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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 - 강영은/김연필/곽재구/문숙/이은봉...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12. 10.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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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無花果

 

   강영은

 

 

   무화과는 당신이 좋아하는 열매 책장을 넘기며 무화과나무가 들어찬 숲을 상상한다
유래되지 않은 수유방식에 대해 농익은 향기는 벌어지지 않는 입을 궁금해한다


   암술과 수술이 교접하는 꽃방을 보여주지 않는 습속은 꽃자루가 비대한 무화과나무의 허와 실 아무도 몰래 꽃을 삼킨 둥글고 달콤한 생각의 뿌리에는 사슴뿔을 단 늑대가 서식한다
 

   뿌리가 극단의 열매라면, 열매의 속살을 비집고 나온 본성을 바람이 먼저 흔든 것이다 바람의 혀끝이 부드럽게 닿았을 뿐인데 흘러내린 과즙은 날카로운 이빨에 물어뜯긴 피의 맛
가지가 무르기 전에 여름이 왔다
 

   내가 이미 뿌리에 놓였으니 당신은 꽃을 보려고 하지 마라 꽃 턱이 자란 열매는 꽃을 보여주느니 꽃 보다 먼저 자진할 것이다
 

   하지 마, 하지 마, 두 마리의 짐승이 잎사귀를 흔드는 저녁 손바닥보다 작은 잎사귀는 극단을 가린 최초의 그늘 혹은,

 
   벌거벗은 서녘이 사슴뿔에 걸릴 때 당신이라는 페이지 속에서 무화과나무 열매가
툭, 터졌다

 

 


―계간『시안』(201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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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화과


   김연필 

 

   그곳에는 아무것도 피지 않았다. 그곳에는 아무런 꽃도 피지 않고 아무런 웃음도 피지 않았다. 그곳에는 아무런 소리도 음악도 피지 않고, 아무런 마음도 새도 피지 않았다. 아무것도 피지 않는 벌판에 아무것도 아닌 다리가 놓이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걸어간다. 다리 너머에는 아름다운 숲이 있고, 아무것도 피지 않은 아름다운 숲이 있고, 아무것도 아닌 고장난 기계들이 영원히 피지 않을 꽃들을 돌본다. 사람이 끝없이 닿아도 영원히 피지 않을 꽃이 있고, 사람은 끝없이 다가간다. 꽃이 피지 않아도 아무도 탓하지 않는 불행한 사람들이 다가간다.

 

 


―계간『시와 세계』(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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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

 

곽재구

 

 

먹감색의

작은 호수 위로

여름 햇살

싱싱하다

어릴 적엔 햇살이 나무들의 밥인 줄 알았다

수저도 없이 바람에 흔들리며 천천히 맞이하는 나무들의 식사시간이 부러웠다

엄마가 어디 가셨니?

엄마가 어디 가셨니?

별이 초롱초롱한 밤이면

그중의 한 나무가

배고픈 내게 물었다

 

 

 

―시집『와온 바다』(창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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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
 

문숙

 

 

비구니 스님과 함께 산길을 오른다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이 언뜻언뜻 보이는 숲길

벌 한 마리가 스님 주위를 빙빙 돌며 따라붙는다

꽃을 지운 저 몸에도 달짝지근한 곳 있었던가

하얀 목덜미를 훔쳐보며 닝닝닝 틈을 노린다

뒤따르던 내가 팍, 때려잡고 싶은 마음 참는다

벌에게 내가 붙들려 자꾸 발을 헛놓는다

뻐꾸기 울음소리가 물방울 터지듯 축축하게 스미는 봄날

민둥산 같은 스님 머리에 간간이 나뭇잎 그림자가 진다

못 본 척 못 들은 척

스님은 숨소리도 없이 가던 길만 간다

제 몸속에 꽃을 버린 나무 한 그루 저 홀로 무심하다

 

 

 
―시집『기울어짐에 대하여』(애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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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


이은봉

 

 

꽃 피우지 못해도 좋다


손가락만큼 파랗게 밀어 올리는

메추리알만큼 동글동글 밀어 올리는


혼신의 사랑…


사람들 몇몇, 입 속에서 녹아

약이 될 수 있다면


꽃피우지 못해도 좋다


열매부터 맺는 저 중년의 生(생)!

바람불어 흔들리지도 못하는

 

 


―시집『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창비, 2002)
―일간『시가있는 아침』(중앙일보, 2011.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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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무화과라니


-고재종

 


끝내 하고 싶은 말

한 송이 피워내지 못하고

내벽에서 생기는 지독한 담즙을

애써 삼킨 삶이

저렇게 뭉툭한

저렇게는 검붉은 곱사둥이라니,

눈 닫고 귀 닫고

입 없는 채로

허구보다 더 끔찍한 생의

맨 얼굴을 하고

인사동 좌판 리어카 위에서

울근불근거리고 있는,

저 꽃도 아니고 열매도 아닌

생의 실격자(失格者)들의

마지막 노여움들이라니.

 

 


―일간『한국시단』(한국일보, 2008.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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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의 꽃


박라연

 


나는 피고 싶다.

피어서 누군가의 잎새를 흔들고 싶다.

서산에 해지면

떨며 우는 잔가지 그 아픈 자리에서

푸른 열매를 맺고 싶다 하느님도 모르게


열매 떨어진 꽃대궁에 고인 눈물이

하늘 아래 저 민들레의 뿌리까지

뜨겁게 적신다 적시어서

새순이 툭툭 터져오르고

슬픔만큼 부풀어오르던 실안개가

추운 가로수마다 옷을 입히는 밤

우리는 또 얼마만큼 걸어가야

서로의 흰 뿌리에 닿을 수가 있을까

만나면서 흔들리고

흔들린 만큼 잎이 피는 무화과나무야

 

내가 기도로써 그대 꽃피울 수 없고

그대 또한 기도로써 나를 꽃피울 수 없나니

꽃이면서 꽃이 되지 못한 죄가

아무렴 너희만의 슬픔이겠느냐

피어도 피어도 하느님께 목이 잘리는

꽃, 오늘 내가 나를 꺾어서

그대에게 보이네 안 보이는

안 보이는 무화과나무의 꽃을

 

 

 

―시집『서울에 사는 평강공주』(문지,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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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 나무에 기대어


유하

 


무화과 나무에 기대어,

꽃시절을 세상에 바치고

자기 내부로 꽃을 피웠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무화과 꽃차례 속으로 들어가

나무에게 꽃가루를 전하고

끝내 출구를 찾지 못한 채

그 안에서 생을 마치는 꿀벌들처럼,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택한 사람들

 

무화과 나무에 기대어,

별똥별의 길과

그 별똥별의 편도를 따라 가버린 이들이

마침내 피워낸

보이지 않는 꽃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시집『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열림원,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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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화과를 먹는 저녁

 

   이성목

 

 

 

   지난 생에 나는 거기 없는 당신을 기다리는 벌을 받고 울다가 내 안으로 들어와 몸져누운 날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우두커니 서서 육신을 익혀가는 계절, 몽둥이에 흠씬 두들겨 맞은 듯 엉덩이에 푸른 멍이 번지던 저녁이 있었습니다.


   한 시절 몸을 탐하느라 나를 잊을 뻔도 했습니다. 아파하려고 꽃이 나에게 왔었다는 것, 위독은 병이 아니라 이별의 예각에 숨어 피는 꽃이라는 것조차


  거기 없는 당신을 기다리다가 끝내 당신 속으로 들어간 마음이 진물처럼 흘러나와 어찌할 수 없을 때,
  바람은 스스로 지운 꽃냄새를 풍기며 선득하게 나를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당신이 없다면 어느 몸이 아프다고 저렇게 큰 잎을 피워내서 뒤척일까요.

 

  아무렇게나 태어난 아이들이 골목길로 꿀꺽꿀꺽 뛰어드는 환청, 꽃을 숨기느라 땅이 저물고 하늘이 붉어지는 것을 몰랐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적 없는 꽃냄새가 당신도 없이, 입안에 가득하였습니다.

 

 
 

 -시집 『노끈』(애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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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화과나무 열매의 계절


   이제니

 


    그 시절 나는 잘 말린 무화과나무 열매처럼 다락방 창틀 위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장례식 종이 울리고 비둘기 날아오를 때 불구경 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빠는 일 년 내내 방학. 조울을 앓는 그의 그림자는 길어졌다 짧아졌다 짧아졌다 길어졌다. 넌 아직 어려서 말해 줘도 모를 거야. 내 손바닥 위로 무화과나무 열매 두 개를 떨어뜨리고 오빠도 떠나갔다. 기다리지도 않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되는 일은 무료한 휴일 한낮의 천장 모서리같이 아득했다.


   오빠가 떠나자 남겨진 다락방은 내 혼잣말이 되었다. 열려진 창밖으로 끝없는 바다. 밤낮 없이 울고 있는 파도. 주인을 잃은 마호가니 책상 위에는 연두 보라 자주 녹두 색색 종이테이프 지우개 연필 증오 수줍음 비밀 비밀들. 도르르 어둠의 귓바퀴를 감아 넣듯 파랑파랑 종이꽃을 접으며 나는 밤마다 오빠의 문장을 읽었다.


   누구에게도 보내지 않을 편지를 쓰고 또 쓰는 밤. 아무도 나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미워하는 고백의 목소리. 오빠의 공책 위로 지우개 가루가 검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것들은 언제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들일까. 기다리는 것들은 언제까지 기다리는 것들일까. 어제의 파도는 어제 부서졌고 오늘의 파도는 오늘 부서지고 내일의 파도는 내일 부서질 것이다.


   모두 어디에 계십니까. 모두 안녕히 계십니까.


   밤이면 착하고 약한 짐승의 두 눈이 바다 위를 흘러 다녔다. 끝없이 밀려갔다 밀려오는 물결들. 끝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가없음. 그것이 나를 울면서 어른이 되게 했다. 열매를 말리는 건 두고두고 먹기 위해서지. 잘 말린 무화과나무 열매를 씹으며 나는 자라났고 떠나간 사람들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또다시 무화과나무 열매의 계절이 돌아오고 있었다.

 

 

-웹진『문장』(2008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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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화과 나무


   강영숙

 

 

   하늘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그 나무의 열매, 한 그루 세월을 붙들고 있다 내안에서 자라난 그 나무 붉은 피 흐르지 않는다


   손바닥 마구 흔들던 잎들 하늘을 뒤덮는다 아이와 나는 막은 바람 홀연히 빠져나가고 가지마다 싱싱한 눈물 울멍울멍 꽉 채운 동그라미를 무화과꽃이라 부른다  


   혈색이 창백한 혈액 종양내과 복도, 웃음잃은 사람들 차례대로 호명을 기다린다 오래전, 소아병동에서 노란 위액을 토해내던 차트번호 1137440 어린아이가 스물 다섯 청년이 되었다 혈관 불뚝거리는 팔뚝엔 채혈 바늘 마음대로 들락거린다

  
   매연에 질식된 공기와 소통하는 국채봉상공원 길을 걷는다 달구벌 대종이 소리를 가둔 채, 제야의 종소리를 준비하고 있다 잎들 뜯긴 나무들 서로를 세차게 껴안는다 봄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나는 희디흰 핏방울 뚝뚝 떨구는 감옥, 무화과꽃이다

 

 

-<2009 제11회 수주문학상 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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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집 뒤뜰에 무화과가 있었지


이윤학

 

 

쩜매 놓은 커튼이 풀리더니

포화상태가 되더라

누군가 머리를 들이밀고

뛰어들 것만 같더라

죄지은 사람들 얼굴이

그려지고 있더라

 

가슴이 쪼만해져

조잡한 벽지에 붙은

껌딱지가 되더라

 

커튼이 날아오르고

비바람 몰아치는 창밖을 보았더니

뒤틀리는 무화과나무가 서 있더라

번갯불에 열매가 벌어지고 있더라

 

붉고 얇은 남방을 쩜매 입은

긴 머리 소녀가 울고 있더라

 

오빠, 그냥 불러봤어……

 

쪼매 벌어진 입을 가리고 웃던

열여덟 소녀가 부르고 있더라

 

 


―계간『시인동네』(2012년 여름호)