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달팽이 시 모음 - 박형준/서상만/전다형/김사인/이원규/장석주/강상기/류인서/이승훈/김환식/박재희/강상기/ 김유석 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11. 22.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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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박형준

 

 

달팽이 한 마리가 집을 뒤집어쓰고 잎 뒤에서 나왔다
자기에 대한 연민을 어쩌지 못해
그걸 집으로 만든 사나이
물집 잡힌 구름의 발바닥이 기억하는 숲과 길들
어스름이 남아 있는 동안 물방울로 맺혀가는
잎 하나의 길을 결코 서두르는 법 없이
두 개의 뿔로 물으며 끊임없이 나아간다
물을 먹을 때마다 느릿느릿 흐르는 지상의 시간을
등허리에 휘휘 돌아가는 무늬의 딱딱한 껍질로 새기며,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연기에 섞여
저녁 공기가 빠르게 세상을 사라져갈 때
저무는 해에 낮아지는 지붕들이 소용돌이치며
완전히 하늘로 깊이 들어갈 때까지,


나는 거기에 내 모습을 떨어뜨리고 묵묵히 푸르스름한,
비애의 꼬리가 얼굴을 탁탁 치며 어두워지는 걸 바라본다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문학과지성사. 1994 )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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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서상만

 

 

플잎과 플잎 사이

묵언默言 십리길

 

늘 같은 걸음

가도 가도

논두렁 벗어나지 못하고

 

밤새껏

달빛 묻은 맨발로

어딜 가실까

 

 

 

ㅡ시집『적소謫所』(서정시학,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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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팽이

 

  전다형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무기수였다 평생을 독방에서 종신형을 살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날은 외출을 했다 그의 따뜻한 집이 슬픈 감옥이었다 절벽 앞에는 겹겹의 어둠이 보초를 섰다 온몸으로 푸른 감옥을 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비가 내리면 집이 있어 짐이 되었다


   창문도 없는 감방에서 제 살을 파먹으며 젖은 슬픔을 말렸다


   비가 감옥의 문을 열었다 굳게 닫힌 귀를 열고 안테나를 높이 세웠다 온몸으로 바닥을 읽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오르막길을 올랐다 마른 길에게 부드러운 속살 다 파 먹히고 겨울 무논에 빈 껍질로 둥둥 떠 있었다 네 어미의 어미가 그랬다 살아서 감옥이던 집 네 어미의 자궁을 열고 네가 태어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집 슬픈 감옥을 죽어서 빠져 나오고 있었다

 

 

-시집『수선집 근처』(푸른사상,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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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김사인

 

 

귓속이 늘 궁금했다


그 속에는 달팽이가 하나씩 산다고 들었다
바깥 기척에 허기진 그가 저 쓸쓸한 길을 냈을 것이다
길 끝에 입을 대고
근근이 당도하는 소리 몇 낱으로 목을 축였을 것이다
달팽이가 아니라
도적굴로 붙들려간 옛적 누이거나
평생 앞 못보던 외조부의 골방이라고도 하지만
부끄러운 저 구멍 너머에서는
누구건 달팽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 안에서 달팽이는
천년 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한다
귀가 죽고
귓속을 궁금해 할 그 누구조차 사라지고
길은 무너지고 모든 소리와 갈증이 그친 뒤에도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
오래 오래 간다는 것이다
망해버린 왕국의 표장(標章)처럼
네 개의 뿔을 고독하게 쳐들고
더듬더듬
먼 길을

 

 
 
-월간『현대문학』(2008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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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이원규

 


처사님, 어여하시지요?


임대차계약서 같은 거 없어도
당당한
감나무 한 그루
그 아래
부동산 전문의 처사님


습하고 습한 곳만을 찾아서
또 어디를 가시는지


어쩐지 낯이 익다 했습니다

 


―시집『강물도 목이 마르다』(실천문학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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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장석주


 

사는 것 시들해

배낭 메고 나섰구나.

노숙은 고달프다!

알고는 못 나서리라,

아득한 길들!

 

 

 

―시집『몽해항로』(민음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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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강상기

 

 

정말 힘들게 사시네 그려


항상 짐을 지고 여행 다니는 것을
사람한테 배운 것이던가?


짐을 내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자네도 알기는 알 테지


짐을 버리고
자네조차 버리고


달을 팽이 삼아 놀아보게나


 


―계간『시와 세계』 (2010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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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팽이

 
  류인서

 

 

  나는 내일의 구름에서 출발하는 아이
  사람들은 날 두고 비를 기다리는 소년이라 수군대지만 나는 비 온 뒤의 태양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태양의 맞은편에 넝쿨지는 무지개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러니 나는 태양의 일부
  나는 지평선 아래 묻혀 있다는 무지개의 반원을 찾아 초록들을 건너지요
  그 무지개는 가없는 뿌리를 가진 식물성의 덩굴
  그러니 나는 대지의 일부


  내 등에는 빛의 뿌리 한 도막 캐 담을 깨지기 쉬운 옹기가 얹혔습니다
  해의 문양이 찍힌 빈항아리를 진 나를 사람들은 어리석은 나귀라 부릅니다
  나는 나의 옹기에 습기 많은 바람을 가둔 적이 있지요 파도치는 햇빛을 담은 적이 있지요


  항아리 속으로 사라진 나를 봅니다
  우리는 비가 아니라 빛을 목말라 죽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내 항아리는 발아래 바스라져 대기에 섞여
  노래의 흐린 낌새로 떠다닐 것입니다
  그 무지개는 내가 아는 가장 황홀한 티끌의 강, 빛의 현악이니
 

 

―계간『시와시학』(2010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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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팽이


  이승훈

 


  눈도 나쁘지 팔도 병신이지 위암에 걸려 수술도 했지 비오는 저
녁이면 힘도 없지 밖에서 천둥이 치고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지
모든 게 당연하다
  이런 저녁엔 등에 가방을 메고 달팽이가 찾아올 거야

 

 

―계간『미네르바』200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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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김환식

 

 

병원 엘리베이터 안에서

가려운 곳이 또 가려운 것이다

말없이 등을 내밀었다

아내는 말갛게 웃을 뿐이다

어디냐고 묻지도 않았다

손끝은 이미 가려운 곳을 족집게질 했다

부부란 그런 것이다

묻지 않고도 궁핍한

삶의 형색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칸막이 커튼속에 갇혀

아버지는 달팽이처럼

등을 웅크리고 돌아누워 계셨다

손을 잡아드려도

기어이 눈은 뜨지 않으신 채

가만히 내 손가락만 만질 뿐이다

나는 달팽이처럼 더듬이를 꼼지락거리며

아버지의 손등이며

이마 위를 기어 다녔다

등받이 낮은 철재 의자에

석고상처럼 어머니는 앉아 계시고

천명을 다한 듯

가끔씩 형광등이 껌뻑거렸다

당신도 그랬을 것이다

가려운 등만 내밀어도

어머니는 그냥 묻지도 않으신 채

달팽이처럼 굽은 등의 어디쯤으로

한걸음에 손끝이 달려갔을 것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의 손가락을 만져 보았다

 


신호등이 자꾸 껌뻑거렸다

 


―계간 『시작』(2008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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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박재희

 


나는 언제나 갇혀 있다

스스로 눈 막고, 귀 막고 살아온 날들이

벽으로 쌓여

나의 집이 되었다

 

때로 나를 허물어

몸이 커지면

다시 쌓는 집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된다

 

안으로만 차오르는 부끄러운 열정,

그대 앞으로 다가갈수록

그대는 더욱 멀어지고

관 속으로 들어가

홀로 더 높은 벽을 만든다

 

늦가을

낙엽처럼 이 벽, 스르르 허물어지고

빈집이 될 때

그대 앞에 온몸으로 다가서기 위해

오늘은 튼튼한 집을 지어야 한다.

*매일신문 2006.11.21

 

 

 

―일간『매일신문』(2006년 1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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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경전

 

장혜원

 

 

어머니의 텃밭 한 두름이 택배로 왔다
애비 녹즙해주어라는 문구와 함께
케일이 단정히 묶여 왔다
갈피 사이에 숨어들어
달팽이도 따라 왔다
케일을 씻다가 무심코 물과 함께 버린 달팽이
개수대 위로 올라와 몸을 곧추세운다
팽팽한 더듬이가 내 촉수를 건드린다
공명통 같은 집에서 소리를 퍼올린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
내 달팽이관을 밀어붙여도
말랑거리는 퍼포먼스를 독해할 수가 없다
어머니 기도하는 모습 같기도 하여
무어라고 하더냐고 물었다
연신 같은 동작만 거듭하더니
묵묵히 창쪽으로 걸어간다,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 말고
알아도 모르는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제 갈 길만 가라는 듯

 

 


-계간『시와정신 』(2010,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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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달팽이

 
정끝별

 


푸른 잉크가 쏟아지는 저녁의 창가

쓰면 쏟아지고 쓰면 지워지는, 여긴 늘 빈 페이지야

달을 지고 나르는 한밤의 차력(借力)

상처처럼 기어들어갔다 농담처럼 삐져나오는

저 강가에서 사라졌다 이 창가에서 생겨나는

달빛 모래의 노래를 들려줘 내게

낼 모레는 말야 올 봄에는 말야

아무이면서 모두로 흐르는 모래의 시간

잊어 가도록 날 가만 내버려 둬줘

하나이면서 무한을 비추는 달빛의 시간

눈물의 배후인 무지개를 지고 갈 거야

사라진 별들의 희고 긴 눈썹을 키울 거야

바람이 달려오면 젖은 입술을 뜯게 돼

비가 내리면 안으로 말린 귓속까지 물이 들어

그땐 출렁이는 맨살의 노래를 부를 거야

쓸면 쌓이고 쓸면 자욱한, 여긴 늘 만발한 얼룩이야

마를 새 없는 빈 페이지를 밤새 넘길 거야

낼 보름에는 말야 올 밤에는 말야

 


밤이 지나온 창가의 블루지한 블루

아침 세숫물이 유난히 파랗다

 

 

―계간『시와시학』(201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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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는 맨발이다

 

마경덕


 


달팽이 한 마리, 무거운 짐을 지고
움찔움찔 벽을 탄다

뿔끝에 눈을 달고 두리번
사방이 벽이다

길이
툭,
벽에서 끊어진다

와르르 쏟아지는 등짐
바닥에 뒤집힌 달팽이


맨발이다
발이 젖어있다

 

 

 

―시집『신발論』(문학의전당,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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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가 지나간 길은 축축하다

 

박성우

 


  1
  내가  움직일 때마다 분비물을 흘리는 것은, 배춧잎에
붙어 있는 솜털이 내겐 덤불이기 때문이다

 


  2

  사내가 집을 나선다 저 사내는 볕을 두려워하는 달팽
이다 다행이 오늘은 햇살이 비춰지지 않는다 아니 이젠
비춰진다고 해도 무관할 것이다 사내에겐 꽃상추밭 같
은 공원이 생겼으니까, 실직한 저 사내의 딱딱한 집 속
에는 물렁물렁한 아내가 산다 건들기만 하면 젖무덤이
금새 봉긋해지는 그녀는 하루종일 통조림용 마늘을 깐
다 그런 이유로 사내의 눈이 매웠을까 사내가 눈을 흠
치며 지나간 골목이 축축하다

 

 


-시집『거미』(창비,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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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聖者

 

손창기

 

 

연등 속에 달팽이 한 마리 붙어 있다
제 몸피대로 커온 낡은 집을 끌고
어떻게 왔을까 사월 초파일 입적入寂하려고
별, 이슬과 함께 연등 속으로 들어왔던 거다

 

고승처럼 수염대신 마지막 남은 뿔 세우고
붙여진 이름들을 향해 복 빌어주던 마음
온 몸을 궁글리면서 층계층계
소망의 곬을 만들고 있다
몸을 한 번씩 비비꼴 때마다
비 막아주던 벽들도
촉촉한 바람이 지나가던 출입구도
둥근 원이 되어, 점점이 번져가는 연등들

 

이제, 두 귀만 열어두고 바람소리 들으면서
온 몸을 집안으로 들여 놓는다
보시布施할 때가 되었는지
순간, 스르륵 힘이 풀리더니
툭, 땅으로 공양을 드린다

 

껍질만 남기고 알맹이는 가져가라고

 

 

 

―시집『달팽이 聖者』(bookin,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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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의 산책


전건호

 


컵라면 먹다가
아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껍질도 없는 민달팽이
흐물거리며 기어 오르고 있었다
혜성처럼 날아가는 시간 속에서도
아내와 나
저 민달팽이 속도로
얼마나 많은 생 가파른 줄에 매달려
목마르고 힘겨운 해후를 했던가
휙휙 바람 가르며 날아가는 숲속 새들
우리 더딘 만남처럼
민달팽이 저렇게
현기증 나는 시간 안간힘으로 기어올라
마침내 풀잎에 고단하게 엎드려 있다
무색계 너머 찾아온 아내여
수백생 나무로 살다 환생환 내가
바위하나 기어오르다 마감할 생
날카로운 새의 부리 언제 쪼아댈지 모르는
알몸의 느린 생애 앞에 두고
지난 시간처럼 꼬불거리는 라면발
후룩거리다 만나고 있다
광속으로 휘어지는 시간 무색하게
더디고 속절없이 기는 민달팽이
묵묵히 명상 하는 숲을 깨우며
산 오르는 그에게 오늘은 천년의 하루
산길에서 문득 만나
돌처럼 서로 인연임을 알아보지 못하고
외마디 비명 지르는
이 기막힌 해후

 


(시와 정신 제 8회 신인상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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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와 달팽이


이영식

 

강촌 자전거도로

민달팽이 한 마리 뭉개져 있다

 

비명횡사 중에도

시 한 줄 남겨놓고 가셨다

 

집도 절도 없이

몸 하나로 밀고 가는 길

 

제 3의 속도가

그 부드러운 순간을 가로질렀나보다

 

문상객은 바람뿐

초롱초롱 개망초 꽃등 켜놓고 가는데

 

자전거와 달팽이의 속도

사이

 

갓길에 불편하게 걸쳐 있는

내그림자.

 

 


―시집 『희망온도』한국문학도서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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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의 사랑


김광규

 

장독대 앞뜰
이끼 낀 시멘트 바닥에서
달팽이 두 마리
얼굴 비비고 있다
요란한 천둥 번개
장대 같은 빗줄기 뚫고
여기까지 기어오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멀리서 그리움에 몸이 달아
그들은 아마 뛰어 왔을 것이다
들리지 않는 이름 서로 부르며
움직이지 않는 속도로
숨가쁘게 달려와 그들은
이제 몸을 맞대고
기나긴 사랑 속삭인다


짤막한 사랑 담아둘
집 한칸 마련하기 위하여
십 년을 바둥거린 나에게
날 때 부터 집을 가진
달팽이의 사랑은
얼마나 멀고 긴 것일까

 

 

 

―계간『문학마당』(2004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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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달팽이의 사랑


유하

 


느린 달팽이의 사랑


달팽이 기어간다

지나는 새가 전해준

저 숲 너머 그리움을 향해

어디쯤 왔을까, 달팽이 기어간다


달팽이 몸 크기만한

달팽이의 집

달팽이가 자기만의 방 하나 갖고 있는 건

평생을 가도, 먼 곳의 사랑에 당도하지 못하리라는 걸

그가 잘 알기 때문


느린 열정

느린 사랑,

달팽이가 자기 몸 크기만한

방 하나 갖고 있는 건

평생을 가도, 멀고먼 사랑에 당도하지 못하는

달팽이의 고독을 그가 잘 알기 때문

 

 

 

―시집『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열림원,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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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달팽이의 추적


남진우

 

 

빛과 어둠의 경계선에서 그는 움직인다

여름밤 풀밭 사이로 난 오솔길을 가로질러

눅눅한 대기를 밀고 나아가는 달팽이 한 마리

짧은 뿔로 어둠을 휘저으며 그는 지금

아득한 전생의 바다를 건너고 있다

비에 젖은 잎사귀들이 그 앞에 있다

그는 나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끌려가는 것일까

바람이 불어도 그의 긴 항해는 끝나지 않는다

그의 고독은 그의 무기

안정된 것은 어둠뿐이다

그가 지나가고 있기에 모든 것이 흔들리고 녹아 없

어진다

빛과 어둠의 경계선에서 그는 꿈틀거린다

보라, 그의 뿔이 말해주는 것을

그는 이제 지상에 있지 않다

저 은하계 저편 별과 별 사이

짧은 뿔을 흔들며 나아가고 있다

 

 


―시집『타오르는 책』(문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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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달팽이가 좋아


이승훈

 


난 달팽이가 좋아
난 무우도 좋아
하얀 무우
버석 버석 베어먹는
너의 입이 좋아
너의 코도 좋아
웃지 않는
너의 눈도 좋아
난 기차가 좋아
가을 기차는 더욱 좋아
난 철늦은 여행도 좋아
너하고 떠나면 더욱 좋아
난 룸펜이니까
난 알콜 중독자니까
난 너의 파아란 자켓이 좋아
난 저녁에 피곤한 네가
말없이 피우는 담배
연기가 좋아
해골같은 인생도
그때는 따뜻해
한번 타면 다시는
내릴 수 없는
기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이 좋아
난 가을 닭장 앞에
머리를 숙이고
모이를 주는
네가 좋아
난 가을 바닷가에
모자를 쓰고
갈매기 밥을 주는
네가 좋아
난 달팽이가 좋아
그런데 달팽이는 밤에
어떻게 사랑을 할까?

 

 

 

―시집『환상이라는 이름의 역』(미래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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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집이 있는 골목


고영

 


내 귓속에는 막다른 골목이 있고,
사람 사는 세상에서 밀려난 작은 소리들이
따각따각 걸어와
어둡고 찬 바닥에 몸을 누이는 슬픈 골목이 있고,
얼어터진 배추를 녹이기 위해
제 한 몸 기꺼이 태우는
새벽 농수산물시장의 장작불 소리가 있고,
리어카 바퀴를 붙들고 늘어지는
첫눈의 신음 소리가 있고,
좌판대 널빤지 위에서
푸른 수의를 껴입은 고등어거 토해놓은
비릿한 파도 소리가 있고,
갈라진 손가락 끝에
잔멸치 떼를 키우는 어머니의
짜디짠 한숨소리가 있고,
내 귓속 막다른 골목에는
소리를 보호해 주는 작고 아름다운
달팽이집이 있고,
아주 가끔
따뜻한 기도 소리가 들어와 묵기도 하는
작지만 큰 세상이 있고,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28』(용인신문. 2010년 0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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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포 환상곡
―달팽이 선생에게

 

이상범

 

 

어쩌면 마지막 지휘일지 모르겠다
노구에 연미복 끌며 천천히 등장하는
먼 달빛 조명 받으며 무대중앙 서 있다.
달팽이의 여린 뿔에 휘감기는 우주의 소리
숨막히는 고요 속에 비밀의 문 열어놓고
음색도 꺼풀 벗고서 별빛 불러 앉힌다.
숲의 바람이 일고 물면이 들먹인다
이파리와 이파리 사이 밤의 향기 돌며 가고
저 멀리 강물을 뉘인 곳 풀숲들이 웅성댄다.
모든 것이 가능하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가 잡은 지휘봉에 춤추는 우포 환상곡
갈채 속 연미복 끌며 점 하나로 사라진다.

 

 


(『신전의 가을』. 동화사. 2002)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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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골 시편

-민달팽이

 

김신용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보호색을 띤, 갑각의 패각 한 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오수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운행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衲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알몸 위에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나뭇잎 덮개를 빠져나가 버린다


치워라, 그늘!

 

 

 

-계간『문예중앙』 (2006.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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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달팽이


   최호일

 


   너는 밤과 동일하구나 고개를 들어 우리는 학자처럼 바라본다 다른
나라의 기이한 서적을 읽듯


   인생이 명료해지도록


   천 개의 단어를 넣고 뚜껑을 닫아놓은 나무 상자처럼 그것을 다시 뒤
적이는 손처럼 잠을 커피에 찍어 먹는다


   빛을 어둡고 축축하게 보관한다 너는 태어나다가 죽은 아이의 얼굴을
달고 있구나 먹다 남긴 과자 봉지 속에는 지나간 시간이 들어 있을까


   야구 선수들은 베이스를 지나 정말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는 걸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 그 구멍 사이로 밤이 온다 어둠을 빛의 오른쪽 얼
굴로 이해한다


   나로부터 한없이 늘어나는 것이 너는 밤보다 조금 더 길게 어두워지
고 있다 몸에 들어온 조용한 고무줄같이

 

 


―계간『열린시학』(2010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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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달팽이들

 

문성해

 

 

지하 사우나 앞을 지나는데
환풍기에서 훅 끼쳐 나오는 열기, 살 냄새들
지금 내가 밟고 선 깊고 깊은 땅 속 나라에
벌거숭이들이 버글버글하다는 상상을 해본다

 

헬스에서 PC방에서 식당까지
그곳에는 없는 게 없다
아침부터 한밤까지 내처 사는 여편네들도 있다
지상은 이제 피곤한 싸움터일 뿐,
그곳은
수술자국 남겨진 아랫배를 다 드러내어도
부끄럽지 않은 해방터가 된지 오래,

 

들어갔다 나오는 얼굴들이 다 하얗다
눈부신 나자로의 얼굴도 저랬을까
죽음 이후가 제발 그렇다면
먼저 가신 부모 형제들과
아기 때처럼 발가벗고 앉아
오로지 득도에만 골몰한
민달팽이로 모여 사는 것도 행복한 일

 

오늘 무언가를 잊고 싶다면
지하 사우나로 가보라
그곳 환풍기에서 올라오는 훈김만으로도
한 겨울에
라일락이 저리 만개한

 

 

 

―계간『열린시학』(2007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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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마힐 민달팽이


   강성은

 


   배추잎 유마경을 읽는다 섬유질 행간마다 푸르게 돋는 경을 바람이 도반 되어 따라 읽는 길,


   곱게 누벼진 논둑길 밭둑길 밑줄 치다가, 둥근 알 품은 구릉의 ** 한나절 내내 읽다가, 들판에 걸터앉은 구름 한 자락 뭉게뭉게 받아 적다가, 소낙비 젖은 수풀 이슬 도르르 도로 외우다가. 눈부신 햇살 등에 지고 비탈진 고샅길 건너는 행과 생 사이, 등뼈보다 더 물렁한 발자국 따라


   바람도 길도 배추 잎 되는 초록 빛, 저 불이법문(不二法門)!

 

 


―계간『불교문예』(2009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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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김유석

   

 

내 몸엔 나선의 미로가 들어있다. 몸속에서 헤매다

 
몸 밖의 또 다른 미궁으로 겨우 기어 나와 두리번거리는 걸 길이라 한다.

 
곡선을 풀어 곧은 행적을 남겨야 하는 나는 고행의 족속, 동시에

 
끈끈한 흔적을 태엽처럼 몸에 되감으며 조금씩 나아가는

 
나의 길은 뫼비우스의 띠, 가다 보면 안과 밖이 바뀌는 걸음도 어지러워

 
점점 더 느리게 가는 쪽으로 진화해가는 중이다.

 

 

 

―시집『놀이의 방식』(시인동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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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와 나

 

제인자

 

 

텃밭 상추잎에 따라온 달팽이

수돗물 세례받고 빗장을 지르면

안으로 걸어 닫은 캄캄한 한 채의 집이지요

 

무른 달팽이보다 되레 놀란 나는

푸른 잎 쌈 싸 먹고 푸른 똥 누는

느리고 답답한 채식주의자

 

푸성귀 식탁이 나를 부르는 사이

그는 안테나 내밀어 적진을 탐지하지요

 

무른 달팽이보다 더 무른 나에게

쑥갓깻잎오이가지가 어찌하여

뼈가 되고 힘줄이 되는지요

쌀보리콩수수가 어찌하여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눈물의 기도가 되는지요 

 

한 채의 집을 들어 올려 텃밭으로 가는 나는

느리고 답답한 채식주의자

푸른 잎 갉아먹고 더디 깨닫는

무른 달팽이보다 더 무른 나는

 


시집달의 눈썹해설 (북인,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