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빈집 시 모음 - 기형도/문태준/송찬호/박진성/박형준/백무산/엄원태/김용택/윤제림/김욱진/고광헌/석여공/김환식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12. 16.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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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시집『잎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1989)

-박영근의 시읽기『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실천문학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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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문태준

 


주인도
내객(來客)도 없다.
겨울 아침
오늘의 첫 햇살이
흘러오는
찬마루
쪽창 낸 듯
볕 드는 한쪽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린 들고양이
여객(旅客)처럼
지나가고
지나가는

 

 

-『유심』(2010,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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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1

 

문태준

 

 
  흙더버기 빗길 떠나간 당신의 자리 같았습니다 둘 데 없는 내 마음이 헌 신

발들처럼 남아 바람도 들이고 비도 맞았습니다 다시 지필 수 없을까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으면 방고래 무너져내려 피지 못하는 불씨들


  종이로 바른 창 위로 바람이 손가락을 세워 구멍을 냅니다 우리가 한때 부리

로 지푸라기를 물어다 지은 그 기억의 집 장대바람에 허물어집니다 하지만 오

랜 후에 당신이 돌아와서 나란히 앉아 있는 장독들을 보신다면, 그 안에 고여

곰팡이 슨 내 기다림을 보신다면 그래, 그래 닳고 닳은 싸리비를 들고 험한 마

당에 후련하게 쓸어줄 일입니다

 

 


(『수런거리는 뒤란』.창작과비평사. 2000 )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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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2

 

문태준

 


  지붕 위로 기어오르는 넝쿨을 심고 녹이 슨 호미는 닦아
서 걸어두겠습니다 육십촉 알전구일랑 바꾸어 끼우고 부질없
을망정 불을 기다리렵니다 흙손으로 무너진 곳 때워보겠습니
다 고리 빠진 문도 고쳐보겠습니다


  옹이 같았던 사랑은 날 좋은 대패로 밀고 문지방에 백반을
놓아 뱀 넘나들지 않게 또 깨끗한 달력 그 방 가득 걸어도 좋
겠습니다

 

 


-『수런거리는 뒤란』(창작과비평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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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3

 

문태준

 

 

이 방은 이물스럽다 저녁이 이울고
구석서부터 물오르는 소리들의 구근
장판 걷혀진 구들장으로 불기둥이
훅 지나간다 흔적은 얼마나 관능적인가
까마귀가 내려앉은 부적 위를 지나,
퉁퉁한 거미 문설주 저켠으로 금줄을 친다
처마 밑 망태까지 차올라
밤새 둥근 알을 낳는 닭의 難産
낡고 해져 이 집 흙담처럼 기울어도
검은 가죽나무에 터잡는 마음 다잡으면
빈집은 화려하다 소리들의 구근을 씹을수록
아, 떠나간 자의 이 파란만장함

 

 

 

-시집『수런거리는 뒤란』(창작과비평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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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집의 약속

 

  문태준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별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엿다
  겨울방이 방 한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는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워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시집『가재미』(문학과지성사, 2006)
-『제20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문학사상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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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송찬호

 


지붕 밑 다락에 살던 두통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제 그 집은 빈집이 되었다


가구를 들어내 휑하니 드러난
벽들은 망설임 끝에
좌파로 남기고 결심했고


담쟁이넝쿨들이 넘겨다보던
아름답던 이층 창문들은
모두 천국으로 갔다


그리고, 거실에 홀로 남은 낡은 피아노의
건반을 고양이들이 밟고 지나다녀도
아무도 소리치며 달려오는 이 없다
이미 시간의 악어가 피아노 속을
다 뜯어먹고 늪으로 되돌아갔으니


구석에 버려져 울고 있던 어린 촛불도
빈집이 된 후의 최초의 밤이
그를 새벽으로 데려갔을 것이었다


벌써 어떻게 알았는지
노숙의 구름들이 몰려와
지붕에 창에 나무에 각다귀 떼처럼 들러붙어 있다


이따금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
그들의 퇴거를 종용해 보지만 부력을 잃고
떠도는 자들에게 그게 무슨 소용 있으랴
한동안 그들은 꿈쩍도 않을 것이니

 

 


《시에》2008년 겨울호
-시집『교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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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박진성

 

 

  당신은 내게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의 음악 파일을
보내왔다 나는 비상구를 찾고 있었고 아득한 계단의 끄트머리쯤
당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벼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측백나
무 한 그루가 늦겨울의 햇살을 찌르고 있었고 낡은 모니터가 나뭇
가지에 걸려 있었다 메일이 세 통 와 있었고 꿈결인 듯 잠결인 듯
당신의 머릿결이 만져졌다 나의 신경은 날카로워져서 마우스의 화
살처럼 뾰족한 측백나무 이파리를 자꾸만 떼어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부팅이 되지 않는다 죽은 歌手들이 살던 당신의 집은 검
은 비닐봉지 같은 모니터에 잠기고, 계단의 밑바닥으로 떨어지고
당신의 집에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황사 무렵, 반지하 방 낮은 창으로 모래가 쓸려와 마우스가 서걱
거렸다 까끌까끌한 손으로 당신의 집을 찾아갔을 때 당신이 쓴 시
라든가 음악 파일 몇 개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죽은 가수는
계속 노래하고 있었고 브룩클린으로 간 당신을 생각하자 나는 윈
도우 종료음처럼 쓸쓸해졌다 암호 같은 사랑, 내가 0이었을 때 당
신은 1이었을 뿐 그랬을 뿐

 

 


-시집『목숨』(천년의시작,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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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박형준

 

 
개 한 마리
감나무에 묶여
하늘 본다
까치밥 몇 개가 남아 있다
새가 쪼아먹은 감은 신발
바람이 신어보고
달빛이 신어보고
소리없이 내려와
불빛 없는 집
등불


겨울밤을
감나무에 묶여
앞발로 땅을 파며 김치독처럼
운다, 울어서
등을 밀고 웅크리고 있는 개는
불씨
감나무 가지에 남은 몇 개의 이파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새처럼 개의 눈에 아른거린다


주인이 놓고 간
신발들
빈집을 녹인다
긴 겨울밤.
 

 

 

-시집『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창비, 2002)
-박영근의 시읽기『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실천문학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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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백무산

 


빈집을 보면 사람들이 수군거리지
사람 떠난 집은 금방 허물어지거든
멀쩡하다가도 비워두면 곧 기울어지지
그건 말이야 사람이 독해서야

 

벽과 기둥을 파먹는 것들
돌을 갉아먹는 이빨 날카로운 시간들
사람 사는 걸 보면 질려 달아나지
삶이 독해서야 그건


그랬지 내가 허물어지던 때마다
내게서 사람들이 빠져나간 뒤였지 그땐
나를 구원하러 온 것마저 나를 허물었지
타인의 욕망이 나를 버티게 하는 나의 욕망에 대해 무지했었지


사람이 빠져나가고 이념만 남은 마을을 본 적이 있지
사람이 빠져나가고 풍요만 남은 마을을 본 적이 있지
사람이 빠져나가고 이상만 남은 마을을 본 적이 있지


삶의 하찮은 몸짓들 하찮은 욕망들 하찮은 구원들
그 비루하고 모진 기득권들이 빠져나가면 곧 허물어지지


나는 집을 떠나려고만 했지
수십 년째 집을 떠나려고만 했지
굼벵이처럼 비루한 것이 싫어서 그랬고
슬퍼서 그렇게 하지 못했지
사람의 모진 것들이 자꾸 슬퍼서

 

 

 

-계간『창작과비평』(2012,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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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집


  엄원태

 


  슬하(膝下)를 비운지 오래된 노인이 앙버티던 집마저 마침내 비었다. 잊을만하면 흐르던 개숫물과 빨랫줄에 휑하니 걸려있던 내의 몇 점이 존재증명의 전부이던 집. 집마저 마지막 무릎을 꺾으니, 영락없이 찢긴 거미줄 형세다.

 
  처마 아래 연탄가스 냄새를 피우곤 하던 집. 누군가 지날 때 마다 비쩍 마른 슈나우저가 몇 번 본능처럼 짖다가 말던 집. 무슨 저항의 표시인 듯, 도라지꽃을 텃밭에 자욱이 피워 놓곤 하던 집.


  마당에 솥 걸어 폐목을 때어 뭔가를 끓이거나, 혼자 중얼거리며 진땅에 누가 놓은 디딤돌을 간단히 치워버리곤 하던 영감님이 사라졌다. 희랍인 조르바처럼 키가 껑충하던 고집쟁이 영감님마저, 저 쓸쓸한 슬하(膝下)를 떠나버린 것.
 

  말라붙은 고구마 줄기들, 따지 않은 채 메마른 고춧대며 옥수숫대들만 늦가을 비에 후줄근히 젖어가고 있었다. 지붕과 벽들이 천천히, 주저앉고 있었다. 제 아랫도리를 지우고 있었다.

 

 

 

―웹진『시인광장』(2009.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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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김용택

 


봄볕에 마르지 않을 슬픔도 있다.
노란 잔디 위의 저 타는 봄볕, 무섭다. 그리워서
몇 굽이로 휘어진 길 끝에 있는 외딴집
방에 들지 못한 햇살이 마루 끝을 태운다.
집이 비었으니, 마당 끝에 머문 길이 끝없이 슬프구나
쓰러진 장독 사이에 애기똥풀꽃이 핀다.
집 나온 길이 먼 산굽이를 도는 강물까지 가고 있다
강물로 들어간 길은 강바닥에 가 닿지 못해 강의 깊은 슬픔을 데리고 나오지 못한다.
사랑이 허공인 줄 알기에, 그러나 봄볕에 마르지 않는 눈물도 있다.
바닥이 없는 슬픔이 있다더라.
외로움이 없다면, 그 생은 낡으리.
봄볕에 물들지 않는 잔디도 있다.
속으로 우는 강물이 땅을 딛지 못하는구나.
목줄이 땅기는
사랑이 없다면, 강물이 저리 깊어질 리 없다.
집이 왼쪽으로 기울었으나, 나는 집 뒤안에 가서 하늘을 본다
바닥없는 슬픔을 깊이 파는 강물소리를 나는 들었다.
 

 


―계간『문학동네』 (2010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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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윤제림

 


울타리에 호박꽃 피었고
사립문 거적문 저렇게 활짝 열려 있으면
주인이 멀리 안 갔다는 표시였다.
금방 돌아온다는 표시였다.
옛날엔.


그런 날이면, 들판을 지나온 바람이
대청마루에 누웠다 가곤 했다.


뒤꼍엔 말나리 피었고
방문 창문 저렇게 활짝 열려 있으면
주인이 멀리 갔다는 표시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표시다.
지금은.


오늘 아침엔, 억수장마를 따라온
황토물이 사흘을 묵고 떠났다.

 

 


―시집『그는 걸어서 온다』(문학동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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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김욱진

 

 

내게는 집이 여러 채 있다

그중에 으뜸은

우주(宇宙) 한 모퉁이 분양받은 몸집

 

제일 꼭대기층엔 골방들

그 아래층은

초능력 통신망 닥지닥지 붙은 방 다섯

거기서 숨 한번 길게 들이 쉬고 내려서면

마주보고 마음 나누는 방이 둘

그 아래 밥집 한 채 또 그 아랜 똥집

맨 아래층엔 몸종 거처하는 행랑채 둘

 

휘, 돌아보니

여태 내가 줄곧 거처한 곳은

오감(五感) 가득 채워진 빈방

  

그 사이

아랫목 구들 꽉 막혔다

 

설마, 장작불 활활 지펴대면

막힌 굴뚝 펑 뚫리겠지, 싶어

행랑채 뒤로 돌아들어가

굴뚝 쿡쿡 들쑤시며

간신히 고개 밀어넣고

슥, 올려다보니

방마다 주인 노릇하던 놈들

뿔뿔이 다 도망치고,

없다

 

 

 

―『대구문학 97호』(2012,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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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고광헌

 

 

저 산에

홀로 피어

발길 붙드는 꽃들

이쁘다

 

저 빈집에

홀로 피어

발길 붙드는 꽃들

눈물난다

 

 

 

―시집『시간은 무겁다』(창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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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석여공

 

 

끝났네
지난겨울 그렇게도 춥더니
이제야 꽃샘바람 녹고 봄비 온다네
아 누가 저 비 맞고 와서
불 없는 방 바람벽에 녹슨 마음을 거실라나
오래도록 앉아서 꿈 꾸실라나
촛농 사그라진 새벽에라도 환하게
별빛 총총 깨어 있을라나
북어국 없이도 고봉밥 없이도
내내 따뜻하실라나

 

 

 
―시집『잘 되었다』(문학의전당,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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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1


김환식

 


보라빛이 길을 막았다
그냥 아슴한 골목길을 지나가는데
얕으막한 토담밑에 보랏빛
꽃잎이 쓰러져 있었다
야윈 가지 하나가 몰래 담을 넘어와
그 끝에 보라빛 그리움들을
중얼중얼 피웠던 것인데
그것도 모른 채
간밤에는
가랑비가 서럽도록 내렸다
첫사랑은 누구에게나 애절한 것이다
그 생경스런 간절함들이
보라빛 한 생을 안락사 시켰을 것이다
그런 참담함으로
한참이나
토담밑을 서성인 것 뿐인데
보라빛 향기가 오래된 습관처럼
옷깃마다 아늑히 숨어있는 것이다
봄비 오는 밤
한 생을 걸고 흠모했던
내 생의 흔적들
그리고,다시 이슬비에
눅눅한 밤은 푸른 곰팡이가 쓸고
하룻밤 황홀한 갈등도 없이
온몸을 던져버린 보라빛 꽃잎들
그 두서없는 사연들의 절절한 흐느낌
또는
사래 긴 라일락의 사랑이야기

앉은뱅이처럼
그렇게 빈집 하나 앉아 있었다

 

 

 
―시집『낙인』(시와반시,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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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이해인

 

 

나는 문득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누군가 이사오길 기다리며
오랫동안 향기를 묵혀둔
쓸쓸하지만 즐거운 빈집


깔끔하고 단정해도
까다롭지 않아 넉넉하고
하늘과 별이 잘 보이는
한 채의 빈집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올 주인이
'음, 마음에 드는데......'
하고 나직이 속삭이며 미소지어 줄
깨끗하고 아름다운 빈집이 되고 싶다

 

 


시집『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열림원,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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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박봉희



텅 빈 새장 옆

찌그러진 개밥그릇만 남았다


남은 것만 남은

그 마당에 비가 내린다


실직, 가출, 비웃음 불면이

깨어진 창문에 흘러 내린다

남아도는 것들로 꽉 차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고 젖는다


때 묻고 무성한 털 엉겨붙은 유기견처럼

짖다가 저물다가 젖는다


죄다 떠나가고 저무는

저 물빛 적막

결국 이렇게 되게 되어 있었다




 시집 『복숭아꽃에도 복숭아꽃이 보이고』(문학의 전당,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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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 1

 

박진형

 

 

햇빛이 집 한 채를 샀다

돌쩌귀가 떨어진 문짝이 펄럭이고

몸이 시커먼 푸새가 처마 밑에서 기어나와

지붕 위로 포릉, 옮겨 앉는다

회칠한 담벽에 붉은 스프레이 글씨로

주인 외출중꿈틀, 지렁이가 기어간다

불 지핀 지 오랜 아궁이에

금 간 사기그릇에 들러붙은 파리가

입 다실 것이 없어 닝닝거린다

 

먼 길 갔다 돌아온 사람 하나

빈집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송곳으로

제 불운의 눈알 찔러 버렸다

홀로 집 지키던 감나무가

노을에 목을 매단 저녁

 

 

 

시선집길은 헐렁한 자루같다(만인사, 201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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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권선희

 

 

누이가 입덧을 했다

고추 모종을 심고 저녁답에 돌아 온 어머니는

뒤란 풍로 위에 약탕기부터 올렸다

누이는 울 밖 복숭아나무 아래까지 나가

노란 똥물을 게웠다

사람 안에 사람 생기는 일

사람 하나가 사람 하나 세상에 내어 놓는 일에 대해

복숭아나무는 어린 복숭아들에게 소곤거렸다

 

누렁이가 새끼를 여섯 마리나 낳았다

장에 다녀 온 아버지는

화덕에 솥을 걸고 북어대가리를 끓였다

누렁이는 누렁누렁한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검고 희고 얼룩덜룩한 새끼들이

퉁퉁 불은 젖을 물고 빨며 토실토실 야물었다

  

 

ㅡ『작가정신』(2014. 제33호)



빈집

 

이하석

 

 

먼지들이 들뜨면 곧장 바람을 탄다

문이 부서져 있어도 더 닫을 마음이 없다

 

축대 아래 마당은 바랜 기억이 빛들로 덮여 있다

축대의 돌들이 얽어짜고 있는 침묵의 구조는

바람만이 그늘진 표정으로 읽어낸다

 

축대 사이 캄캄한 속 내보이는 수구(水口)

그 비밀스러운 입구-또는 출구-가 착잡하게 열려 있다

뒤안의 우묵한 데 고인 물이 그리로 해서 빠져나갈 때는

늘 어둠이 물을 씻어놓아서 빛도 소리도 없었다

 

바깥이 내다보이는 문의 부서진 틈으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다

집 안 구석구석 숨어 있는 어둠의 끈들로 묶인 틈들을

바람이 들컹대며 흔들어 보지만,

봉창부터 여미는 풀넝쿨들의 교묘한 그늘의 직조를

거미들이 재빠르게 마감해놓는다

 

 


ㅡ계간『시작』 (2009년 봄호)

―웹진 시인광장 선정『2009 올해의 좋은시 300選』(2009, 아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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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누구시더라 8


이향아

 

 

어머니가 나를 모르겠다고 한다

‘누구시더라?’ 애저녁에 딱 잡아뗀다

아흔세 살의 어른이 점잖지 못하게 오리발을 내민다

출석부를 읽듯이 내 동무들의 이름을 부르던

친척들 생일이며 제삿날까지 줄줄이 꿰던 총기

어머니가 나를 소 닭 보듯이 한다

혼돈의 태초처럼 아득한

캄캄한 기억의 꺾이는 회랑에서 가물가물 꺼지는 숨결

장질부사 앓으며 내 가쁜 숨이 산턱을 넘을 때,

뜨거운 이마에 손을 얹어 당신 숨이 먼저 멎고

그 염통 속까지 열꽃으로 삭아 내렸다던 어머니가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을 떼어주었다더니

이제 와서 다 저녁에 모르겠다면

세상 어느 누가 나를 안다 하겠으며 알려고 하겠는가

‘누구시더라, 어디서 뵌 듯한데 누구시더라’

갈수록 캄캄해지는 거리, 낯선 세상

내가 정말 누구더라 알 수가 없다


 

 

ㅡ월간『시문학』(201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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