심사에 가지 않았다 길안에 가지 않았다 길안은 내 고향에서 삼십 리 떨어진 동네 평생 가지 않았다 담배를 사러 가지도 않았고 술을 사러 가지도 않았다 아직은 그리하여 가지 않았다 파리에선 여전히 혁명 중인가 광주에선 몇 구의 시체들이 또 버려지고 있는가 게르니카는 아직 그려지지 않았다 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그날이 또 다시 그러나 가지 않았다 애인은 지금 열심히 애무 중일 테지만 가지 않았다 앵초나무에 꽃이 피려 한다 이제 최선이 되려 한다 그러나 가지 않았다 레바논에 사이공에 판지셰르 계곡에 가지 않았다 가지 않았다 못 견디겠네 그러나 가지 않았다 그날 그때 명동에 신촌에 종각에 미도파백화점 앞에 꽃잎 꽃잎들 가지 않았다 그날 오전 열 시 민자당사에 구치소에 그날 새벽 미문화원 앞에, 가지, 않았……다… 그날 아침 그날 저녁 그날 밤 그곳에…… 꽃잎, 꽃잎, 꽃잎들 아직 있다 거기에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가지 않았다 오로지 가지 않았다 가지 않고 있다 가지 않는다 한평생 아프리카를 떠나지 않는 잭카스 펭귄은 펭귄인가 아닌가
 

끝끝내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11』(용인신문. 2012년 11월 16일)
-웹진『시인 광장』(2012, 6월호)
-웹진 시인광장 선정『2012 올해의 좋은시 100選』(아인북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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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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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타다토모의 하이쿠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12』(용인신문. 2012년 1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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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서산대사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14』(용인신문. 2012년 1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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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납이다

  
   서영식

 


   풀잎처럼 휘어진 낚싯대를 보고 있었다 그때 납이다! 아이가 소리쳤다 그래, 저건 고기가 아니라 납덩이가 낚싯줄을 문 것이란다 다시 납이다! 아이가 소리쳤다 그래, 납이다 먹먹한 물속에 가라앉아 숨을 참고 기다리는 거란다 다시 납이다! 나비다! 소리치며 아이가 뛰어갔다 아 나비, 추락을 반복하는 무거운 날갯짓 허공을 튕겨 다니는 위태로운 비행의 저것도 강물 속 봉돌처럼 자꾸만 가라앉으려는 납, 나비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15』(용인신문. 2012년 1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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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녹번동


   이해존

 


   1
   햇살은 오래전부터 내 몸을 기어다녔다 문 걸어 잠근 며칠, 산이 가까워 지네가 나온다고 집주인이 약을 치고 갔다 씽크대 구멍도 막아 놓았다 네모를 그려 놓은 곳에 약 냄새 진동하는 방문이 있다 타오르는 동심원을 통과하는 차력사처럼 냄새의 불똥을 넘는다 어둠 속의 지네 한 마리, 조정 경기처럼 방바닥을 저어간다 오늘은 평일인데 나는 百足으로도 밖을 나서지 않는다


   2
   산이 슬퍼 보일 때가 있다 희끗한 뼈마디를 드러낸 절개지, 자귀나무는 뿌리로 낭떠러지를 버틴다 앞발이 잘리고도 언제 다시 발톱을 세울지 몰라 사람들이 그물로 가둬 놓았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곪아가는지 파헤쳐진 흙점에서 벌레가 기어나온다 바람이 신음소리 뱉어낼 때마다 마른 피 같은 황토가 쏟아져 내린다 무릎 꺾인 사자처럼 그물 찢으며 포효한다


   3
   저마다 지붕을 내다 넌다 한때 담수의 흔적을 기억하는 산속의 염전, 소금꽃을 피운다 옷가지와 이불이 만장처럼 펄럭이며 한때 이곳이 물바다였음을 알린다 흘러내리지 못한 빗줄기를 받아내는 그릇들,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방안에 고인 물을 양동이로 퍼낼 때 땀방울이 빗물에 섞였다 오랫동안 산속에 갇혀 있던 바다가 제 흔적을 짜디짠 결정으로 남긴다 장마 끝 폭염이다 살리나스*처럼 계단을 이룬 집들을 지나 더 올라서면 산봉우리다 계단 끝에 내다 넌 내 몸 위로 햇살이 기어다닌다

 

* 페루 고산의 계단식 염전.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16』(용인신문. 2013년 0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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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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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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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바람 조문


이서화

 


한적한 국도변에 弔花가 떨어져 있다
내막을 모르는 죽음의 뒤끝처럼
누워있는 화환의 사인은
어느 급정거이거나 기우뚱 기울어진 길의 이유겠지만
국화꽃들은 이미 시들어 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들이 단단하게 여물어가는 잡풀 속
며칠 누워있었을 화환
삼일동안 조문을 마치고도 아직 싱싱한 꽃송이들
잡풀 속 어딘가에 죽어 있을
야생의 목숨들 위해
스스로 이쯤에서 떨어진 것은 아닐까
같이 짓물러가자고 같이 말라가자고 누워있는 화환
보낸 이의 이름도 사라지고
꽃술 같은 근조(謹弔) 글자만 남아 시들어 간다


길섶의 바랭이 강아지풀
기름진 밭에서 밀려난 씨앗들이 누렇게 말라간다
누군가 건드리면 그 틈에 와락 쏟아놓는 눈물처럼
울음이 빠져나간 뒤끝은 늘 건조하다
지금쯤 어느 지병의 망자도 분주했던 며칠의 축제에서
한 숨 돌리고 있을 것 같다


먼지들이 덮여 있는 화환 위로
뒤늦은 풀씨들이 떨어진다
밟으면 바스락거릴 슬픔도 없이 흘러가는 국도변
가끔 망자와 먼 인연이었다는 듯
화환 근처에 뒤늦게 찾아와 우는 바람소리만 들린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19』(용인신문. 2013년 0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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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겨울은 철거를 기다린다


  최형심

 


  빈집으로 바람이 부산히 출퇴근하는 동안, 오후가 조금씩 그늘을 입는 동안, 나뭇가지 끝에서 해체된 집들이 똑똑 물방울을 따먹는 동안, 막다른 골목을 노부부의 빈 수레가 걷어갈 동안,


  버려진 목숨들이 서로를 보듬어 탑을 이루었다. 묻혀있던 봄 소매를 끌어당기며 노파가 쪼글쪼글 웃어 보인다.


  백열등 아래 병아리 다리가 나오는 소리, 고드름이 몸을 내주는 소리, 유리벽 안에 붙잡힌 화분이 조용조용 나비문양을 그리는 소리, 가방에 햇빛을 가득 담고 개학식에 가는 아이들의 발소리,


  노부부는 가슴을 들추어 소리를 꺼낸다.


  가파른 골목 끝까지 번진 질기디 질긴 겨울은 곧 그곳에서 철거될 것이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20』(용인신문. 2013년 0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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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봄을 찾아


작자 미상

 


봄을 찾아 진종일 헤매었어요
산으로 들로 아지랑이 속으로
짚신이 다 닳도록 헤매었어요
지친 걸음으로 집에 돌아와
문득 코끝을 스치는 매화향기에
그냥 웃어 버렸지요
뜰앞 매화나무 가지 끝에서
봄은 벌써 피어나고 있었어요


진일심춘불견춘(盡日尋春不見春)
망혜답편롱두운(芒?踏遍?頭雲)
귀래소념매화후(歸來笑拈梅花嗅)
춘재지두이십분(春在枝頭已十分)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21』(용인신문. 2013년 02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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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손에 대한 예의


정호승

 


가장 먼저 어머니의 손에 입을 맞출 것

하늘 나는 새를 향해 손을 흔들 것

일 년에 한번쯤은 흰 눈송이를 두 손에 고이 받들 것

들녘에 어리는 봄의 햇살은 손 안에 살며시 쥐어볼 것

손바닥으로 풀잎의 뺨은 절대 때리지 말 것

장미의 목을 꺾지 말고 때로는 장미가시에 손가락을 찔릴 것

남을 향하거나 나를 향해서도 더 이상 손바닥을 비비지 말 것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지폐를 헤아리지 말고

눈물은 손등으로 훔치지 말 것

손이 멀리 여행 가방을 끌고 갈 때는 깊이 감사할 것

더 이상 손바닥에 못 박히지 말고 손에 피 묻히지 말고

손에 쥔 칼은 항상 바다에 버릴 것

손에 많은 것을 쥐고 있어도 한 손은 늘 비워둘 것

내 손이 먼저 빈손이 되어 다른 사람의 손을 자주 잡을 것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책을 쓰다듬고

어둠 속에서도 노동의 굳은살이 박인 두 손을 모아

홀로 기도할 것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22』(용인신문. 2013년 0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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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애월 혹은


  서안나

 


  애월(涯月)에선 취한 밤도 문장이다 팽나무 아래서 당신과 백 년 동안 술잔을 기울이고 싶었다 서쪽을 보는 당신의 먼 눈 울음이라는 것 느리게 걸어보는 것 나는 썩은 귀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애월에서 사랑은 비루해진다


  애월이라 처음 소리 내어 부른 사람, 물가에 달을 끌어와 젖은 달빛 건져 올리고 소매가 젖었을 것이다 그가 빛나는 이마를 대던 계절은 높고 환했으리라 달빛과 달빛이 겹쳐지는 어금니같이 아려 오는 검은 문장, 애월

 

  나는 물가에 앉아 짐승처럼 달의 문장을 빠져나가는 중이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23』(용인신문. 2013년 02월 22일
―웹 월간詩 젊은시인들8『분홍분홍』(포엠포엠, 2012)
―격월간『유심』(201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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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골목의 자유


김유석

 


황망히 뛰지 말 것, 실밥처럼 드르륵 뜯겨질 수 있으므로


모퉁이와 모퉁이를 누벼 만든
오래 입은 옷 같은 협궤
설거나 곰곰이 두리번거리지 말 것


튀밥 냄새 나는,
모든 것들을 조금 부풀어 보이게 하는 하오
수선집 재봉틀 소리가
내리막처럼 보이는 오르막 도깨비 길목을 밟아가는
네 시 방향으로부터 그늘이 지는 도시의 막후에서


함부로 침 뱉지 말 것, 내 그림자에 떨어질 수 있으므로


뫼비우스의 띠일 뿐인 생의 담벼락에
낙서를 하거나
오줌을 갈겨 본 적 있다면
동전처럼 불쑥 뛰쳐 구르는
노는 아이들 소리에 놀라지 말 것


내일 때문에 늙어가는 것만은 아닐 것이므로


밤에만 문을 여는 만화점 모퉁이, 혹은
문득 막다랐다 싶은 집 앞
결코 앞서는 법 없이 바래다주는 불손한 기척들


헛기침으로 딱 한 번 돌아다볼 것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24』(용인신문. 2013년 0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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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흰 그늘 속, 검은 잠


조유리

 


한 삽 푹 퍼서 언덕 아래로 뿌리면 그대로 몸이 되고 피가 돌 것 같구나


목단 아래로 검은 흙더미 한 채 배달되었다
누군가는 퍼 나르고 누군가는 삽등으로 다지고


눈발들이 언 손 부비며 사람의 걸음걸이로 몰려온다
다시 겨울이군, 살았던 날 중
아무것도 더 뜯겨나갈 것 없던 파지(破紙)처럼
나를 집필하던 페이지마다 새하얗게 세어


먼 타지에 땔감으로 묶여 있는 나무처럼 뱃속이 차구나
타인들 문장 속에 사는 생(生)의 표정을 이해하기 위해
내 뺨을 오해하고 후려쳤던 날들이


흑(黑)빛으로 얼어붙는구나
어디쯤인가, 여기는


사람이 살지 않는
감정으로 꽃들이 만발한데


죽어서도 곡(哭)이 되지 못한 눈바람이 검붉게 휘몰아치는데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25』(용인신문. 2013년 03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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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그날 이후


조인선

 


선거가 끝나자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래도
나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었고 아내와 아이들은 거기에다 웃으며 방울들을 달았다
드라마 속 사랑은 여전히 돈지랄이었고 걸그룹의 자태는 아슬아슬하게 매혹적이었다
뉴스는 사람들이 몰라도 될 것들만 보여주었고
오늘의 날씨는 어제보다 몸매가 육감적이었다
내가 지지한 대선후보는 생각난 듯이 죽은 자에게 엎드렸고
종말론은 인기 있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기에 충분히 절망적이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프라이팬에 계란을 깬다
자세히 보니 핏줄이 보인다
날개가
하늘이 보인다
못다 한 꿈이 보인다
나는 조금은 아무렇지 않게
내 손바닥처럼 뒤집는다
자세히 보니 얼굴이 보인다
주름이 보이고
굳어진 사랑 속에


옹알거리는 태아 적 고단한 생도 보인다
나는 간신히 접시에 담는다
그렇게 한입 베어 먹듯 시를 적으니
생각하며 산다는 거
싸운다는 거 그게 무섭다
손끝이 두렵다


모든 생명이 오고 가는 부엌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내가 끌고 가는 나의 역사에도 찬란한 빛이 있어
계란 프라이 하나만도 못한 내 시를 자세히 들여다보는데
그래도 그 빛에 설익은 것 같아 나오는 건
노른자의 흔적처럼 한 방울이었다
못다 한 신음 한 조각이었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26』(용인신문. 2013년 0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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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복사뼈를 만지다


박수현

 


난데없이 부어 오른 왼쪽 발목의 복숭씨가
복숭아처럼 발그레 익었다
의사는 벌써 몇 번째 주사기로 물을 빼낸다
복숭아, 나직이 중얼거리기만 해도
분홍빛에 오금 저려 덜컥 물러지던
솜털 보송보송한 때를 기억하고 싶어
사람들은 복사뼈를 복숭씨라 부르는 것일까


모자라거나 넘친 마음들은 가지를 떠나는 걸까
비온 뒤 단맛 빠진 낙과를 광주리에 주워 담던
여자의 물크러진 한나절에는
쪼글쪼글 벌레들이 하얗게 오글거렸다
그런 밤이면 원두막 시렁에 얹힌 달빛도
연분홍, 진분홍으로 짓물러졌다


과육 반점이 부풀어 오른다
꿈틀대는 씨앗을 쪼개 벌레를 끄집어낸다
꺼이꺼이 발목께에서 펌프질하는 복숭씨여
한 바가지 마중물이 퍼 올린 복숭앗빛에
여자는 두 발을 이리저리 포갠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27』(용인신문. 2013년 03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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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비에도 지지 않고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욕심은 없고
결코 성내지 않으며
언제나 조용히 웃는다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약간의 야채를 먹으며
모든 일에 있어
자신을 계산에 넣지 않고
잘 보고 듣고 알며
그리고 잊지 않으며
들판 솔 숲 그늘의
조그마한 초가지붕 오두막에 살면서
동쪽에 아픈 아이 있으면
가서 간호해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
가서 그 볏단을 져주고
남쪽에 죽어 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두려워 말라 일러주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부질없으니 그만 두라 말하고
가뭄이 들면 눈물 흘리고
추위 닥친 여름엔 허둥지둥 걸으며
모두에게 멍청이라 불리고
칭찬도 받지 않고
부담도 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28』(용인신문. 2013년 0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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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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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고독한 사람


   최영철

 


   말수가 뜸한 사람은 윗입술과 아랫입술 교분이 두터운 사람이다 윗입술과 아랫입술 궁합이 딱 맞아떨어지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 사이를 아무나 함부로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다 정말이지 어쩔 도리가 없어 잠시라도 멀어지면 심심하고 보고 싶어서 입술이 파리해지는 사람이다 잠시 떨어져 헛바람이 둘 사이를 지나가면 금방 침이 말라 죽을지도 모를 사람이다


   게으른 사람은 손발과 팔다리의 취미가 고독인 사람이다 소싯적 취미란에 아무 의심 없이 고독이라고 쓴 적이 있는 사람이다 손발과 팔다리가 제 일에 바빠 조금만 흩어져도 눈앞이 캄캄해지는 사람이다 팔다리가 한통속으로 무슨 일을 도모할까 봐 걱정이 태산인 사람이다 보고픈 이도 없고 찾아 나서거나 악수할 이도 하나 없는 사람이다 온 힘을 풀고 손과 발을 허공에 늘어뜨린 채 홀로 묵상하는 척하는 사람이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31』(용인신문. 2013년 04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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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문단속


조용숙

 


오래 살아야 두 달 산다는 아버지를
노인병원에 모시던 날
보호자는 있을 곳 없으니
이제 그만 다들 돌아가라는 수간호사 말에
한순간도 엄마와 떨어져 살아본 일 없던
아버지 눈동자가 힘없이 흔들린다
하는 수 없이 엄마까지
입원수속을 밟고 돌아서는데
어머니 내 귀에 대고 살짝 속삭인다
글쎄 동네 홀아비 김씨가
한밤에 건넛마을 팔순 과부를 겁탈했다는 소문이
동사무소에 파다하단다
니 아버지 먼저 가면 나 무서워서 어떻게 산다냐
대문 없는 집에서도 평생 맘 편히 잘 살았는디
니 아버지 가면 얼마 안 있다 바로 따라가든지
아니면 제일 먼저 대문부터 해 달아야 쓰겄다
제삿날 받아놓은 아버지 곁에
새색시처럼 바싹 달라붙어 있는 칠순 엄마가
처음으로 여자로 보였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32』(용인신문. 2013년 035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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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비가 전하는 소식


귄터 아이히

 

 

슬레이트지붕에서 기와지붕으로,

빗방울이 북소리 같이 울리며,

전염병처럼 퍼져,

내게 전하는 소식,

가지고 싶지 않은 자에게

전달되는 밀수품-

 

벽의 바깥에 창문의 함석조각이 울리고,

자음과 모음들이 달그닥거리며 한데 합치면,

비는 말한다

나밖에는 아무도 알 수 없으리라

생각되는 언어로-

 

깜짝 놀라 나는 듣는다

절망의 소식을,

빈곤의 소식을,

그리고 비난의 소식을,

이 소식이 내게 전해져 불쾌하다,

나는 아무 죄도 없는데.

 

나는 소리 높여 외친다,

비도, 비의 고발도, 그리고 그것을 내게 보낸 자도

 

나는 두렵지 않다고,

적당한 시간에

밖으로 나가 그에게 대답하리라고.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33』(용인신문. 2013년 0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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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버리긴 아깝고


박철

 


일면식이 없는
한 유명 평론가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서명을 한 뒤 잠시 바라보다
이렇게까지 글을 쓸 필요는 없다 싶어
면지를 북 찢어낸 시집


가끔 들르는 식당 여주인에게
여차여차하여 버리긴 아깝고 해서
주는 책이니 읽어나 보라고


며칠 뒤 비 오는 날 전화가 왔다
아귀찜을 했는데 양이 많아
버리긴 아깝고


둘은 이상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뭔가 서로 맛있는 것을
품에 안은
그런 눈빛을 주고받으며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34』(용인신문. 2013년 05월 24일)
ㅡ시집『작은 산』(실천문학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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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자매


백은선

 


색색의 조명등이 나에게 여러 개의 그림자를 달아준다


우리 자매는 몇 가지 놀이를 가지고 있다
어떤 날엔 촛농 같은 쿠키를 집어 먹으며
서로의 이름을 바꿔 부르기로 한다


맹세를 할 때는 맹세만을 생각한다
불어나는 혓바닥처럼
우리는 훈련한다


식탁 밑에 쭈그리고 앉아
우리는 다툼을 꾸며낸다
너는 이제 영영 네가 되어야만 할 거야!


거품이 터지는 소리
물속에 잠겨 있을 때
내가 흉내 내는 동물의 울음소리들
빛은 내 몸을 구석 투성이로 만든다


언니는 오래도록 식탁 아래 남아
헤아린다 접시를 쥐고
하나두울 하나 다시 하나


가느다란 빛이 두 귀를 관통한다


초식동물들의 몸 안에 새겨진
어두운 울음을 생각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리본처럼 풀어지는 혀를
훔치고 싶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35』(용인신문. 2013년 06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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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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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종양의 맛


권민경

 


거대한 물혹과 한쪽 난소를 떼어낸 후
고기를 먹을 때면 뒤적거렸어
동물의 아픈 부분을 씹을까 조심스러워
그게 내 몸 같아서


암센터 건너 늘어선 주택
큰 개 순하게 매여 있네
짖을 타이밍을 잊은 개는
긴 혀를 빼물고 헐떡인다
너의 몸 어디선가 고요하게
자라고 있을 거야


나는 혹부리 여자
계절마다 새로운 혹이 돋고
모르는 새 유행에 민감해졌네
환자복 입고 딸기향 립글로스를 발랐지
향기는 소독되고
주택가를 떠도는 애드벌룬
종양은 부푼다


사람들이 태아를 걱정할 무렵
나는 세상의 작은 혹들이 애틋했네
그런 처녀였지
종양을 잉태한 줄 모르고
손자는 먼 훗날의 이야기


주렁주렁 열린 감자 겨울을 나고 좋은 씨감자 될 거야
품질이 좋고 맛 좋아


퇴원을 축하하며
엄마는 오랫동안 고기를 삶았지
들통을 열어보면 작은 종양을 달고
열심히 꼴을 먹던 소가 떠올라
나는 오랫동안 접시를 뒤적이고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39』(용인신문. 2013년 07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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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나의 빈티지


박도희

 


나쁘지 않은 시
늦가을을 닮고 싶은 의자
배터리가 다 된 시계
죽은 매미들이 새 배터리를 만들고 있다는 상상
장난의 운명을 믿는 헝겊 뼈다귀를 물고 오는 강아지
제 속도감을 즐기는 햇살
50% 세일 아이스크림
각종 펜 사랑
시선이라는 행위 예술을 위하여
막대사탕을 물고 타는 버스
모자란 슬픔
현혹=과제
패, 경, 옥 같은 택배물
늙기로 한 터널
오후 찻잔에 담는 비
기어코 찾으려고 하는 눈물에 관하여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40』(용인신문. 2013년 0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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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돌의 잠


오명선

 


그리하여 햇살 한 번 쬐지 못하고 여름을 보냈다
긴 장마가 여름을 다 소비한 것

발이 그려놓은 무늬가 신발이 될 때까지
새를 앉힌 말뚝이 허공이 될 때까지, 바닥에 날개를 짓이기며


무르팍으로 키워온 숲이기에
저녁은 새의 둥지를 다 가져도 펴지지 않는 등이다


누가 저 등에 얹힌 단단한 잠을 깨울 것인가


긴 생각을 지우듯,
문득 돌은 잠행하는 침묵이 아니라
앞 장을 읽고 있을 때 이미 뒷장의 결말이 책장을 덮는, 한 권의 소설이라면


온 몸으로 울음을 토해낸 저녁은
깊은 어둠이거나, 설익은 열매일 것이다


새를 물고 가는 노을이 달빛을 완성하는 동안
열리지 않는 계절은 벽으로 기댈 수 있을 거라는
마지막은 아프지 않을 거라는, 살찐 짐승들의 동정을 돼지꼬리표로 묶어 쓰레기통에 버린다


대답 없는 봄의 안부를 베고 누워
죽은 새의 깃털을 빗질하는 구름의 시간, 수천 년을


걸어온 발이
한 점 바람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람이 신발을 다 신을 때까지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41』(용인신문. 2013년 08월 30일)
―?계간『시와 미학』(201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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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서랍이 달린 여자


   이주언

 


   여자의 몸에 달린 기억들. 가시로 손톱 밑 찔러대는 것들. 찌르면서 부드럽게, 피 흘리며 고귀해지는 것들. 하나의 몸에 달린 치명적 기분들!


    아랫배 서랍 열린다. 젖을 빨며 요람에 눕고 싶은 것들. 혈액으로 쏟아지기 이제는 지겨운, 가득한 하품과 지루의 표상으로 남은 것들. 캄캄한 궁에 들면 편안히 눈감는 것들이 붉은 눈동자로 흘겨본다. 쾅 닫아버려야지, 저것들! 그러나


   해안 가득한 요람. 그 속에서 바둥거리며 뭇 생명이라 불리는 것들. 아직 이름 얻지 못한 것들이 운다. 입을 연다. 하나의 요람에는 하나의 발성법. 너희는 아직 하나의 서랍뿐이구나! 운다. 거미줄에 걸려든 태아가 운다. 끝없는 분열의 근원, 저 신생의 불안들에게


    젖을 물린다. 뻥 뚫린 가슴으로 도대체 젖을 먹일 수가 없다구! 서랍 잃은 여자가 기억을 붕대로 친친 감고 있다. 바닥에 퍼질러 앉아 사라진 가슴 주워 모으고 있다. 꺼이꺼이 웃어주고 있다. 경멸의 눈빛들 바닥을 긴다.


   이마에 달린 손잡이 잡아당긴다. 작다. 이 작은 서랍이 나를 지탱해주기를. 흙탕물 가득하다. 흙탕물의 역동 다 지났다 생각한 지점에서 다시 물결친다. 운다. 작게 운다. 너는 언제나 작게 울어야 한다고 주문을 건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 서랍이 쾅 닫힌다. 이마를 싸매는 비루한 자존심의


   서랍들,
   열렸다 닫혔다 열렸다……
   갈등의 무한 반복이 전 생애라는 듯

 


*서랍이 달린 여자 : 살바도르 달리의 브론즈, 「서랍이 달린 미로의 비너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42』(용인신문. 2013년 09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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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고백성사
- 못에 관한 명상1


김종철

 

 

못을 뽑습니다
휘어진 못을 뽑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못이 뽑혀져 나온 자리는
여간 흉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성당에서
아내와 함께 고백성사를 하였습니다
못 자국이 유난히 많은 남편의 가슴을
아내는 못 본 체 하였습니다
나는 더욱 부끄러웠습니다
아직도 뽑아내지 않은 못 하나가
정말 어쩔 수 없이 숨겨둔 못대가리 하나가
쏘옥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입니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43』(용인신문. 2013년 0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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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칸타타 사탕가게


김현서

 


사탕가게는 네거리 약국 옆에 있다


가방은 무겁고 새벽 두 시의 침묵은 아프다
오랫동안 졸음을 참으며
철심교정기를 낀 강가를 걷는다
매끈하게 빗어 넘긴 물풀 사이로
새로운 간판들이 보인다
아름다운 불빛들이 삐걱거리는 거리
그의 다리와 내 다리를 합치면
완벽한 테이블이 된다


사탕가게로 가는 길은 다가갈수록 멀다


하반신이 잘린 채 웃고 있는 사과나무와
슈거파우더를 뿌리는 가로등
6월의 밤공기가 둥글게 모여 앉아 콧노래를 부른다
바닥에 떨어진 불빛들이
주르륵 몸을 타고 올라온다
흙이 묻어 있던 어린 시절의 사탕처럼
어둠 속에서 생글거리는 눈동자들


늦은 시간에 사탕가게로 간다


강물은 머리칼처럼 뒤엉켜 순조롭게 흘러가고
맥주 거품 같은 밤안개가
창을 들고 뿔뿔이 찾아온다
숨을 쉴 때마다 뚝뚝 떨어지는 은빛 물고기 떼
붉어진 밤공기를 마시며
나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어둠으로 두 뺨이 불룩해진 사탕가게 앞에서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44』(용인신문. 2013년 09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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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살아남은 자의 기쁨


박상천

 

 

한 영혼이 먼 길을 떠났다.


까만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방명록에 사인을 하고
봉투를 내밀고
영전에 꽃을 바치고
머리 숙여 인사를 하고
유족들을 위로하고


영정을 뒤로 하고 나오며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웃으며 반갑게 악수를 하고
함께 모여 담배를 피우고


처음 만난 사람들과
명함을 나누고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먼저 간 그에 대한 추억을 안주 삼아
술잔을 주고받고
사업 이야기를 나누고
가끔은 혀를 차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지만


아, 먼저 간 그가 마련해준
이 기쁨의 자리,
기쁨의 자리.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45』(용인신문. 2013년 10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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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몽유 산책


안희연

 


두 발은 서랍에 넣어두고 멀고 먼 담장 위를 걷고 있어


손을 뻗으면 구름이 만져지고 운이 좋다면
날아가던 새의 목을 쥐어볼 수도 있지


귀퉁이가 찢겨 있는 아침
죽은 척하던 아이들은 깨워도 일어나지 않고


이따금씩 커다란 나무를 생각해


가지 위에 앉아있던 새들이 불이 되어 일제히 날아오르고
절벽의 호주머니 속에서 동전 같은 아이들이 쏟아져 나올 때


불현듯 돌아보면
공중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 있다
거의 사라진 사람이 있다


땅속에 박혀 있는 기차들
시간의 벽 너머로 가고 있는


귀는 흘러내릴 때 얼마나 투명한 소리를 내는 것일까


나는 물고기들로 가득한
어항을 뒤집어 쓴 채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46』(용인신문. 2013년 10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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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패(牌)


이돈형

 


패에서는 뼈를 오랫동안 우려낸 맛이 난다


패와 패 사이
나를 미끼로 허공에 띄워 뜬구름을 잡아챌 때
훅, 훅, 훅킹의 감촉
패를 든 손에서
다리를 흔드는 버릇이 생겨나고
뼛속 깊이 스며들었던 고집스런 피 맛이 날 때


손 안에는
神이 포기한 외통수가 있고
내가 포기한 당신들이 있고
당신들이 포기한 뒤집힐 판이 있어
패를 까기 전에는 함부로 비웃지 마라


통뼈가 아닌 나는
자주 패를 쥐고도 웃음이 나는
늘 엿이었으며 좆이었으며 가끔은 쥐꼬리였음을
뒤집힌 패에서 다시 피 맛을 보지만


나는 한 순간도 패를 배신한 적 없고
패는 한 순간도 나를 놓아준 적 없는
패는
멀쩡해서
너무나 멀쩡해서
오늘도 패 하나를 까뒤집어 본다
혹시나 엿이거나 좆이거나 쥐꼬리였을
당신을 위하여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47』(용인신문. 2013년 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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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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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녹턴


김혜선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피아노를 치네
스물세 명, 할배 할매
늙은 개 두어 마리 왔다 갔다 하는
섬마을 폐교 운동장에서
하릴없던 양귀비꽃이
변소 벼르박에 그린 노란 눈 염소가
말라가던 미역이 귀를 세우고
쇼팽을 듣네


마요르카 섬을 울리는 바람소리
상드의 치맛자락에 스치는 밤공기
찻물은 끓어 넘치고
올리브 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쇼팽이 듣네


달빛이 밤바다에 물수제비를 뜨면
날아가 낯선 별, 내 지하방 천장에 박혔네
누워도 누워도 낮은 방은 감귤처럼 뭉그러져
꿈속까지 얼룩은 번지는
지하방은 아편 먹은 유령선처럼 떠돌고
나는 떨어진 별이 굴러다니는
소리를 들었네


올리브 잎에 떨어진 빗방울이
피아노 위를 구르네
꾸덕꾸덕 폐교처럼 말라가던 작은 섬이
귀를 열고 가만히
시간의 결이 멈추는 풍경을
듣고 있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49』(용인신문. 2013년 11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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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더덕북어


안영선

 

 

용대리 덕장에 겨울이 소복이 쌓인다
이 비릿한 어류의 본적은 러시아산 오호츠크 바다
바다를 떠난 순간 더러는 이름을 바꾸기도 국적을 바꾸기도 한다
피었다 시든 얼음 꽃에서 비릿한 이국 언어가 흘러내린다
굳고 단단한 몸이 바람과 햇살에 겨워 숨겨둔 바다를 쏟아낸다
속살이 푸석하게 부풀어 오른다


낡은 침대 위 아버지가 어류처럼 누워 있다
바람에 한껏 마른 낡은 몸
쥐어짜듯 온몸에서 물기 흘러내린다
흘러내린 물기에 바다를 담은 지도가 흥건하다
한 때 명태처럼 깊은 세상의 주인이었을 아버지,
단단한 고집과 견고한 헛기침을 놓자
물기 빠진 팔과 다리에서 푸석푸석 소리가 난다
속살이 푸석해질수록 아버지는 이름을 바꾸곤 했다


어머니는 황태를 더덕북어라 부른다
두드리지 않아도 푸석한 속살이 부드러워 좋다 한다
온갖 시름 내려놓아야 속살이 부드러워진다는데,
채이고 흔들리고 숨죽여 온 생
아침부터 황태 속살을 뜯던 어머니가
침대 위 아버지를 슬쩍 돌아본다
물기 빠진 아버지 낡은 배가 푸석하게 부풀어 오른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50』(용인신문. 2013년 12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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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편 2개

꽃의 신비

 

김정란

 


꽃, 고요한 침묵으로 너무나 잘 말하는 신비

 

 

 

―일간『박후기의 울림을 주는 시 한 편 150』(용인신문. 2013년 12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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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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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숙호에서 길을 잃다


김인자

 


서른 발자국을 걸었을 뿐인데 무덤 앞에서 길을 잃었다
한때는 다시없는 꽃밭이었을 저 조붓한 길
지금쯤 무덤 주인은
망연히 숙호*마을 낯익은 굴뚝을 바라볼 테고
섬처럼 홀로 어둠에 들 키 작달막한 그의 안식구도
처마 끝 풍경이 흔들릴 때마다 까치발로 서서
구절초 핀 동그란 무덤을 지켜볼 것이다


빤히 보이는 곳에서도
연기처럼 잡을 수 없는 것이 그리움이라면
생生과 사死란 집요하게 벽을 타고 올라가
곤히 잠든 식구를 들여다 볼 수는 있어도
더듬어 만질 수 없는 담쟁이 넝쿨 같은 게 아닐까


살아서 손잡고 가는 소풍이라면
설흘산* 봉수대 나란히 기대앉아
대나무밭에 이는 바람소리로 귀를 씻고
만추에 물든 푸른 앵강만鶯江灣* 바라보며
죽음도 나쁘지 않을 것이나
살아있어서 이렇게 눈부신 거라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을 것이다


가을이 계절의 벼랑 끝으로 걸어가고
마을엔 여전히 소문처럼 연기가 피어오른다
왜 나는 연기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걸까
돌아보면 잡고자 했던 모든 것이 한갓 연기였음에도

 

 

주) 숙호는 경남 남해군 남면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고, 설흘산은 남면에 있는 산이며 앵강만은 남면에 있는 호수처럼 생긴 만이다.

 

 

 

―일간『박후기의 울림을 주는 시 한 편 152』(용인신문. 2013년 1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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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동백, 대신 쓰는 투병기
 

박후기
 
 
죽은 사람들의 마지막 계절에 대해 생각해
가을에 태어난 아버지는 가을에 죽었고
봄에 태어난 형은 봄에 죽었지
부지불식간, 꽃 피는 순서는 있어도
꽃 모가지 떨어지는 순서는 없다지
 

묘역을 공원이라 부르니
죽음이 더욱 친밀해지더군
동백 무덤, 언 땅을 파지 않아도
죽음은 꽃 구덩이에 파묻히지
바다로 가는, 걷고 싶은 죽음의 둘레길
산다는 게 죽음의 둘레만 빙빙
돌다 가는 일인지도 몰라
 

사랑은 피어나는 순간
종말이란 걸 알아야 해
그러니 서로 살 섞기 직전까지 간직해 온
붉고 짙은 설렘만 주고받기로 하자
우리 언제나 사랑의 도입부에만 머무르며
아, 꽃 피기 직전의 떨림으로 추락을 맞이하자
 

언 땅 위에서 자고 일어나면
봉오리가 부어올라 눈을 뜰 수가 없어
얼굴에 화색이 돌지 않는다고 걱정하진 마
꽃이 색을 기억하는 건
얼굴 표정이 그대로 여물어서
씨앗이 되었기 때문이야
 

다음 생의 겨울엔
곱은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면
흐릿한 연기와 함께 훅, 하고
불이 피어오르는 그런 저녁이 어디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어
집 나간 엄마를 기다리는 밤,
 

불안과 다투는 시간이 짧았으면 좋겠어
 

한때 떨어진 꽃잎을 주워 담아
소쿠리 가득 내게 주던 엄마는
이제 소쿠리 하나 가득
박하사탕을 담아 내게 건네주지
세상에 아름다운 요양원은 없어
툭, 하고 지나간 세월
바람의 보조금에 매달려
겨우 목숨 부지하는 시든 꽃들
얼음장 위에 버려진 꽃들에게
혈색을 묻는 안부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람
 

문 열지 않으면 문밖은 없어
문 열지 않으면 너밖에 없어
문 열지 않으면,
문을 열지 않으면
 

그러니까
징그럽게 눈 뜨고
힘닿는 데까지 살아야 해
부탁이야
 
 

 

―일간『박후기의 울림을 주는 시 한 편 마지막회』(용인신문. 2013년 12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