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애월 시 모음 - 정희성/이수익/엄원태/서안나/정윤천/이대흠/정군칠/김왕노/이정환/이재무/정영숙...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12. 16. 14:55
728x90

 

애월涯月

 

정희성

 


들은 적이 있는가
달이 숨쉬는 소리
애월 밤바다에 가서
나는 보았네
들숨 날숨 넘실대며
가슴 차오르는 그리움으로
물 미는 소리
물 써는 소리
오오 그대는 머언 어느 하늘가에서
이렇게 내 마음 출렁이게 하나

 


―시집『시를 찾아서』(창비시선 2009)

 

---------------------------
애월

   

이수익

 

 

제주에 가면 꼭 한번 가보라던
애월, 그 바닷가 마을은
결국 가보질 못했다.


파란 바닷빛이 눈부시게 아름답다던
네 말이 무슨 비망록처럼 자주 떠오르곤 했지만
제주가 초행인 아내를 위해서는
성산일출봉과 민속촌, 정방폭포, 산굼부리 등속의
관광명소를 먼저 보아야 했으므로
결국 그 곳은 가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잘된 일,
애월은 이제 '다음에....' 하고 내 가슴 깊이 묻어줄
애틋한 그리움의 한 대상이 되었으므로
미지의, 선연한 푸른 바다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오랜 날들을 나는 즐겁게 시달리리라.


애월, 가슴에 품고 싶은
작은  기생妓生 같은,
그 이름 떠오를 적마다.

 

 

 

―시집『눈부신 마음으로 사랑했던』(시와시학사. 2000)

 

---------------------------
애월

 

엄원태

 


하귀에서 애월 가는 해안도로는
세상에서 가장 짧은 길이었다


밤이 짧았다는 애긴 아니다
우린 애월 포구 콘크리트 방파제 위를
맨발로 천천히 걷기도 했으니까
달의 안색이 마냥 샐쭉했지만 사랑스러웠다
그래선지, 내가 널 업기까지 했으니까


먼 갈치잡이 뱃불가지 내게 업혔던가
샐쭉하던 초생달까지 내게 업혔던가
업혀 기우뚱했던가, 묶여 있던
배들마저 컴컴하게 기우뚱거렸던가, 머리칼처럼
검고 긴, 밤바람 속살을 내가 문득 스쳤던가


손톱반달처럼 짧아, 가뭇없는 것들만
뇌수에 인화되듯 새겨졌던 거다
이젠 백지처럼 흰 그늘만 남았다


사람들 애월, 애월, 하고 말한다면
흰 그늘 백지 한장, 말없이 내밀겠다

 

 


―시집『물방울 무덤』(창비시선 272. 2007)

 

---------------------------

   애월涯月 혹은

 

   서안나

 

 

   애월에선 취한 밤도 문장이다 팽나무 아래서 당신과 백년 동안 술잔을 기울이고 싶었다 서쪽을 보는 당신의 먼눈 울음이라는 것 느리게 걸어보는 것 나는 썩은 귀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애월에서 사랑은 비루해진다

 

   애월이라 처음 소리 내어 부른 사람, 물가에 달을 끌어와 젖은 달빛 건져 올리고 소매가 젖었을 것이다 그가 빛나는 이마를 대던 계절은 높고 환했으리라 달빛과 달빛이 겹쳐지는 어금니같이 아려오는 검은 문장, 애월

 

   나는 물가에 앉아 짐승처럼 달의 문장을 빠져나가는 중이다

 

  

 

―격월간『유심』(2012. 1-2월호)
―웹 월간詩 젊은시인들8『분홍분홍』(포엠포엠, 2012)

 

-----------------
애월에 이르는


정윤천

  

 
너와 함께 갔던 적 있었다

처음엔 누구나 그리 여겼을지 모를

기꺼운 오독의 길, 애월愛月은

사실은 물가의 달로 떠서 어룽거렸다

애월涯月*로 흔들려도 길은 오히려 확연해졌다

물속의, 들의 이랑은 검고도 푸르렀나니

검고도 푸른 삼단의 머리채를 바람의 일순이 와서 풀어헤쳤다

순식간의 뒈싸진 바당**

바다는 오롯이 저에게로 젖고 말았는가

우리는 또 무엇으로, 가슴속의 애월 하나쯤을 꿈꾸었는가

어디선가 점점의 은빛으로 가까워오는 선미船尾 몇 개가

월광의 춤사위를 견뎌,

더디면서도 오는 동안까지가

 

한사코는 애월에 이르는 길이었는가

 

 

 

―시집『십만 년의 사랑』(문학동네. 2011)

 

------------------------
   애월(涯月)에서

 

   이대흠

 


   당신의 발길이 끊어지고부터 달의 빛나지 않는 부분을 오래 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무른 마음은 초름한 꽃만 보 아도 시려옵니다 마음 그림자 같은 달의 표면에는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발자국이 있을까요


   파도는 제 몸의 마려움을 밀어내며 먼 곳에서 옵니다 항구에는 지친 배들이 서로의 몸을 빌려 울어댑니다 살 그리운 몸은 볼 닿은 노래기처럼 안으로만 파고 듭니다


   아무리 날카로운 불빛도 물에 발을 들여놓으면 초가집 모서리처럼 순해집니다 먼 곳에서 온 달빛이 물을 만나 문자가 됩니다 가장 깊이 기록되는 달의 문장을 어둠에 눅은

나는 읽을 수 없습니다


   달의 난간에 마음을 두고 오늘도 마음 밖을 다니는 발걸음만 분주합니다

 

 

 

―시집『귀가 서럽다』(창비시선 311. 2010)

 

----------------
   달의 난간 
   -涯月

 

   정군칠

 


   파도는 부드러운 혀를 가졌으나 이 거친 절벽을 만들었습니다
 
   열이레 가을달로 해안은 마모되어 갑니다 지워지다 이어지고 이어졌다 끊어지는 신엄의 오르막길, 바다와 가장 가까운 벼랑에 이르자 누군가 벗어놓은 운동화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있습니다


   생의 난간에 이르면 달빛 한 줌의 가벼운 스침에도 긁힌 자국은 선연할 터인데 내 안의 빗금 같은 한 무더기 억새, 바싹 다가온 입술이 마릅니다  生涯의 끝에 이르러 멈추었을 걸음 망설임의 흔적인 듯 바위 틈에 간신히 붙은 뿌리, 뿌리와는 달리 땅 쪽으로 뻗은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누군가 온몸으로 지나간 길, 마음 한 번 비틀어 曲을 만들고 마음 다시 비틀어 折을 만들었으나 길 밖을 딛었을 자의 흔적은 허공뿐입니다


   자주 바람 불어 달이 잠시 흔들렸으나 죽음마저 품어버린 바다는 고요합니다
 

 

―시집『물집』(애지, 2009)

 

------------
  애월에서


  김왕노

 

 

  1

  병든 조랑말을 사랑하자고 하였다.

  동백의 뿌리는 얼마나 붉어

  저리 붉은 동백꽃을 피우나 보자고

  동백을 벌목하고 뿌리를 파헤치자는

  도화원결의 같은 철없는 이야기를

  나눌 때 이야기 속으로 밀려드는

  애월의 별과 파도와 유채꽃

  차라리 사랑이 아픈 사람을 사랑 하자고 하였다.

  애월 바닷가에 와 파도처럼 무너져 우는

  불구의 사랑, 떠나간 사랑을 우는 사람을

  그 뜨거웠던 사월에 맥없이 무너져

  무참히 짓밟혀 몸져눕던

  누이 같은 사람을 사랑하자고 하였다.

 

 

  2

  비자나무 숲으로도 눈 내리니 애월에도 내리는 눈

  내 헐벗은 반도의 꿈속으로도 내리는 눈

  어떤 그리움이 저렇게 눈 내리라 하여

  폭설의 날이 서서히 다가오나 눈사태 나려나

  가도 가도 애월은 눈 속인데

  더 붉게 피는 눈 속의 동백은 아직도 건재하고

  차라리 4·3 사태의 화산도를 사랑하자고 하였다.

  애월의 밤에 피 붉은 울음을 토해내는

  그날을 부리에 물고 우는 작은 새를 사랑하자 하였다.

  망초 꽃으로 피어 흐드러져 가는 그날을 사랑하자 하였다.

  눈물로 부풀어 올라 오름을 이룬 그날을 사랑하자 하였다.

 

 

  3

  애월의 새파란 물빛에게 전향해간

  내 청춘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버렸는지

  벌써 오십의 날만 나를 찾아온다는 소식

  바자나무 숲에서 구구구 흑비둘기로 울고

  눈 딱 감고 애월로 무장해 북진가 부르며

  뭍으로, 뭍으로 애월의 새파란 파도로

  일어나 가자고 전진하자고 하였다.

  한 때 무장하여 집결하고 싶던 조랑말과

  애월의 모시나비와 무당벌레와 봄나물과

  애월의 바람과 바위와 함께 가자하였다.

 

 

  4

  차라리 애월에 와 반짝이는 물빛과

  애월에 와 숨쉬는 물고기와 파닥이는 파래와

  태몽 깊어가는 애월의 밤을 사랑하자 하였다.

  애월 애월하며

  애월을 사랑하는 시인들을 사랑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애월이 우리의 애월

  그리움의 애월이 될 때까지 애월을 사랑하자고 하였다.

 

 

 

―계간『시현실』(2007. 봄)

 

--------------
애월 바다

 

이정환

 


사랑을 아는 바다에 노을이 지고 있다

애월, 하고 부르면 명치끝이 저린 저녁

노을은 하고 싶은 말들 다 풀어놓고 있다

누군가에게 문득 긴 편지를 쓰고 싶다

벼랑과 먼 파도와 수평선이 이끌고 온

그 말을 다 받아 담은 편지를 전하고 싶다

애월은 달빛 가장자리, 사랑을 하는 바다

무장 서럽도록 뼈저린 이가 찾아와서

물결을 매만지는 일만 거듭하게 하고 있다

 

 


―시조집『분홍 물갈퀴』(만인사, 2009)

 

------------------
인생

-애월에서

 

이재무

 

 

저무는 먼바다 먹빛으로 잔잔한데
방파제 둑 위, 할머니 한 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네, 유모차 밀며.
흑백의 풍경 속 몇 겹으로 주름진 시간
고여 출렁이고 있었네
저무는 먼바다 하늘로 이어지는 수평선에서
노을은 가지를 떠나는 꽃잎같이 점으로
흩어져 선홍이 낭자한데
거북처럼 낮게 몸 웅크린, 지금은 다만
묵직한 침묵으로 밤을 기다리는,
밤이 오면 어화 피고 먹물 튀기며
비린내 땀내 진동할 오징어잡이 선박들
등 뒤에 두고
방파제 둑 위, 등이 활같이 휜 할머니 한 분
천천히 실루엣으로 걸어가고 있었네,
아주 먼 미래를 밀며.

 

 


―계간『작가세계』(2003.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