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먼 바다
박용래
마을로 기우는
언덕, 머흐는
구름에
낮게 낮게
지붕 밑 드리우는
종소리에
돛을 올려라
어디메, 막 피는
접시꽃
새하얀 매디마다
감빛 돛을 올려라
오늘의 아픔
아픔의
먼 바다에.
(『먼 바다』.창작과비평사. 19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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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훈(月暈)
박용래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기 있습니다. 잎진 사잇길, 저 모래둑,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지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를 깎기도 하고 고구마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 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 울지요. 데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은 월훈(月暈).
(『먼 바다』.창작과비평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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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풀
박용래
남은 아지랑이가 홀홀 타오르는
어느 역 구내 모퉁이 어메는 노
오란 아베도 노란 화물에 실려
온 나도사 오요요 강아지풀. 목
마른 침목 싫어 삐걱 삐걱 여
닫는 바람 소리 싫어 반딧불 뿌
리는 동네로 다시 이사 간다.
다 두고 이슬 단지만 들고 간다.
땅 밑에서 옛 상여 소리 들리어
라. 녹물이 든 오요요 강아지풀.
(『먼 바다』.창작과비평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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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눈
박용래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먼바다』.창작과비평사. 198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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