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 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다로가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나 벌초하려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흑……, 그러나 킥킥 당신
<1992년>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1』(조선일보 연재, 2008)
-일간『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46』(조선일보 연재, 2008)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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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속에 달이 기울 때
고영
꿈, 창, 그리고 당신
문득 그리워져서, 모든 게 속절없이 그리워져서
왜 간혹 그럴 때가 있잖아요?
미친 바람 앞에서,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상황에서도
별안간 누군가의 안녕이 몹시 염려되는 거
그걸 사랑이라고 하면 당신,
그 마음 보여줄래요?
창문 속에서만 존재하는 당신
유리성에 사는 당신
잔이나 비울까요, 그래야 술병 속에서나마 함께 할 수 있잖아요,
큭큭
큭큭거리며 웃는 당신, 당신의 붉은 혓바닥
혓바닥에도 마음이 있다고
그 마음이 또 마음과 마음을 낳아서
지금 우리가 아픈 거라고…
그래도 당신
하현달처럼 저물어가는, 그래도 당신
얼마나 더 나를 비워야 당신을 채울 수 있을까요?
큭큭거리며
술잔을 비워도 차오르는 거, 이 몹쓸 집착!
이 몹쓸 사랑, 사람아 ─
내 차디찬 기억에 젖어 있는 당신을
검불 같은 흐느낌이라고 하면
당신이 너무 가여워서
새벽안개 피어오르는 술잔과 마주앉아 그래도 당신,
술잔 속에 마음을 빠뜨리며 또 당신
큭큭거리며
술잔이 술잔을 낳다가 큭큭!
―계간『시작』(2008년 가을호)
―웹진 시인광장 선정『2009 올해의 좋은시 300選』(2009, 아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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